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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염재호 칼럼

민주주의의 위기와 분열의 정치가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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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고 있다. 정치지도자들이 연예인들처럼 팬덤 현상에 의지해 분열의 정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는 8년 집권으로 일본 헌정사상 최장수 총리가 되었지만 아베노믹스, 평화헌법개정, 코로나 대응 등 주요 정책은 실패했고 뚜렷한 업적도 없다는 성적표를 받았다. 최악의 한·일, 중·일 관계뿐 아니라 보여주기식 외교도 국내용 쇼에 불과했다. 집권 내내 30%가 넘는 철벽 지지를 내세웠지만 국민 분열로 3연임 정권연장에 성공했다는 평가다.

일본의 대표 지식인 강상중 교수와 우치다 타츠루(內田樹) 교수는 신간 『신세계질서와 일본의 미래』에서 아베 정치를 이렇게 분석한다. 정치지도자가 국민과 소통하며 합의 형성을 이끌어내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국민을 적군과 아군으로 나누어 싸움시키면 통치 비용이 적게 든다. 우리 편 이야기만 듣고 그들의 이해만 배려하고, 반대편을 정책과정이나 공적 이익배분에서 완전히 배제시켜 타협 없이 밀어 붙이면 정책 결정은 간단히 이루어진다. 여당 지지층은 야당을 무시하는 것을 보고 자신들이 지지한 정부가 강한 정부라는 일체감과 승리감에 도취되어 더욱 강력하게 여당을 지지하게 된다. 반면에 반대 집단은 정치에서 멀어진다. 이것이 아베 장기집권의 승리 방정식이었다. 하지만 이는 자민당과 지지자들만을 위한 정치이지, 일본의 미래를 위한 정치는 아니었다고 우치다 교수는 신랄하게 비판한다.

팬덤 현상에 의지한 분열의 정치
정치적 부족주의와 민주주의 위기
비전과 품격의 라스트 캠페인 기대
선출직 평가 시스템도 마련해야

예일대 법대 에이미 추아(Amy Chua) 교수는 『정치적 부족주의』에서 집단 본능이 어떻게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가를 묻고 있다. 우리 편과 상대편을 나누어 분열시키면 위기의식을 느낀 집단은 자기들끼리 더욱 똘똘 뭉치고, 폐쇄적이고, 방어적이 되어 적대의식으로 정치를 하게 된다. 미리 잘 짜인 각본에 의해 거짓으로 경기를 진행하는 천박하고 폭력적인 프로레슬링을 보고 마치 자기편이 이기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관중들처럼 유권자들을 현혹시키는 ‘프로레슬링 관람의 현상학’이 트럼프의 정치 전략과 지지자들의 정치 행태라고 분석했다. 그들은 자신의 이해에 반하면 가짜 뉴스라고 비난한다. 상대를 맹렬하게 공격해서 지지자들이 희열을 느끼게 만든다. 이러한 정치적 부족주의의 특징은 지배집단이 되면 자신의 권력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고 추아 교수는 경계한다. 트럼프 지지자들의 선거부정 주장이나 의회 난입, 그리고 아직도 트럼프 전 대통령을 차기 공화당 대선 후보로 강력히 추대하는 현상은 이를 잘 보여준다.

민주주의는 타협과 양보를 먹고 자란다. 아무리 다수결이라도 상대방이 수긍할 만한 합리적 논의 과정을 생략한 채 51%가 49%의 의사를 일방적으로 무시하면 민주주의라고 할 수 없다.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 시카고대 교수가 설파한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는 울림이 있다. “민주주의란 존경과 관심을 기초로 세워지는 것이며, 존경과 관심은 다른 사람들을 단순히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인격체로서 인식할 줄 아는 능력에 기초해서 세워지는 것이다.”

식민지 독립 200여 년 만에 세계 최강국이 된 미국은 1968년에 멈추어 섰다고 한다. 대통령 선거가 있던 그 해 도덕성과 품격의 희망을 믿었던 로버트 케네디 민주당 대통령후보가 암살된 사건 때문이다. 흑인 인권탄압과 베트남 참전으로 미국의 가치가 크게 흔들리는 그 때에 지지자들을 스스로 부끄럽게 만드는 바른 소리를 케네디는 외쳤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위험한 전략이었지만 로버트 케네디는 3개월간의 마지막 캠페인에서 이런 진정성의 용기를 보여 주었다.

로버트 케네디가 인디애나대학에서 행한 감동적 연설을 서스턴 클라크(Thurston Clarke)는 『라스트 캠페인』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 “세상에서 진정으로 건설적인 힘은 폭탄이 아니라 창의적인 아이디어, 따뜻한 연민, 너그러운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것들은 홍보 전문가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다른 사람을 적대하는 오만함이 없고 스스로 우월하다고 착각하지 않는 사람들, 자기 일에서 품위와 인간의 존엄을 추구하는 사람들, 우리가 만들어낸 사회의 현실에 단단하게 뿌리를 내린 이상을 지닌 사람들이 가진 본성입니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시계가 멈춘 것 같은 오늘. 내년 대선의 ‘라스트 캠페인’에서 우리 후보들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어떤 가치와 비전을 갖고 우리에게 다가올까. 적폐청산의 복수심, 국민을 현혹하는 포퓰리즘, 도덕과 품격의 무시, 비방과 폭로의 거짓 뉴스, 상대편을 몰살시키려는 정치적 부족주의로 아수라장 이전투구가 되는 것은 아닐까. 이제 지역, 계층, 성별, 세대 간 갈등을 조장하며 득표 계산만 하는 분열의 지도자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비전과 민주주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실천할 수 있는 품격 있는 정치 지도자가 나오길 바란다. 그게 안 되면 지금부터라도 우리 민주주의의 미래를 위해 선출직 정치가들에 대한 체계적 평가 시스템을 차분히 마련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