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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든 폭탄을 제거한다”…인천공항엔 수퍼맨이 있다

중앙일보

입력

#. 인천국제공항 제1 여객터미널. 남자 화장실 한쪽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쇼핑백 한 개가 놓여있다. 쇼핑백에는 외국어로 경고의 글이 적혀있다. ‘폭발 조심’.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전인 2019년만 해도 인천공항은 하루 20만명의 여행객이 오가던 곳. 만일 진짜 폭발물이라면 대규모 인명 피해까지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다. 이럴 때 수퍼맨처럼 출동해 이런 폭발물을 처리하는 이가 있다.

[잡썰 34회] 인천국제공항 하진학 테러대응팀 반장

인천공항 테러대응팀의 활동 모습. 이들은 폭발물은 물론 생화학물질의 탐지와 확산 방지 등 공항의 안전과 관련된 다양한 임무를 수행 중이다. [사진 인천국제공항공사]

인천공항 테러대응팀의 활동 모습. 이들은 폭발물은 물론 생화학물질의 탐지와 확산 방지 등 공항의 안전과 관련된 다양한 임무를 수행 중이다. [사진 인천국제공항공사]

‘현실판 수퍼맨’은 하진학(46) 인천국제공항공사 테러대응팀 반장이다. 하 반장은 국내에 몇 없는 폭발물처리(EOD) 전문가다. EOD는 ‘항공안전 및 보안에 관한 법률’에 따라 2001년 인천국제공항 개항 때부터 활동 중이다. 주 임무는 공항 내 폭발물과 생·화학테러 발생 시 이용객과 공공의 안전을 지키는 일이다. 인천공항에는 하 반장을 비롯해 총 34명(폭발물처리 25명, 생화학물질처리 9명)의 테러대응팀원이 근무 중이다.

폭발물을 비롯한 위험물을 다루는 일을 하는 만큼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된다. 4일 인천공항에서 만난 하 반장은 육군특수전사령부 내 엘리트 특수부대인 제707특수임무단에서 20년 넘게 복무했다. 이라크 현지 파병도 다녀왔다. 최근 예능 대세로 떠오르고 있는 가수 박군(박준우)과도 같은 부대에서 복무한 적이 있다.

인천공항 하진학 테러대응팀 반장. 그는 “이것저것 긴장하는 일이 많다보니 머리가 빨리 센 것 같다”며 웃었다. 머리가 검은 건 염색덕이라고 한다. [사진 인천국제공항공사]

인천공항 하진학 테러대응팀 반장. 그는 “이것저것 긴장하는 일이 많다보니 머리가 빨리 센 것 같다”며 웃었다. 머리가 검은 건 염색덕이라고 한다. [사진 인천국제공항공사]

하루 10번 넘게 출동하기도 

겉으론 평온해 보여도, 하 반장과 그의 동료들은 수시로 비상사태에 맞닥뜨린다. 코로나19 창궐 이전인 2019년에는 2425회 출동했다. 2001년 공항 개항 이래 지난 4월 말까지 총 3만3823회나 출동했다. 그는 “많을 땐 하루 10번도 출동한다”고 했다. 남들 눈에는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주인 없이 놓인 가방이나 쇼핑백 등은 늘 긴장케 한다. “위험물이 아니란 것을 확실히 확인되기 전까진 폭발물인지, 생화학 병기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총기나 도검류 등을 짐 속에 넣어 국내에 반입하려는 시도도 늘고 있다.

쇼핑백 하나 치우는 데 두 시간 넘게 걸려 

등골 오싹한 기억도 많다. 2019년에는 항공기 이곳저곳에서 동시에 사고가 발생할 것이란 테러 제보 전화가 왔다. 보통 사람에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들릴 수 있지만, 전화를 건 사람이 붙잡힐 때까지 그는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인천공항 제1 여객터미널 승객 화장실에 쇼핑백에 든 네모난 상자가 있다는 신고를 받았을 때는 이 상자의 내용물을 확인하고 치우는 데에만 2시간 넘게 걸렸다. 안전한지 아닌지를 확실히 한 다음에야 손을 댈 수 있어서다. 두 시간 만에 꺼낸 내용물은 각 티슈였다. 부탄 가스통이 여럿 달린 유사 폭발물이 발견돼 이를 수거하는 일도 있었다.

인천공항 EOD 출동현황.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인천공항 EOD 출동현황.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이라크 파병 기간 중 네 차례나 박격포탄이 달린 사제 폭발물을 직접 처리했던 그이지만 “인천공항도 총탄이 날아오는 이라크 전장 못지않게 긴장되고 떨리는 순간이 많다”고 했다. 이라크에선 폭발물이 터져도 전장인 만큼 피해를 보는 이는 소수에 그치지만, 늘 사람으로 붐비는 인천공항에서 비슷한 일이 생긴다면 그 규모는 전장에서와는 비교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택배 상자 하나 열 때도 ‘조심’ 

매일매일 긴장 속에 살다 보니 남들과는 다른 버릇이 생겼다. 하 반장은 카페나 지하철 등에 주인 없이 놓인 가방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고 했다. 책상에 쌓여있는 서류 뭉치 등도 유심히 살핀다. 택배 상자가 배달와도 최대한 천천히 집에 들여놓는다. 상자 포장도 칼로 섬세하게 자른다고 했다. 그는 “매사에 조심하는 버릇이 있다 보니, 남들보다 머리가 빨리 센 것 같다”고 웃으며 말했다. 검어 보이는 머리는 염색 덕이란다. 그런 꼼꼼함 덕에 인천공항은 개항 이래 단 한 번도 이렇다 할 큰 사고가 난 일이 없다.

인천공항 테러대응팀의 활동 모습. 이들은 폭발물은 물론 생화학물질의 탐지와 확산 방지 등 공항의 안전과 관련된 다양한 임무를 수행 중이다. [사진 인천국제공항공사]

인천공항 테러대응팀의 활동 모습. 이들은 폭발물은 물론 생화학물질의 탐지와 확산 방지 등 공항의 안전과 관련된 다양한 임무를 수행 중이다. [사진 인천국제공항공사]

매일의 평온을 지키기 위해 하 반장과 동료들은 강도 높은 훈련을 한다. 공항 어디에서 위험물 신고가 들어오던 10분 이내 현장에 도착한다. 매일 연습해둔 최단 이동 동선을 통해서다. 야간에는 매월 2회씩 자체 출동 훈련을 한다. 19가지 위험 시나리오를 마련해놓고 거기에 대비 중이다. 참고로 인천공항 테러대응팀은 방폭복과 폭발물 처리 차량, 화학 작용제 탐지기 등 총 27종 186점의 대(對)테러 장비를 갖추고 있다. 전 세계 어느 공항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수준이다.

“눈에 띄지 않는 일이지만 보람”

최근에는 새로운 위험 요인이 늘고 있다고 했다. 대표적인 것은 드론을 이용한 테러 위험이다. 파괴력이 강한 물포총 등을 활용해 위험 요소를 제거하는 연습을 꾸준히 하는 이유다. 그의 목표는 지금처럼 인천공항이 늘 안전한 공항으로 남도록 하는 일이다. 하 반장은 “비록 남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일이어도 눈에 띄지 않는 게 ‘안전한 공항’이란 의미 아니냐”며 웃었다.

그는 공항 이용객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하 반장은 “액체류 등 기내 반입 금지 물품을 공항 아무 곳에나 놓아두는 일이 줄어들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누군가에게는 먹다 남은 음료가 다른 이에게는 ‘테러 위험 물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3만3823회에 달하는 출동 건수 중 2만1384건(63%)은 이런 방치 물품으로 인한 것이었다.

오늘도 그와 그의 동료들은 공항 내 곳곳을 ‘매의 눈’으로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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