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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의 간호사' 그녀, 대학병원 그만두고 오지로 떠난 까닭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간호사 박지혜(32)씨의 일터는 사람들이 ‘전쟁터’라 부르는 곳이다.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라이베리아, 카메룬, 남수단…. ‘국경없는의사회(MSF)’ 소속 활동가인 그는 남수단에 두 차례, 내전·분쟁 지역에 4년간 5번의 국제 구호 활동을 했다.

[별★터뷰]

그곳에서의 출근길엔 무전기 2개, 핸드폰 2개, GPS 등을 챙긴다고 한다. 연락수단을 한가득 가져가는 이유는 통제불능, 예측불허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서다. 총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있는 마을로 들어가는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지만, 환자들이 있기에 길을 나선다. 박씨를 ‘전쟁터의 간호사’라 부르는 이유다.

박씨는 그러나 구호 활동이 행복하다고 했다. “실력 있는 구호활동가가 되는 게 나의 꿈”이라면서다. 6번째 구호활동을 위해 출국을 일주일 앞둔 박씨를 5일 만났다.

대학병원에 사표를 던지다

박지혜 구호활동가가 2018년 12월 라이베리아에서 한 어린 환자를 돌보고 있다. [국경없는의사회 제공]

박지혜 구호활동가가 2018년 12월 라이베리아에서 한 어린 환자를 돌보고 있다. [국경없는의사회 제공]

박씨가 지금의 모습을 꿈꾸게 된 건 고교 시절 ‘남수단의 슈바이처’ 고(故) 이태석 신부의 활동기를 접하면서부터다. “한 마을의 아이들에게 다른 삶을 줄 수 있는 국제구호활동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됐다고 한다. 이후 간호학과에 진학했고 국제구호단체에 도전했다.

처음 국경없는의사회에 지원서를 낸 건 간호사로 임상 경력 2년을 채운 2015년, 26세 때다. 짧은 임상 경험 탓에 첫 탈락의 쓴맛을 봤고, 2017년 두 번째 도전에서는 영어 실력 부족이 걸림돌이 됐다. 4년 6개월 일한 대학병원에 사직서를 내고 캐나다 어학연수를 떠난 이유다.

든든한 연봉, 약속된 안정을 포기한 그에게 사람들은 “어쩌려고 그러냐”고 했다. 이제 익숙해진 일을 그만두고 ‘굳이 도전해야 할까’라는 생각도 들었다고 한다. 박씨는 “씨앗이 자라서 나무가 되는 것처럼 마음 한편에 뿌려놓은 ‘국제구호활동가의 꿈’이 계속 자라는 것 같았다”고 했다. 2017년 12월 세 번째 도전 만에 합격 메일을 받았다.

2주 동안 아이 다섯이 죽었다

5년의 노력 끝에 국제구호활동가가 됐지만, 거대한 ‘벽’을 마주했다. 수술실 간호사 임무를 받고 라이베리아로 떠난 두 번째 구호 활동에서 첫 2주 동안 다섯 명의 아이가 세상을 떠나는 걸 수술실에서 지켜봤다. 한국이었으면 살릴 수 있는 장티푸스 환자들이었다.
“한국에서 수술실 간호사로 일한 수년 동안 살리지 못한 환자는 3명이었다. 그런데, 2주 만에 5명을 잃었다. 사람을 살리고 싶어서 여기 왔는데, 계속 있어야 하는 이유를 잃어버린 순간이었다. 내가 뭘 바꿀 수 있겠느냐는 무력감이 제일 컸다.”

박지혜 구호활동가가 2019년 12월 남수단에서 구호활동을 하고 있다. [국경없는의사회 제공]

박지혜 구호활동가가 2019년 12월 남수단에서 구호활동을 하고 있다. [국경없는의사회 제공]

내게 안기던 아이의 미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로 느껴지던 구호활동에 다시 의미를 찾게 해준 것도 환자였다. 라이베리아에서 장티푸스 합병증으로 국경없는의사회를 찾은 9살 여자아이는 오래 방치돼 위독했다. 몸무게 13㎏으로 수술을 버틸 체력이 없어 보였다. 현장의 의료진도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지만, 아이는 6개월 동안 배를 가르는 대수술을 5번이나 버텨냈다.

박씨는 “모두가 포기한 상황에서도 아이는 버티고 버텼다. 차츰 회복하는 모습을 봤다. 기적적인 순간들이었다. 그 아이가 퇴원하고 첫 정기검진 때 내게 달려와서 안기며 뽀뽀를 해줬다. 그 뽀뽀가 잊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 아이의 삶을 바꿀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구호 활동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박씨는 “그 아이가 없었으면 그때가 마지막 구호활동이 될 수도 있었다”라고 기억했다.

2019년 8월 카메룬에서 박지혜 구호활동가가 현지 어린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다. [국경없는의사회 제공]

2019년 8월 카메룬에서 박지혜 구호활동가가 현지 어린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다. [국경없는의사회 제공]

실력을 키워야 한다

‘실력 있는 구호활동가’는 박씨가 절실하게 품은 목표이자 꿈이다. 현장에서 치료의 기회조차 제공하지 못하고 돌려보내는 환자들을 줄이려면 실력이 필요했다. 의료 인프라와 인력이 거의 갖춰지지 않은 현장의 특성상 대부분 구호활동은 특정 질병을 앓는 환자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환자는 이틀을 걸어서 우리를 찾았는데 ‘돌아가라’라고 말을 해야 할 때가 있다. 환자에겐 집에 가서 죽을 준비를 하라는 것처럼 들렸을 것이다. 환자들이 넋을 놓고 벤치에 앉아있는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국경없는 의사회에서 3년째 근무하고 있는 박지혜 간호사가 5일 경기도 부천시 중2동 성당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그는 11일 에티오피아로 6번째 국제구호활동을 떠난다. 임현동 기자

국경없는 의사회에서 3년째 근무하고 있는 박지혜 간호사가 5일 경기도 부천시 중2동 성당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그는 11일 에티오피아로 6번째 국제구호활동을 떠난다. 임현동 기자

다시는 ‘돌아가라’ 하지 않기를…

박씨는 11일 에티오피아로 떠난다. 소아 심장 수술에 중점을 맞춘 6번째 국제구호활동에 설레는 듯 보였다. 이번 임무는 그동안 치료 시도조차 못 했던 질환을 구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박씨는 “이젠 심장질환 환자와 가족에게 ‘돌아가라’고 하지 않아도 된다”며 “더 열심히 배우고 능력을 익혀서 환자들을 살리고 싶다”고 말했다.

별톡(별터뷰).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별톡(별터뷰).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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