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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슛 막다 손가락 빠져, 철커덕 끼워넣고 울며 뛴 적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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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1호 27면

[스포츠 오디세이] 레전드 골키퍼 이세연 

1960년대부터 70년대 중반까지 국가대표로 활약한 이세연 선생은 A매치 81경기에 나서 55골만 허용한 짠돌이였다. 어느 방향으로 오는 공이든 막아낸 모습을 형상화하기 위해 다중노출 기법으로 촬영했다. 신인섭 기자

1960년대부터 70년대 중반까지 국가대표로 활약한 이세연 선생은 A매치 81경기에 나서 55골만 허용한 짠돌이였다. 어느 방향으로 오는 공이든 막아낸 모습을 형상화하기 위해 다중노출 기법으로 촬영했다. 신인섭 기자

이세연(76)은 ‘아시아의 호랑이’ 한국축구 대표팀의 골문을 굳게 지킨 듬직한 수문장이었다. 1960~70년대를 풍미한 그에게는 ‘아시아의 폭군’이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이 붙어 있다.

대한축구협회 공식 홈페이지 자료에 따르면 이세연은 국가대표팀 A매치 81경기에 출전해 55실점을 했다. 경기당 0.67의 놀라운 실점률이다.

이세연은 뛰어난 점프력과 순발력을 앞세워 공중볼 처리에 능했고, 무엇보다 상대 공격수를 주눅 들게 하는 터프한 플레이로 악명을 떨쳤다. 동남아 축구팬들은 그를 ‘구두쇠’라고 불렀다.

아시아의 폭군은 희수(喜壽)의 넉넉함을 누리고 있다. 멋지게 나이 든 이세연 선생을 만났다. 그는 축구원로 모임인 한국OB축구회 회장직에 곧 오르게 된다.

인기 좋아 맥주홀 가면 손님이 술 대접

1998년 4월 방한한 축구황제 펠레가 이세연 선생(왼쪽), 김호곤 당시 연세대 감독과 함께 1972년 방한 경기 사진을 보며 담소하고 있다. [중앙포토]

1998년 4월 방한한 축구황제 펠레가 이세연 선생(왼쪽), 김호곤 당시 연세대 감독과 함께 1972년 방한 경기 사진을 보며 담소하고 있다. [중앙포토]

건강은 어떠신지요.
“특별히 아픈 곳은 없습니다. 건강 관리를 위해 따로 운동하는 건 없지만 하루 5000보에서 1만보까지 걸으려고 노력합니다. 골문 지키는 게 제일 힘든 줄 알았는데 나이 들어서 건강 지키는 게 더 힘드네요. 하하.”
효창운동장 안에 있는 OB축구회 사무실에 자주 나오시죠.
“축구라는 운동 자체가 워낙 과격하다 보니 선배들 중에서 몸이 성한 사람이 드물어요. 그분들을 잘 보살피고 모시려고 노력합니다. 그 동안 OB축구회 회장은 선거로 뽑았는데 대한축구협회에서 추대 형식이 좋겠다고 해서 올해 말에 제가 추대를 받으면 OB축구회를 이끌게 됩니다.”
요즘 골키퍼는 ‘11번째 필드 플레이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역할을 요구 받습니다. 골키퍼의 가장 중요한 능력은 뭔가요.
“골키퍼는 수비수가 상대 선수를 마크하는 상황을 항상 주시하게 됩니다. 수비수 위치와 마크 방법을 바로바로 지적하고 지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경험이 부족하면 그런 여유를 갖기 어렵죠. 골키퍼는 수비진 전체를 볼 수 있는 시야와 동료를 리드하는 능력이 가장 중요합니다.”

황해도 장연 출신인 이 선생은 1·4후퇴 때 피난 내려와 힘들게 축구선수의 길을 걸었다. 키 1m76cm로 골키퍼로서 단신인 그는 피나는 훈련으로 신장의 핸디캡을 극복했다.

국가대표 훈련 중인 이세연. [사진 이재형 축구자료수집가]

국가대표 훈련 중인 이세연. [사진 이재형 축구자료수집가]

남다른 훈련법이 있었나요.
“20년 동안 줄넘기를 하루 1시간씩 했어요. 농구 링을 점프해서 잡을 정도로 점프력과 순발력이 좋아졌지요. 한번 시작하면 40~50분간 쉬지 않고 했는데 점프하면서 발 모양을 계속 바꿔서 권태감을 느끼지 않고 힘든 걸 인내할 수 있었죠. 신장과 스피드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지만 순간스피드나 점프력 등은 선수의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여고 체조부에 찾아가서 기계체조도 배웠다면서요?
“예전에는 수비 시스템 상 단독 드리블 나는 경우가 많았어요. 내가 먼저 볼을 낚아 채면 공격수가 고의로 신체적인 타격을 가하곤 했죠. 입술 안팎으로 30바늘 꿰맨 데가 있고, 윗니는 모두 틀니입니다. 고1때 상대한테 차여서 이빨이 모두 날아갔죠. 이런 위험에서 자신과 상대를 보호하기 위해 공중에서 공을 잡은 뒤 텀블링 하는 법을 익힌 겁니다. 집 근처 중앙여고에 무작정 찾아가서 가르쳐 달라고 했죠.”
볼을 펀칭하는 척 하면서 상대 얼굴을 가격하는 등 과격한 면도 많았다고 하던데요.
“그런 질문 받을 때마다 부끄럽죠. 그렇다고 해서 11년간 국가대표 하면서 경고 두 장 받아 퇴장당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후배 김병지·이운재도 같은 질문을 했는데 ‘오랜 경험과 순간적인 눈속임 같은 건데 공개적으로 얘기하기는 곤란하다’고 했어요. 경기장에서는 일반인이 상상하지 못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요즘은 카메라가 워낙 많아 그럴 수 없죠.”
일본의 스트라이커 가마모토 선수가 수난을 많이 당했다면서요.
“가마모토가 실력이 워낙 뛰어나 내가 심리전을 편 적이 있죠. 한번은 같이 점프했다 떨어지면서 내가 밑에 깔렸어요. ‘일본놈한테 깔리다니 말도 안 된다’ 싶어서 팔로 가마모토의 머리를 잡고 되치기를 하면서 목을 확 눌러버렸죠. 가마모토는 나중에 ‘저 선수는 사람 같지도 않아서 같이 인터뷰도 안 한다’고 할 정도였어요. 하하.”

이세연은 경희대 1학년 때 대표팀에 선발됐고 1973년 12월 태국 킹스컵 우승을 마지막으로 태극 장갑을 반납했다. 지도자를 하면서 당시로는 흔하지 않던 부업을 해 꽤 재산을 모았다. 지금 살고 있는 경기도 고양시 창릉지구의 전원주택도 40년 전에 산 것이다. 이 선생은 “남편이 교통사고를 내 생계가 어려워진 집주인이 울면서 돈이 필요하다고 해서 집을 사 줬는데 그게 지금은 많이 올랐어요”라며 웃었다.

부업·부동산 투자로 재테크도 쏠쏠

이세연 하면 변호영이 떠오르는데요. 두 분은 경쟁자였습니까?
“1년 후배인 변호영은 나보다 키는 좀 더 컸어요. 스타일은 정반대였죠. 나는 공격적으로 대시해 상대를 맞이하는 반면  변호영은 골문을 지키는 쪽이었죠. 나 같은 스타일은 부상당할 확률이 높고, 변호영 스타일은 헤딩골을 쉽게 먹는 약점이 있어요. 내가 운이 좋아서 게임을 좀 더 많이 뛰지 않았나 싶네요.”
연예인보다 인기가 좋았다고 하던데요.
“옛날 서울엔 극장식 맥주홀이 많았어요. 코미디언 이주일·남보원 등이 사회를 보면서 ‘저기 10번 테이블에 이세연 골키퍼가 와 있네요’ 하면 사람들이 전부 일어나 박수를 치고 맥주 한 박스씩을 보내요. 그 술값을 고스란히 업주가 챙기니 제가 인기가 많을 수밖에요. 하하.”
당시엔 변변찮은 장갑을 끼고 강슛을 막다가 손가락이 휜 골키퍼가 많았죠.
“저도 손가락이 휘지는 않았지만 맞는 반지가 없을 정도로 손가락이 굵습니다. 강슛을 손바닥이 아닌 손가락으로 막다 보면 이게 빠져서 손목 쪽으로 넘어가 버려요. 경기 중에 장총 장전하는 것처럼 철커덕 하고 다시 맞춰야 하는데 다음날에는 숟가락을 들 수도 없을 정도로 손가락이 퉁퉁 부어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다음날도 시합을 뛰어야 한다며 감독님이 유도장을 겸한 접골원으로 데려갑니다. 손가락을 강제로 뺐다가 다시 끼우는데 눈에 별이 소낙비처럼 내릴 정도로 아파요. 선인장을 망치로 두들겨 묵처럼 만들어 부상 부위에 바르고 자면 부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아요. 그 손에 장갑을 끼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경기를 뛴 적도 있죠.”

한국축구는 이런 선배들의 고통과 인내의 열매를 먹으며 길을 열어 왔다. 그 길은 10회 연속 월드컵 본선, 2022년 카타르로 이어진다.

중앙UCN 유튜브 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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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 중 태어난 아들 이름 “태국서 2승 했으니 이승태로”

이세연 선생은 아들 승태, 딸 지경씨를 뒀다. 두 사람 다 이름에  사연이 있다.

아들은 1970년 태국 원정 중에 태어났다. 배재고 체육교사이던 형님에게 작명을 부탁했는데 “태국에서 2승(아시안게임, 킹스컵)을 했으니 이승태(李勝泰)로 지었다”고 했다. 귀국해서 작명소에 알아봤더니 그 이름이 나쁘지 않다고 했다.

키 1m90cm인 승태씨는 아버지를 이어 골키퍼가 됐다. 연세대- 부산 대우를 거치며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치명적인 부상을 자주 당해 조기 은퇴했다. 영국에서 유학한 뒤 지금은 IFA라는 축구 에이전트 회사 대표로 있다.

딸 지경씨 스토리는 더 재미있다. 이세연은 말레이시아의 중국계 골키퍼 조지경과 형제 같은 우애를 나눴다. 서로 자식을 낳으면 상대방 이름을 붙이자고 약속했다. 조지경은 아들 이름을 조세연이라고 지었다. 이세연도 딸을 낳은 뒤 약속을 지켰다. 그런데 딸은 학교에서 “어쩌다 이지경이 됐냐”는 놀림을 받았다.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사는 지경씨는 최근에 개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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