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하인두, 좋아한 방아잎 향기처럼 ‘휘발성 삶’ 살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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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1호 25면

예술가의 한끼

한국적 미감의 정체성을 구현하는 구성과 색감을 찾으려고 한 화가 하인두.

한국적 미감의 정체성을 구현하는 구성과 색감을 찾으려고 한 화가 하인두.

화가 하인두는 시인 천상병과 친했다. 두 사람은 용모도 성격도 너무 다르다. 하인두가 깔끔하고 섬세한 미남에 약간 선병질적이라면 천상병은 울퉁불퉁한 얼굴에 큰 목소리로 거침이 없었다.

가난한 나에게 내가 오천원을 달라 할 때도 만원을 달라 할 때도 너는 “알았다” “알았다” 했다. 인두야 너나 나는 더 살아야 된다. 너는 화가, 나는 시인이다. 잊지말라 요놈아 ! (‘내가 아는 화가, 천상병’, 계간 화랑 1987년 겨울호)

천상병은 인사동을 베이스캠프로 하여 아는 사람을 만나면 일용할 양식이란 명분으로 천원, 이천원을 얻어다 썼다. 역시 인사동을 자주 들렀던 하인두는 천상병에게 남들보다 더 큰돈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림도 그려 주었다.

하인두(1930~1989)와 천상병(1930~ 1993)은 동갑내기다. 천상병이 1월생, 하인두가 8월생인데, 하인두가 형 노릇을 하려 한다고 천상병은 장난스레 불평했다. 하인두는 고향이 창녕읍이고 천상병은 창원 진동이다. 고향도 가깝지만 둘은 부산피란 시절의 서울대를 함께 다녔다. 한 사람은 미대 한 사람은 상대였다.

길에서 만난 친구 재워줬다 옥고 치러

왼쪽부터 하인두, 장성순, 김창열, 박서보, 전상수, 김청관, 화신백화점화랑, 1958년.

왼쪽부터 하인두, 장성순, 김창열, 박서보, 전상수, 김청관, 화신백화점화랑, 1958년.

창녕 출신의 하인두는 소년 시절 형을 따라 평양, 제천 등지를 전전했다. 해방되자 창녕으로 돌아와서 새로 생긴 창녕중학교를 다녔다. 마산, 진주 같은 도시에도 미술교사가 부족할 때다. 하인두가 다닌 창녕중에는 다행히도 임충묵이라는 미술교사가 있었다. 미술재료를 구하기도 힘든 창녕읍에서 하인두는 화가의 꿈을 꾸었다. 1949년 상경해 흑석동에 있는 남관(1913~1990)의 창림미술연구소를 찾았다. 홍익대에 입학한 이듬해 6·25 전쟁이 났다. 피란지 부산에서 서울대 2학년으로 편입했다. 1952년 서울대 미대 3년생인 하인두는 상대 2년생인 천상병을 만났다. 천상병은 이미 추천을 받은 시인이었고 하인두는 문학청년이었다.

하인두는 1953년 말에 환도했다. 천상병, 최종태(조각), 이남규(서양화), 정건모(서양화), 이일(미술평론) 등과 어울렸다. 문학과 미술, 모두를 열망하는 청년들이었다. 이들의 우정은 명동의 천막집, 벽돌집, 북어집으로 불리던 대포집의 막걸리 잔 속에서 익어 갔다. 하인두는 말수는 적었지만 촌철살인으로 늘 좌중을 압도했다. 모딜리아니의 그림처럼 비쩍 마른 미남 청년 하인두의 별명은 하딜리아니, 그의 작은 형 시인 하인회는 하이네로 불리었다. 하이네와 하딜리아니는 우애가 각별했다. 종이를 오려 캔버스 위에 붙인 다음 콤프레셔에 물린 분무기로 유채를 뿜어서 묻히고 종이를 다시 떼어내며 붙이기를 반복하는 어려운 작업을 할 때면 하이네가 와서 하딜리아니를 도와주었다.

하인두는 부산으로 내려가 활동을 하다 1958년에 다시 상경했다. 하인두의 ‘안국동 시대’가 시작됐다. 덕성여중에서 교편을 잡았다. 학교에서 가까운 안국동 로터리의 도라지다방에 나이 또래의 화가들이 모였다. 하인두, 박서보, 김서봉, 안상철, 김창렬 등이었다. 함안 출신의 안상철(1927~1993)은 덕성여고 교사 안의 온고당이라는 한옥에서 살았다. 시내를 어슬렁거리다가 통금에 몰려갈 데가 없어진 화가 친구들은 월담해서 이 아지트로 몰려들었다. 시인 고은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하인두와 천상병은 아픈 상처를 공유한 동병상련의 친구였다. 하인두는 길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 권오극이 북에서 내려온 줄도 모르고 집에 재워 주었다가 국가보안법의 불고지죄로 6개월의 옥고를 치른다. 1960년 10월에 수감되었다가 이듬해 봄에 풀려났다. 덕성여중 교사직도 물러나야만 했다.

이 사건 이후 하인두를 보는 주변의 시선이 극도로 차가워졌다. 공민권이 박탈된 하인두는 어디에고 취직할 수가 없었다. 대학 강사가 고작이었다. 생활이 힘들어졌다. 물론 외국행은 꿈속에서나 가능했다. 동료들은 파리로, 도쿄로 가서 전시를 열며 이름을 날리고 있는데 하인두는 옴짝달싹도 할 수가 없었다.

하인두의 ‘만다라’, 캔버스에 유채, 117x80㎝, 1984년. [사진 하인두 유족]

하인두의 ‘만다라’, 캔버스에 유채, 117x80㎝, 1984년. [사진 하인두 유족]

하인두가 공민권을 되찾은 것은 1976년, 이때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했다. 그 뒤에는 예총부회장인 조경희의 노력이 있었다.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열린 국제조형작가회의에 서세옥과 함께 한국대표로 참가하면서 파리, 빈, 일본을 여행했다. 1978년 한성대학 미술과에 교수로 부임하게 되면서 생활이 안정을 찾았다.

천상병은 1967년의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무기징역형을 받은 서울대 상대 시절의 친구 강빈구에게 100원, 500원 막걸리값으로 2년 동안 받아 썼던 돈이 3만6000원이었다. 이 돈이 공작금으로 부풀렸다. 천상병에게 3만6000원이 많은 돈이기는 하나 당연히 공작금은 아니었다. 고문의 후유증인지 천상병의 삶은 하루에 막걸리 한 병으로 만족하는 디오게네스적인 일탈과 기행으로 일관했다. 천상병은 평생 해외여행은 물론 제주도도 못 가 봤다.

하인두와 천상병은 공권력의 피해자라는 점에서 동지의식이 있었다. 하인두는 천상병을 도왔고, 천상병은 하인두의 건강을 걱정했다. 생활이 힘들었던 건, 취직과 노동을 포기하고 구걸로 일관한 천상병보다 자식을 거느린 하인두가 더했을지도 모른다. 하인두가 하는 비구상 작품은 당시 매매가 거의 없었다.

하인두의 부인 류민자(1942~ )는 한국화 화가다. 하인두가 덕성여중 미술교사로 근무할 때 덕성여고 학생으로 대학 동기이자 동료교사인 안상철에게서 그림을 배우던 제자였다. 1966년에 둘은 우연히 만나 이듬해 결혼을 했다. 1976년에 극적으로 찾아온 해외여행의 기회는 작가 하인두에게는 절호의 해외진출 기회이기도 했다. 이때 류민자는 덕성여고 미술교사였다. 오랜 소망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바그다드에서 며칠간의 회의를 마치고 나면 몇 달이고 파리에 머물며 유럽을 둘러보게 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많은 돈이 필요했다. 류민자는 직장에 사표를 내고 받은 퇴직금으로 남편의 여비를 마련했다. 류민자는 오랫동안 미술학원을 운영하며 집안의 경제를 도맡았다.

하인두의 가족은 홍제동, 방배동을 거쳐 1981년 구리시 아천동으로 이사했다. 마당이 있는 전원주택이었다. 창녕에서 방아 모종을 가져와서 마당에 심었다. 방아는 경남 사람들이 좋아하는 남방계 허브다. 여름이 되면 된장찌개, 피라미 매운탕, 장어국, 부추전 등에 방아가 꼭 들어간다. 남도의 여름을 지배하는 방아는 강렬하고 매력적인 향기를 피운다. 십수 년 전부터 서울에도 방아가 눈에 많이 띈다. 평균기온이 올라 방아의 생장조건이 갖추어진 데다 서울 거주의 경남 출신들이 여기저기 씨를 뿌린 까닭이다. 그 선구자가 하인두 가족이었다.

방아잎의 향은 휘발성이 매우 강하다. 잎을 따서 두면 금방 향이 사라져버린다. 잎을 따자마자 음식에 넣어야 제맛이 난다. 하인두는 방아잎이 들어가는 싸한 맛의 경상도식 부추전을 좋아했다. 부추전에 막걸리를 곁들이면 고향 창녕에 돌아온 듯했다. 아천동 집에는 하인두의 누나도 와서 함께 살았다. 누나는 동생을 위해 가자미식해를 만들었다. 함경도 음식 가자미식해를 피란지 부산에서 배웠던 모양이다. 시누이의 손맛은 올케에게 전해졌다.

술 취하면 ‘봄날은 간다’ 애창곡 불러

하인두는 경남 출신 화가들로 구성된 영토회 회원들과 모임을 가지면 인사동 이모집을 갔다. 술이 거나해지면 미성의 노래가 나왔다. ‘봄날은 간다’가 그의 애창곡이었다.

하인두는 70년대를 지나 80년대에 화단의 중심세력으로 자리 잡게 되는 단색화 계열에 합류하지 않았다. 그건 한국현대미술과 일본현대미술의 연합전선으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키는 일이었다. 대신 하인두는 더 큰 보편성을 찾아 파리를 열심히 다녔다. 그리고 한국적 미감의 정체성을 구현하는 구성과 색감을 찾으려 했다. ‘만다라’ 등 하인두가 일구어낸 개성적인 표현과 보편적인 문법의 작품들은 한국현대미술의 귀한 성과다. 그 성과를 다 펼치고 거두기에는 그의 명이 짧았다. 그의 작품 ‘혼불’처럼, 방아잎 향기처럼 서둘러 사라져 간 휘발성의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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