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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마, 여긴 안전해” 백희나의 그림책은 위로다 [오밥뉴스]

중앙일보

입력 2021.11.03 06:00

업데이트 2022.03.02 15:31

ㆍ 한 줄 평 : 안전하고 따뜻한 세계를 담아낸 인형과 아기자기한 배경, 소품까지 낱낱이 즐기자! 작은 소품 하나까지 모두 작가의 손 끝에서 나왔다.

ㆍ 함께 읽어보면 좋을 백희나의 다른 책
『장수탕 선녀님』  이상한 엄마가 날개 옷을 벗어두고 가서 목욕탕에 살게 된 게 아닐까?

『이상한 손님』 사실 이상한 엄마는 이상한 손님 천달록의 엄마였다고(이게 작가의 설정이었다).
『나는 개다』  『알사탕』에서 목소리만 나온 동동이 할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다

ㆍ 추천 연령 : 이야기를 이해하는 5세 무렵부터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할 수 있는 8,9세까지.
(※그림책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추천 연령은 서사의 구조나 주제 등을 고려하여 제안하는 참고 사항일 뿐 권장 사항이 아닙니다.)

현관에 신발이 두 켤레 보입니다. 아이 신발과 엄마 신발 같네요. 굴러다니는 슬리퍼 한 짝을 보니 아침에 전쟁을 치른 모양입니다. 아이 입에 밥을 밀어 넣고 옷을 입는 엄마 모습이 그려집니다.

백희나 작가의 『이상한 엄마』표지. 얼굴은 안보이지만, 범상치 않다는 걸 한 눈에 알 수 있다.

백희나 작가의 『이상한 엄마』표지. 얼굴은 안보이지만, 범상치 않다는 걸 한 눈에 알 수 있다.

어수선한 현관에 누군가 서 있습니다. 여자 같긴 한데, 머리 모양이며 옷차림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앞치마를 하고 있는 걸 보니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게다가 제목이 말해주네요. ‘엄마’라고요. 비록 이상할지 모르지만.

엄청난 비가 쏟아진 어느 날, 사무실에 있던 엄마는 전화 한 통을 받습니다. 호호가 열이 심해 조퇴를 했답니다. 엄마는 백방으로 전화를 돌립니다. 그러다 누군가 전화를 받습니다. 여기저기 부탁할 만한 데는 다 전화를 했을 엄마, 지금 이 전화가 누구한테 한 전화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수화기 너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요. ‘엄마인가 보다!’ 싶어 서둘러 아이를 부탁합니다. 그런데 이 여자, 엄마가 아닙니다. 어찌 됐건 엄마의 엄마는 구름을 타고 호호 네로 갑니다.

다 큰 어른도 ‘엄마’가 필요합니다. 아이를 키운다면 더욱이요. 아이는 수시로 아프고, 다치고, 사고를 칩니다. 휴일(응급실로 가야 해, 아가야!)이라고 봐주는 날도 없고, 근무시간(당장 달려가고 싶은데, 갈 수가 없단다!)인 것도 괘념치 않습니다. 유난히 일이 꼬여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날도 밥상을 차려야 하고 빨래를 돌려야 하는 운명을 짊어진 우리 모두에겐 엄마가 필요합니다.

이상한 엄마의 모습은 이상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하지만, 그 엄마가 끓인 달걀국에선 노란 안개가 나와 묘하지만 그래도 이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왠지 마음이 놓입니다.

이상한 엄마의 모습은 이상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하지만, 그 엄마가 끓인 달걀국에선 노란 안개가 나와 묘하지만 그래도 이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왠지 마음이 놓입니다.

오늘은 날 엄마라고 생각하렴.

엄마의 엄마가 아픈 호호를 맞으며 말합니다. 호호의 엄마가 된 엄마의 엄마는 안개를 만들 듯 달걀국을 끓이고, 달걀 프라이를 부쳐 집안을 덥힙니다. 호호가 코가 막혀 답답해하자 계란 흰자를 머랭 쳐 우유를 넣어 구름을 만들어 내고요. 구름이 안개비를 뿌리자 호호의 거친 숨소리가 잦아집니다. 엄마의 엄마는 호호를 가장 크고 푹신한 구름에 눕힙니다. 그리고 엄마가 돌아와 함께 먹을 저녁을 준비하죠. 좀 이상한 저녁이긴 하지만.

뭔가 좀 이상하고 무섭게 생긴 엄마지만, 이 엄마 덕분에 이야기엔 시종일관 온기가 돕니다. 비는 오고, 아이도 아프고, 엄마는 집에 달려갈 수 없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들죠. 이상한 엄마 덕에 만들어진 안전한 세계, 백희나 작가의 여러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로 이것입니다.

이상한 엄마가 만들어 준 크고 폭신한 구름에 호호와 엄마가 함께 누워 깊은 잠을 청합니다. 이보다 안전한 세계가 어디 있을까요!

이상한 엄마가 만들어 준 크고 폭신한 구름에 호호와 엄마가 함께 누워 깊은 잠을 청합니다. 이보다 안전한 세계가 어디 있을까요!

『이상한 손님』 의 이상한 손님 천달록은 타고 온 구름이 사라져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헤매고 있지만 어린 남매가 사는 집에서 빵도 먹고, ‘아스킹(아이스크림)’도 먹고, 솜사탕도 먹습니다. 방귀도 뀌고, 집 안에 비에다 눈까지 뿌려 아수라장을 만든 것도 모자라 잠투정마저 부리지만 어린 남매는 달록이를 어르고 달랩니다.

『장수탕 선녀님』은 또 어떤가요? 엄마 손에 끌려 4000원(미취학 아동은 3500원!)짜리 장수탕에 온 덕지는 냉탕에서 “나는 날개옷을 잃어버린 선녀”라고 주장하는 좀 많이 이상해 보이는 할머니를 만나지만, 아무 일(그러니까 사고)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은커녕 냉탕에서 이렇게 재밌게 놀아본 적이 없습니다. 낯선 어른은 조심해야 하는 건데 말이죠.

자기가 선녀라고 주장하는 할머니와 냉탕에서 노는 덕지. 이렇게 재밌게 놀아본 적이 없다.

자기가 선녀라고 주장하는 할머니와 냉탕에서 노는 덕지. 이렇게 재밌게 놀아본 적이 없다.

『나는 개다』의 개 구슬이는 근본 없는 개에요. 엄마는 슈퍼 집 개인데, 아빠는 모릅니다. 그러면 좀 어떤가요? 아빠와 할머니, 동동이에겐 둘도 없는 가족인 걸요. 구슬이가 침대 위에 똥을 누고 베란다로 쫓겨나면 동동이가 이불을 싸 들고 나와 함께 자주고 말이죠. 구슬이에게 이보다 안전한 세계가 어디 있을까요?

백희나 작가는 “안전하고, 행복하고, 모든 일이 순리대로 이루어지는 꿈 같은 세상에서 아이로 살고 싶어 그림책 작가가 됐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어른의 세계는 전혀 그렇지 않잖아요. 그래서 그의 그림과 이야기는 읽어주는 양육자에게도 큰 위로를 줍니다. 그곳엔 늘 ‘이상한 엄마’가 있으니까요.

“양육자건 아이건 하루 동안 무슨 일이 있었든 간에 잠자리에 들기 전 함께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즐거웠으면 좋겠다”는 백희나 작가의 바람은 오늘도 전국의, 아니 전 세계 가정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겁니다. 지난해 백희나 작가가 아동문학계 노벨상이라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을 수상한 것도 그래서겠죠. 한 사람을 위로하고 다시 살아가게 하는 것, 그것이 문학의 존재 이유니까요.

추신 : 저희집 8세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백희나 작가의 어떤 그림책을 리뷰하면 좋을지요. 아이가 고른 책은『장수탕 선녀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엄마』가 주인공이 된 건, 바로 저 때문입니다. “어린이야, 엄마가 네가 고른 책으로 기사 안 써서 미안해! 이 기사는 엄마 기사니까 이해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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