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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지원금 믿고 544억 공사 시작했는데...섬나라 수몰 위기

중앙일보

입력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안티구아는 최근 대대적으로 공공시설 외관 보수를 시작했다. 날로 잦아지고 있는 허리케인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지난 7월 허리케인 ‘엘사’가 휩쓸고 간 경찰서 창틀과 병원 지붕 등을 보강재로 교체하는 작업을 했다. 공사 비용은 최소 4600만 달러(약 544억 원). 기후위기 대응 자금을 대겠다는 선진국의 약속을 믿고 일을 진행했다. 하지만 지원금은 감감무소식이었고, 안티구아가 고스란히 그 비용을 떠안고 있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2일(현지시간) COP26행사에서 넷제로(탄소중립) 목표를 약속하며 "선진국은 개도국을 위해 1조 달러 상당의 기후 금융 조성을 서둘러 달라"고 당부했다. [AP=연합뉴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2일(현지시간) COP26행사에서 넷제로(탄소중립) 목표를 약속하며 "선진국은 개도국을 위해 1조 달러 상당의 기후 금융 조성을 서둘러 달라"고 당부했다. [AP=연합뉴스]

지난 3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가 전한 개발도상국 현실이다. 개도국들은 기후변화의 피해를 고스란히 받고 있지만, 제대로 된 지원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선진국의 자금 지원에 속도를 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런 이유로 제26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의 승패는 결국 ‘돈’에 달렸다는 지적이 나온다고 FT는 전했다.

기후위기 대응에서 재원 마련은 언제나 가장 큰 난제였다. 이번 COP26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만 이번에는 민간 금융사와 기업인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눈에 띄었다는 게 워싱턴포스트(WP) 등 외신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실제 COP26 3일 차에 접어든 이날 세계 경제는 개도국의 청정에너지 전환을 돕기 위해 수조 달러의 자금 투입을 약속했다. 이에 따르면 탄소배출 감축 프로그램을 위한 금융회사 동맹인 ‘탄소 중립을 위한 글래스고 금융연합(GFANZ)’은 2050년까지 탄소 중립 달성을 위해 자금을 지원하는 데 합의했다. WP에 따르면 GFANZ에 소속된 은행·투자사·보험사 등 450여 개 금융기관의 총 자산은 130조 달러 (약 15경 3660조원)에 달한다. GFANZ는 지난 1년 사이 기업들의 자산 규모가 약 26배로 폭증해 탄소 중립 달성을 위한 100조 달러(약 11경8500조 원) 마련에 무리가 없다는 데 뜻을 모았다.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는 COP26연설에서 환경 복원과 식량 체계 변화에 20억달러(약 2조 3600억원)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EPA=연합뉴스]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는 COP26연설에서 환경 복원과 식량 체계 변화에 20억달러(약 2조 3600억원)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EPA=연합뉴스]

세계에너지연합도 민간 자선재단과 개발은행으로부터 105억 달러(약 12조4000억원)를 모았으며 앞으로 공공 및 민간에서 총 1000억 달러(약 118조원) 규모의 자금을 모으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앞으로 투자 결정 시 기후변화 문제를 우선순위에 두도록 노력하겠다는 금융 기관들의 다짐이다.

선진국, 1000억 달러 내놓겠다더니…10년째 나 몰라라 

WP는 이들의 약속이 실행된다면 금융산업계가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내리는 가장 중요한 결정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환경단체들도 투자자들의 지원 확대를 환영했다. 다만 모호한 세부 계획과 각국 분담금 계산 등 실질적인 이행 방안이 없다는 게 문제다. ‘말뿐인 약속’에 그쳤던 이전 기후협약의 전철을 밟을 것이냐는 우려도 나온다.

환경단체들이 꼬집는 건 각국 정부와 민간기업의 진정성이다. 이미 몇 차례의 약속을 어긴 전력 때문이다. 앞서 주요 7개국(G7)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2020년까지 개도국에 매년 1000억 달러의 기후기금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2009년 코펜하겐에서 합의한 이 약속은 2015년 파리기후협정의 토대가 됐고, 선진국과 개도국 간 신뢰 구축의 신호탄이 됐다.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19년 기준 개도국에 지원된 기금은 약 796억 달러(약 95조원)에 그쳤다. 현재로서는 2023년은 돼야 목표를 달성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세계 금융기관 및 국가가 공약한 기후금융 규모.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세계 금융기관 및 국가가 공약한 기후금융 규모.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지원금의 절반 이상이 차관으로 제공되는 것도 문제다. 기후변화 적응을 위한 비용은 급속도로 늘고 있는데, 지원 속도는 느리다 보니 결국 개도국의 빚만 늘어나는 꼴이 됐다. 국제구호단체 옥스팜의 기후변화 정책 책임자인 트레이시 카르티는 “최근 몇 년간 기후금융 규모가 확장된 것처럼 보이지만, 기후 변화에 맞서기 위한 비용 증가와 지원금 증가 간 격차는 더 벌어졌다”고 지적했다.

금융 기업들의 투자 선언도 의심 받긴 마찬가지다. 화석연료에 대한 수천억 달러 투자는 그대로 진행하면서 기후위기 대응을 걱정한다는 게 어불성설이라는 지적이다. 구체적인 지원 방식과 기한을 제시하지 않은 것도 수상하다는 게 환경 운동가들의 주장이다. 결국 친환경 기업 이미지로 세탁하는 ‘그린 워싱’을 노린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환경단체 ‘레인포리스트 액션 네트워크’의 제이슨 오페냐 디스터호프트 기후 캠페인 담당자는 “화석 연료에 대한 자금지원 중단과 넷 제로를 달성하겠다는 약속 모두 가짜”라고 꼬집었다. 영국 비정부기구 ‘글로벌 저스티스 나우’의 도로시 게레로 정책 책임자도 “각국 정부는 기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자금 마련 책임을 민간 기업에 넘길 것이 아니라 주도권을 쥐고 이들을 규제하고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OECD 회원국에 할당된 분담금 대비 실제 지원한 기후금융 비율.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OECD 회원국에 할당된 분담금 대비 실제 지원한 기후금융 비율.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낭비·부패·이중지급…기껏 모은 기후기금 줄줄 샌다

더 큰 문제는 기금을 마련하더라도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지에 대한 합의가 없다는 점이다. FT에 따르면 지금까지 모인 기금의 상당 부분은 자금이 넉넉한 대규모 국제기관으로 흘러갔다. 국제투명성기구는 이 돈이 엉뚱한 곳에 쓰이거나 유사한 곳에 이중 지원되는 등 비효율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 유럽연합(EU)의 2017년 연구에 따르면 청정개발프로젝트에 기후기금이 지원됐지만, 적재적소에 배치되지 못해 그 효과는 예상치의 15%에 그친 것으로 드러났다.

기후기금 분배를 위해 2010년 설립된 ‘녹색기후기금(GCF)’도 제 역할을 못 하는 건 마찬가지다. 내부 분열과 각종 부패로 신뢰는 떨어졌고, 모금액 중 10억 달러(약 1조 원)는 어딘가로 증발했다고 FT는 전했다. GCF 한 관계자는 “GCF를 지원하는 부유국조차 부패 문제에 눈 감았다”며 선진국의 무책임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기후 자선단체인 E3G의 닉 메이베이 대표는 “많은 사람은 재원이 충분하지 않다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기후기금 활용 시스템의 개혁에 있다”고 꼬집었다.

수혜국의 기후금융 지원금 예상 규모.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수혜국의 기후금융 지원금 예상 규모.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전문가들은 기후기금이 적재적소에 배치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구체적인 실행 방안과 공적 자금 관리 및 감시 체계 마련을 꼽는다. 현재로서는 친환경 버스 시스템에 투자한 1000만 달러가 탄소 배출 감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측정하는 방법이 제각각이다. 그러다 보니 기후기금의 사용 과정이 불투명해지고, 횡령 문제도 불거진다. 런던 소아스대학의 머쉬태그 칸 경제학 교수는 “기후대응 프로젝트는 불확실한 미래에 근거한 행동이다 보니 모니터링과 관리가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며 “일관된 기준으로 지원 우선순위를 정하고, 관리 체계 확립으로 기금 사용 흐름의 경로를 파악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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