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 칼럼] 최악 피하다 초악 만난다

중앙선데이

입력 2021.11.06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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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1호 31면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기자/중앙콘텐트랩

르네상스 시대 네덜란드의 인문학자 에라스무스는 1500년 그리스어와 라틴어 격언을 모은 『아다기아』를 펴냈다. 소싯적 영어 공부하면서 외웠던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에디슨의 명언으로 알려져 있는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같은 경구가 이미 이 책에 나온 것이다. 이와 함께 에라스무스는 오늘날 우리를 위해 ‘선택의 딜레마’에 관한 격언 두 개를 나란히 소개하고 있다.

먼저 “카리브디스를 피해 스킬라에게 잡힌다(evitata Charybdi in Scyllamincidi)”는 게 있다. 최악의 상황을 면하려면 차악이라도 선택해야 하는 경우다. 카리브디스와 스킬라는 귀향길에 오른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디세우스를 좁은 해협에서 기다리는 괴물들이다. 한쪽 기슭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세 줄로 난 입을 가진 머리가 여섯 개에, 목은 뱀처럼 긴 스킬라가 먹잇감을 노리고 있다. 건너편에는 하루에 세 번씩 물을 삼켰다 뱉어내는 거대한 소용돌이 카리브디스가 입을 벌리고 지나는 배를 기다리고 있다.

최악 피하려는 차악 선택인가
최악을 피하려다 초악 만나나
SNS 무장한 선동꾼 막으려면
방관 아닌 적극적 선택이 필요

집으로 가려면 그 해협을 지나지 않을 수 없다. 고민 끝에 오디세우스는 스킬라 쪽으로 배를 몰고 간다. 카리브디스에 맞서다 배가 통째로 침몰하는 것보다는, 스킬라에게 선원 몇 명을 잃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결국 스킬라의 한입에 하나씩 부하 여섯 명을 잃고 오디세우스의 배는 가까스로 해협을 통과할 수 있었다.

선데이 칼럼 11/6

선데이 칼럼 11/6

오디세우스는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악한 상황을 면하려고 한 선택이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있다. “연기 피하려다 불 속에 떨어진다(fumum fugiens in ignem incidi)”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경우가 더 많은지도 모르겠다. 플라톤의 『국가』에도 같은 표현이 있다. “자유민의 통치에 복종하려 하지 않는 백성들은 연기를 피해 불꽃 속에 빠지듯 노예의 폭력에 강제로 복종하게 된다.” 우리에게도 “쓰레기차 피하려다 똥차에 치인다”는 우스개가 있지 않나 말이다.

독자들도 눈치챘겠지만, 에라스무스 얘기를 길게 늘어놓은 건 우리 국민도 비슷한 선택의 딜레마에 놓여있는 까닭이다. 대통령 선거가 5개월도 안 남았는데 여야의 후보들 면면이 참으로 허름하다. 크고 작은 후보들 모두 비호감도가 호감도의 배를 훌쩍 넘는다. 단언컨대 정부 수립 이후 이런 예는 없었다. 찍을 사람이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그중 한 명을 선택해야 한다.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데, 자칫하면 상상도 못 했던 ‘초악(超惡)’과 맞닥뜨리는 결과를 얻을지도 모르게 생긴 것이다.

왜 오늘날의 유권자들은 이런 선택을 강요당하는 걸까. (대한민국만이 아니다) 과거 정치인들에 비해 오늘날 정치인들의 자질과 능력이 떨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과거 ‘3김’으로 일컬어지는 정치 거목들이 있었지만, 민주적 가치의 실천이나 투명성 측면에서 보자면 오늘의 정치인들이 (꼭 자발적 의지의 결과는 아닐지라도) 그들보다 앞서 있을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과거에 비해 훨씬 탈권위적이고 투명해진 사회에서 버텨낼 수 없었을 터다.

어쩌면 그래서 오늘의 정치인들이 더 손해를 보고 있을 수도 있다. 정보가 통제되고 일방적으로만 흐르던 시대의 거목들과는 달리, 요즘 정치인들은 인터넷과 SNS라는 밝은 조명이 켜진 수족관 안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와 같은 존재인 까닭이다. 정치 지도자로서의 신비감은 사라지고 시시콜콜한 일거수일투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다 보니, 정치적 메시지보다는 ‘쌍욕’이나 ‘쩍벌남’ 같은 이미지만 두드러져 쉽게 찌질이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아예 그런 상황을 이용해 SNS가 포장해 낸 이미지만으로 정치를 하려는 무리도 있다. 열정과 책임감, 균형감각을 정치인의 세 가지 덕목으로 꼽는 막스 베버 대신 현대적 의미의 포퓰리즘 선구자인 후안 도밍고 페론을 추앙하는 선동정치꾼들이다. 페론은 "사악한 양키에 분연히 맞섰고 최초로 아르헨티나의 진정한 독립을 이뤄냈다”고 떠벌렸다. 그의 경제적 실패는 대중의 뇌리에서 사라졌고 정치적 성공만 기억됐다. 오늘날 인터넷과  SNS로 무장해 훨씬 강력해진 선동정치꾼들이 앞다퉈 페론을 모방하고 있다.

선택의 순간이 왔다. 프랑스 정치학자 레몽 아롱은 “선택은 선과 악 사이의 투쟁이 아니라, 좀 더 나은 것과 혐오스러운 것 사이에서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이 글의 논지대로 해석하자면 SNS로 피해를 본 정치인과 SNS를 이용하는 정치꾼 사이의 선택이라 요약해도 될 것 같다. 피상적인 것 같아도 그 차이를 알아보는 데 4개월여는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이다. 이후 선택이 낳을 결과의 차이는 그야말로 천양지차일 것이다. 페론의 성공으로 미국은 곤경에 처했지만, 라틴 아메리카는 전체가 재앙에 빠졌다.

재앙을 피하려면 소극적 방관이 아니라 적극적 선택이 필요하다. 찍을 사람이 없다고 포기하면 안 된다. 고대 아테네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페리클레스는 그런 사람을 두고 일갈했다. “정치에 무관심한 시민은 조용함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 시민으로서 무의미한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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