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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성희의 퍼스펙티브

몰입·중독 유발하는 몰아보기와 속주행시청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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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넷플릭스가 바꾼 드라마 트렌드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다. 전 세계인이 우리 드라마에 열광하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나 ‘달고나’ 놀이를 하고, 세계 곳곳에서 ‘오징어 게임’ 의상으로 핼러윈을 맞을 줄은. 도대체 이 열풍의 끝은 어딜지 짐작조차 안 된다.

3일 현재 41일째 전 세계 1위 자리를 지키며, ‘브리저튼’(2020)을 제치고 넷플릭스 최고 흥행작에 오른 ‘오징어 게임’. 그 성공은 한류 확산의 또 다른 분기점이자 전 세계 문화지형에서도 의미 있는 변화를 보여준다. 2012년 첫 오리지널 제작, 2013년 ‘하우스 오브 카드’의 성공, 2016년 세계 130개국에 진출한 넷플릭스의 성장에도 한 획을 그었다.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만큼 볼 수 있는 OTT 시대는 방송사의 편성 권력을 무력화한 데 이어 TV(드라마) 시청 행위의 의미까지 바꾸고 있다. 전통적으로 영화보다는 문화적으로 하위 장르 취급을 받아온 TV 드라마의 위상도 한껏 끌어올리고 있다.

‘오징어 게임’ 성공 OTT 파워 입증
드라마 제작 수용의 변화 이끌어
소비자 우위에 놓는 OTT 방식 먹혀
개인화 맞춤형 소비 어디까지 갈까

#비 영어권 드라마의 약진

퍼스펙티브

퍼스펙티브

한 편의 TV 드라마가 이처럼 전 세계적으로 동시 흥행하며 신드롬을 일으킨 것은 드문 일이다. ‘스타워즈’나 마블 영화 등 전 세계 동시 개봉하는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종종 보던 풍경이다. 영화보다 동시성이 떨어지는 드라마의 한계를 OTT 플랫폼이 보완했다.

‘오징어 게임’은 그것도 변방의 한국 드라마를 문화 중심에 올려놓았다. 그간 한국 드라마는 2000년대 중반 로맨스물을 필두로 다양한 장르로 확대되며 인기를 끌어왔으나, ‘오징어 게임’의 돌풍에 비할 바는 아니다. 최근 넷플릭스 발표에 따르면 드라마 흥행 톱 10에 ‘오징어 게임’ 외에 ‘뤼팽’(프랑스), ‘종이의 집’(스페인)까지 3편의 비 영어권 드라마가 올라 있다.

넷플릭스는 새로운 지역에 진출할 때마다 그 지역 오리지널 콘텐트를 제작하면서 가입자 수를 늘려왔고 “A급 캐스팅, 풍부한 예산, 끝없는 마케팅 차원을 활용해 오리지널 콘텐트를 반드시 시청해야 할 이벤트인 것으로 브랜드화”(『넷플릭스의 시대』)했다. 아시아에 진출하면서 아시아 배경의 대서사극 ‘마르코 폴로’를, 남미에 진출하면서는 남미 마약왕 이야기 ‘나르코스’ 등을 선보이는 식이다. ‘종이의 집’은 원래 스페인 지상파의 평작 드라마였는데, 넷플릭스가 판권을 사들여 원작을 1~2시즌으로 나눠 공개하면서 초대박이 났다. 시즌 3~5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제작이다. 넷플릭스는 유지태·김윤진 주연으로 ‘종이의 집’ 한국판 리메이크 제작도 확정했다.

넷플릭스를 통한 비영어권 드라마의 약진은, 서구 콘텐트가 한계에 봉착한 가운데 새로운 이야깃거리와 재능을 로컬에서 찾으려는 산업적 움직임과도 맥이 닿아 있다. 넷플릭스는 비영어권 드라마인 ‘3%’(브라질), ‘마르세유’(프랑스)를 제작하면서 ‘하우스 오브 카드’ 때 유명해진 데이터 기반 제작 시스템을 적용하기도 했다. 소비자들의 취향도 자연스레 바뀌고 있다. 국내 드라마 팬들도 ‘종이의 집’, ‘다크’(독일) 등 다양한 국적·언어의 드라마로 취향을 확대하고 있다. 한편 ‘오징어 게임’의 성공으로 3분기 넷플릭스의 전 세계 가입자는 440만명 늘었다.

#드라마의 확대된 서사

넷플릭스 드라마의 가장 큰 특징은 폭식에 비견되는 빈지뷰잉(binge-viewing), 즉 몰아보기다. 개인화된 시청의 극단적 형태로 ‘하우스 오브 카드’ 시즌 1 때 13화를 일괄공개하면서 넷플릭스의 상징이 됐다. 2015년 넷플릭스 조사에 따르면 몰아보기를 하는 사람들은 한 시즌을 4~6일에 독파했으나, 최근에는 시즌 공개일에 시즌 전체를 몰아보는 ‘빈지레이스(binge race)’가 나올 정도로 그 강도가 세지는 추세다.

빈지뷰잉은 단지 편성의 틀을 깨고, 시청패턴만 바꾼 게 아니다. 문화연구자 조이미 베이커는 빈지뷰잉이 드라마의 시청행위 자체를 “서사극적 시청경험(epic viewing)”으로 바꾼다고 지적한다(『넷플릭스의 시대』). 예전 같으면 수개월에 걸쳐 일주일에 한 회씩 기다리며 보던 TV 드라마를, 일시에 독파하는 것은 시청 경험의 밀도와 방대함 면에서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얘기다. 한마디로 10시간짜리 영화를 보는 셈이니, 이야기의 규모나 시청자의 몰입도 커진다. 3일 현재 넷플릭스 드라마 세계 7위에 올라 있는 ‘마이 네임’의 주연배우 박희순은 “영화와 달리 9부작 시리즈로 제작하니 훨씬 깊이 있는 이야기가 가능했다”고 말했다.

더구나 넷플릭스는 빈지뷰잉을 용이하게 하는 여러 장치를 두고 있다. ‘(크레딧 생략하고) 다음 회 이어보기’ ‘전회 요약분 건너뛰기’, ‘오프닝 건너뛰기’를 클릭만 하면 된다. 반면 “몰아보기 기능 때문에, 매주 한 회씩 방송된다면 보지 않을지 모르는 시시한 TV 드라마까지 중독성이 생긴다. 몰아보기는 줄거리가 그다지 짜임새 없어도 관성적으로 보게 한다”(웹진 ‘슬레이트’ 비평가 윌라 파스킨)는 비판적 평가도 있다.

#빈지뷰잉 넘은 맞춤형 혹은 변칙적 시청

그런데 빈지뷰잉으로 시청량이 많아지는 것은 역으로 시청자에게 “봐야 할 콘텐트가 너무 많다”는 부담을 안기기도 한다. 과도한 시청 물량의 압박을 줄이기 위한 변칙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최근 온라인에는 정주행하면 8시간이 걸리는 ‘오징어 게임’ 전편을 10초 건너뛰기나 속주행(고속 재생)으로 5시간 내외에 주파했다는 후기가 많다. 넷플릭스의 영상재생 속도 조절(0.5배속에서 1.5배속까지) 기능을 통해서다. 내용은 궁금한데 시간이 부족한 경우, 혹은 지루하거나 잔인해 취향에 안 맞는 장면을 거르고 싶을 때 부분적으로 건너뛰기나 속주행하는 이용자들이 생겨났다.

지난해 넷플릭스가 속도 조절 기능을 내놓자 영화계는 작품성의 훼손이라며 크게 반발했다. 넷플릭스는 장애인 서비스 측면을 강조했다. “청각장애 사용자는 저속 재생으로 천천히 자막 읽기를, 시각장애 사용자는 오디오 빨리 듣기를 선호했다”는 테스트 결과도 소개했다.

창작자들은 여전히 “배급사가 콘텐트 제공 방식을 함부로 바꿔서는 안 된다”(주드 아패토우 감독)며 강경하지만 콘텐트가 폭주하는 넷플릭스에서는 시간과의 싸움이 중요하고 속도 조절이 하나의 방편으로 등장한 셈이다. 몰입과 중독을 유발하는 몰아보기, 그리고 경제적 시청을 위한 속주행. 아이러니한 풍경이다.

#편성권 이어 편집권도 소비자가

‘오징어 게임’은 비 영어 콘텐트에 대한 서구 관객들의 뿌리 깊은 ‘자막 기피’‘더빙 선호’ 현상에 변화를 가져왔다는 의미도 크다. 흥행 초기부터 미국인들의 SNS에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을 ‘그린 라이트, 레드 라이트(green light, red light)’로 더빙한 버전이 한국어 버전보다 재미없다. 반드시 한국어로 볼 것”을 권유하는 글들이 많이 올라왔다. 외국어 콘텐트, 혹은 외국어에 대한 태도 변화다. 실제 지난해 넷플릭스는 “지난 2년간 미국 내 비 영어 콘텐트 시청은 33% 증가했고, 회원의 80% 이상이 자막을 이용하며, 새로운 언어를 배우기 위해 더빙과 자막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밝힌 바 있다.

자막 시청에 익숙한 한국 관객들 사이에서는 한국 콘텐트마저 한글 자막으로 보는 경우가 생기고 있다. 배경음악에 대사가 묻힌다든지, 딕션(발음)이 좋지 않은 배우의 연기를 보완한다며 만족감을 표한다. 자막을 영상을 간섭하는 요소로 여겼던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다.

일부 젊은 층에서는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배리어프리(barrier free) 서비스를 이색적인 드라마 체험 방식으로 활용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 드라마 커뮤니티에는 대사·상황 등 콘텐트의 모든 소리를 자막으로 제공하는 폐쇄형 자막(청각장애인용), 마치 라디오드라마처럼 지문까지 모든 화면을 음성으로 설명하는 화면해설(시각장애인용) 기능을 통해 드라마를 본 후기들이 종종 올라온다. 역시 콘텐트의 자기 완결성보다 소비자의 요구와 편의를 우위에 놓는 OTT 시대의 변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