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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뱉을 침, 내가 먼저 맛본다" 남을 미워하면 내 손해인 까닭 [백성호의 예수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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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호의 예수뎐

이스라엘 북부에 있는 갈릴리 지역으로 갔다. 거대한 호수 뒤에 팔복교회가 있다. 교회의 뜰은 푸르렀다.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 있었다. 야자수를 비롯해 키 큰 나무들도 곳곳에 서 있었다. 한낮의 따가운 볕을 가려주는 그늘 아래 순례객들이 묵상에 잠겨 있었다. 그들은 무릎 위에는 성서가 펼쳐져 있었다. 하나같이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의 산상수훈 대목이었다.

갈릴리에 있는 팔복교회에는 예수가 설한 산상수훈의 팔복이 하나씩 바윗돌에 새겨져 있다.

갈릴리에 있는 팔복교회에는 예수가 설한 산상수훈의 팔복이 하나씩 바윗돌에 새겨져 있다.

저 푸른 풀밭 어디쯤에서 예수는 말했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복음 5장 7절)

언뜻 보면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자세히 읽어보면 그 뜻이 모호하다. 자비로운 사람은 자비를 베푸는 이들이다. 그런데 왜 그들이 자비를 입게 되는 걸까? 그 사이에 연결 고리가 없다. 좋은 일을 하니까 하늘에서도 상을 주는 거겠지, 하고 대충 얼버무릴 수도 있으리라. 그런데 예수의 행복론에는 정확한 이치가 녹아 있다. 그 이치를 풀어낼 때 ‘행복의 비밀’도 풀린다.

(25) 남을 미워하면 왜 마음이 불편한가

어찌 보면 예수는 ‘과학자’다. 나는 성서를 읽을 때마다 이를 절감한다. 그는 이치를 꿰뚫은 마음의 과학자이자 영성의 과학자였다. 당시 유대의 전통적인 가르침은 이런 식이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마태복음 5장 21절)

그런데 예수의 문법은 달랐다. 그는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마태복음 5장 22절)라고 말했다. 아니, 형제가 함께 자라다 보면 싸울 수도 있는 거지, 어떻게 형제에게 화를 몇 번 냈다고 재판에 넘겨진다는 걸까. 그뿐만이 아니다. 예수는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복음 5장 22절)라고 했다. ‘세상에, 그럼 감옥에 가지 않는 사람이 없겠네.’ 이런 생각이 절로 솟구친다.

팔복교회의 정원을 걷다보면 예수가 말한 산상수훈의 팔복 메시지를 하나씩 만나게 된다. 정원의 오솔길이 순식간에 묵상이 길로 바뀐다.

팔복교회의 정원을 걷다보면 예수가 말한 산상수훈의 팔복 메시지를 하나씩 만나게 된다. 정원의 오솔길이 순식간에 묵상이 길로 바뀐다.

예수의 표현이 과격했던 게 아니다. 그는 단지 마음의 이치를 강조했을 뿐이다. 예수의 메시지에는 놀라운 과학이 숨어 있다. 누군가에게 침을 뱉으려면 어찌해야 할까. 먼저 내 몸에서 침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입안에 침을 모아야 한다. 그렇게 고인 침을 상대방에게 뱉는다. 누군가에게 화를 낼 때도 마찬가지다. 먼저 내 안에서 화를 만들어야 한다. 그걸 모아서 상대방에게 쏟아낸다. 미움도 그렇다. 세상의 모든 독기가 마찬가지다. 먼저 내 안에 모아서 상대방에게 뿜어낸다.

그렇다면 내가 만든 독기를 가장 먼저 맛보는 사람이 누구일까. 상대방일까 아니면 나일까. 그렇다. 바로 나다.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쏘아붙이기 전에 내 마음이 먼저 미움으로 가득 찬다. “멍청이!”라고 불을 뿜기 전에 내 마음이 먼저 불지옥에 떨어진다. 그렇게 재판에 넘겨진다. 마음의 과학에 따라 ‘자동 재판’을 받게 된다. 그게 이치다.

독기만 그런 게 아니다. 자비도 마찬가지다. 자비를 베풀려면 어찌해야 할까. 먼저 내 안에서 자비심을 만들어야 한다. 그걸 모아야 한다. 그사이에 내 마음이 젖는다. 내가 만든 자비심에 내가 먼저 젖는다. 그 온기와 배려와 사랑의 감정에 내가 먼저 잠긴다. 그게 마음의 이치다. 예수는 그 이치를 명쾌하게 설했다.

팔복교회 안에 조그만 기념품점이 있었다. 수도회에서 만든 물건들이 있었고, 가격도 비싸지 않았다. 나무로 만든 십자가도 있고, 베들레헴의 마구간도 있고, 올리브유와 대추야자도 있었다. 나는 대추야자를 하나 샀다. 점원은 메마른 사막에서 자랄 수 있는 몇 안 되는 식물이라고 했다. 일반 대추보다는 조금 더 컸다. 꿀에 절인 것이어서 맛이 괜찮았다.

이스라엘 사해 근처의 광야. 예수는 젊은 시절 이 근처에서 광야로 가 기도의 시간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 사해 근처의 광야. 예수는 젊은 시절 이 근처에서 광야로 가 기도의 시간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예수는 산상수훈을 통해 사람들에게 하늘의 문을 어떻게 통과할지 일일이 설명했다.

예수는 산상수훈을 통해 사람들에게 하늘의 문을 어떻게 통과할지 일일이 설명했다.

그토록 삭막한 사막에서, 물 한 방울 보이지 않는 광야에서 야자수는 어떻게 열매를 맺을까. 점원이 야자수 뿌리를 찾아보라고 했다. 야자수 밑동을 보면 예닐곱 개의 뿌리가 아니라 털보 수염처럼 생긴 수천 개의 뿌리가 달려 있다. 야자수 한 그루가 1년에 뻗어 내리는 뿌리의 개수는 약 5000개라고 한다. 물이 없는 사막에서 뿌리는 땅속으로 파고 내려갈 것이다.

가게를 나오면서 생각했다. 야자수는 왜 그토록 많은 뿌리를 뻗는 걸까. 그건 간절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을 축이고 자신의 삶을 적셔줄 물 한 방울이 그만큼 절실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도 광야와 같다. 삭막한 사막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뿌연 모래뿐이다. 모래바람이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수시로 몰아친다. 내일은 물론이고, 모레도 글피도 보이지 않는다. 어디를 향해 발을 떼야 할까. 길을 잃기에 십상이다.

예수의 산상수훈을 모티브로 그린 작품. 산상수훈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삶의 나침반이 된다.

예수의 산상수훈을 모티브로 그린 작품. 산상수훈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삶의 나침반이 된다.

그처럼 막막한 삶의 사막에서 예수의 산상수훈은 나침반이 되어준다. 내 안의 물줄기를 찾아 어디로 뿌리를 내려야 할지 일러준다. 캄캄한 밤을 밝히는 하늘의 별처럼 길을 보여준다.

〈26회에서 계속됩니다. 매주 토요일 연재〉

짧은 생각

예수는 ‘마음의 과학자’입니다.
산상수훈을 묵상하다보면
예수님이 내놓은 ‘마음의 이치’에 깜짝 놀라게 됩니다.

자비로운 사람들이
왜 자비를 입게 되는지,

독기를 품은 사람들이
왜 독기를 마시게 되는지 정확하게 짚어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왜 그럴까요.

원수를 미워할 때 내 안에서 솟아나는
그 독한 독기를 스스로 마시지 말라는 뜻입니다.
미워하고, 미워하고, 미워하다보면
어느덧 독기에 중독돼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될 테니까요.

오히려 예수님은 ‘독기’를 ‘사랑’으로
치환하라고 말합니다.

“네 마음에 독 주사를 놓지 말고, 사랑의 주사를 놓아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의 첫번째 수혜자는
원수가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위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 게 아니라,
우리 각자 자신을 위해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한 게 아닐까요.

그걸 통해
미움의 독기에 취한 나를
사랑의 감정에 취하게끔 바꾸는 겁니다.

생각할수록 참 대단합니다.

마음의 문제를 보고,
마음의 이치를 알고,
마음의 치료를 위해 내놓는 처방전이 말입니다.

그 처방전 속에는
‘마음의 과학’이 녹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을
‘마음의 과학자’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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