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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윤병세의 한반도평화워치

한국도 북한·세계 인권에 보편성 차원으로 접근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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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인권 외교에 닥친 3중 파고

유엔총회 산하 제3위원회(인권 담당)가 2019년 11월 미국 뉴욕 유엔 본부에서 북한의 인권 침해를 비판하고 즉각적인 개선을 촉구하는 북한 인권결의안을 통과시키고 있다. [연합뉴스]

유엔총회 산하 제3위원회(인권 담당)가 2019년 11월 미국 뉴욕 유엔 본부에서 북한의 인권 침해를 비판하고 즉각적인 개선을 촉구하는 북한 인권결의안을 통과시키고 있다. [연합뉴스]

우리의 인권 외교 전선에 3중 파고가 몰려오고 있다. 인권 선진국을 지향해 나가던 한국 외교에 경고등이 켜졌다.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정부의 소극적 태도, 보편적 인권 기준과 상충하는 일부 국내 조치와 인권 정책, 미·중 전략 경쟁 과정에서 재부상한 인권 충돌로 인한 파고다. 인권 외교가 주 무대로 귀환하면서 한국 외교가 침묵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진실의 순간이 다가온다. 더 큰 문제는 위기 불감증과 이를 외면하려는 타조 증후군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북한 인권 상황은 유엔 조치로 이어져 유엔인권이사회는 2003년부터 올해까지 19년 연속으로 북한 인권 결의를 채택했다. 유엔 총회도 매년 북한 인권 결의를 채택하고 있다.

유엔은 심각한 북한 인권 침해에 19년 연속 인권 결의
한국은 소극 대응하다 국제사회 우려와 비판 대상 돼
유엔 등 국제 인권 협의 체제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보수·진보 넘는 대한민국의 일관된 인권 정책 제시해야

북한 인권 상황에 대한 유엔의 관여는 2013년부터 2017년 기간 중 획기적 진전을 이뤘다.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는 심층적 조사를 통해 2014년 2월 북한 인권 상황을 “조직적이고 광범위하며 심각한 인권 침해”로 규정하고 책임 규명을 건의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후속 조치로서 유엔 안보리는 최초로 북한 인권 문제를 의제로 채택해 2014~2017년 공식 논의했다. 안보리가 특정 국가의 인권 문제를 다룬 것은 북한이 3번째다. 북한의 인권 침해 상황이 국제 평화와 안보에 영향을 줄 정도로 심각하다고 본 것이다.

우리의 경우 북한인권결의안에 대해 보수 정부는 국제적 추세에 따라 인권의 보편성을 중시해 공동제안국에도 가담하고 표결에도 찬성하는 적극적 태도를 보여 왔다. 반면 진보 정부는 남북 관계의 특수성을 강조해 공동제안국에 거의 불참하거나 컨센서스 아닌 표결에 대부분 기권했는데 현 정부도 마찬가지다.

흔들리는 인권 모범국의 위상

한국은 유엔 인권이사회 창설 이래 현재까지 5회째 인권이사국을 역임하고 2016년에는 이사회 의장까지 맡았다. 2015년 이후 유엔 북한인권사무소도 서울에 설치돼 있다. 과거 미얀마 인권 상황에 대해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인권결의안에 공동제안국으로 참여했고 최근까지 미얀마 인권 특별보고관직도 수행했다. 그런 한국이 근년 들어 유엔·미국·유럽연합(EU)과 국제 인권 단체 등 국제사회의 우려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유엔 인권최고대표는 2017년 5월 이후 지난 9월까지 한국 정부에 대해 총 23건의 서한을 발송했고 작년에만 7회에 걸쳐 문제를 제기했다고 한다.

올해 4월에는 미국 하원의 초당적 랜토스 인권위가 북한이 아닌 한국 인권을 대상으로 한 청문회를 개최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일어났다. 2020년 12월 통과된 대북전단살포금지법 때문이다. 이 법이 국제 인권 규범은 물론이고 미국의 북한인권법과 충돌한다고 보는 것이다.

현안인 언론중재법 개정안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응은 상상을 초월한다. 국제 인권·언론단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유엔 인권최고대표 사무소가 의사 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을 통해 적법성·비례성·필요성 및 시기적 측면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여러 형태로 강력하게 지적해 왔다. 그대로 추진 시에는 한국 인권 외교의 치명타가 될 것이다.

2019년 11월 탈북 북한 선원 2명의 전격적인 강제 북송은 헌법, 국제인권규범, 적법 절차 등 측면에서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중국 정부가 탈북자들을 북송하려 할 때 우리가 중국 측에 늘 원용한 ‘자유의사에 반하는 강제 송환 금지’라는 법 원칙을 우리 스스로 무시한 사례는 무엇보다 심각하다.

작년 9월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의 진상 규명과 공유는 정부의 자국민 보호 의무의 기본이다. 무고한 민간인에 대한 북한의 무력 사용은 책임을 물어야 한다. 유엔 인권이사회가 올해 3월 북한인권결의에서 북한이 국경 인근에서 과도한 무력행사를 삼가도록 촉구한 것도 같은 취지다.

미·중 전략 경쟁으로 재부상한 인권

지난 1월 출범한 바이든 행정부는 인권을 외교의 중심에 두는 가치외교의 귀환을 선언했다. 미국은 5월 한·미, 6월 미·EU, G7 정상회담과 10월 말 G20 정상회담을 포함해 지난 9개월간 주요 우방국들과의 회담과 공동성명에서 인권을 빠짐없이 강조해 왔다. 다음 달 초에는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주최한다. 내년부터 유엔인권이사회에 복귀하면 인권이사회는 이미 진입한 중국·러시아·쿠바 등과 미국을 위시한 서방국 간의 각축장이 될 것이다. 이미 미국은 아프가니스탄·미얀마·중국 등을 우선 관심국으로 예시했다. 연례 인권 결의 대상국인 북한도 포함될 것이다.

특히 중국 인권 문제와 관련해 미국과 서방국들은 신장위구르 문제와 홍콩 보안법에 대해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 2월 시진핑 주석과의 통화에서 이 문제를 제기한 이래 거의 모든 주요 계기를 활용하고 있다. 지난 5월 한·미 정상 공동성명의 인권 협력 조항도 미국의 입장에서는 중국·북한 인권 등을 염두에 두고 한국의 동참을 기대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중국도 세 규합을 위해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민주화 이래 인권 선진국들과 보조를 맞춰온 한국이 이제 말이 아닌 행동으로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한국 인권 외교는 어디로

어떻게 해야 할까? 역설적이지만 답은 먼 데 있지 않다. 첫째, 원칙과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보편적 인권에 관한 세계인권선언과 국제인권규범에 따른 의무를 철저히 준수하는 것이다. 둘째, 우리가 국내외에 스스로 밝힌 인권 공약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역대 정부가 민주주의와 인권의 편에서 천명한 약속과 한·미 정상 회담 공동성명 등 국제사회에서 엄숙히 약속한 것을 이행하는 것이다. 셋째, 인권은 평화나 안보의 하부 개념이나 후순위가 아니라 같이 가야 한다. 인도적 지원도 인권 침해를 방치한 채 혼자 가는 게 아니라 투명성과 원칙에 따라 같이 가는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 첫째, 북한 인권 문제를 국제무대에서 적극적으로 제기해야 한다. 우리 국민의 생명과 인권 침해에는 확실하게 대응해야 한다. 북한 인권법이 규정한 북한과의 인권 대화도 추구해 나갈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 독일 통일 전까지 서독이 취한 동독 인권 정책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보수·진보 정당 간 시각차를 극복하면서 동서독 기본조약에 인권 보호를 명시적으로 규정했고, 헬싱키 의정서 프로세스를 활용해 동독의 인권 침해를 국제 이슈화하는 정책을 견지했다. 화해·협력 정책 추진 중에도 동독 인권 문제를 꾸준히 제기하고 동시에 정치범 석방 거래와 같은 실사구시적 접근과 상호주의에 입각한 인도 지원 사업을 추진해 동독 주민의 실질적 인권 개선을 도모했다.

북한도 2014년 국제사회가 참혹한 북한 인권 상황과 책임을 규명하기 시작하자 유엔 북한인권특별보고관을 북한에 초청하고 국제사회와 인권 대화를 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바 있다. 그만큼 국제사회의 관여를 민감하게 보고 있다는 증거다.

2017년 6월과 2021년 5월 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의 북한 인권 관련 조항은 이전 보수 정부들이 미국 정부와 여러 계기에 합의한 내용 못지않게 강력하다. 2017년 7월 독일 쾨르버재단 연설에서도 북한 주민의 열악한 인권 상황에 대해 분명한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했다. 곧 다가올 유엔 총회 위원회와 본회의, 내년 3월 인권이사회는 이렇게 천명한 입장을 행동으로 옮길 마지막 기회다.

둘째, 역내 권위주의 국가 및 글로벌 인권 문제에 대해 인권 선진국들과 마찬가지로 보편적 인권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인권이 유일한 기준이 되기는 어렵지만, 다자 무대에서라도 인권 중시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그래야 북한이나 미얀마 인권 문제를 제기하는 것과 부합하고 이중 기준의 모순을 피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간의 약속과 합의는 공허해질 것이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의지만 있으면 방법과 선택지는 찾을 수 있다. 양자 관계에서의 부담을 공유하면서도 원칙과 명분을 중시하는 유사 입장국들과 보조를 같이하다 보면 나름대로 지혜가 축적될 것이다.

셋째, 인권에 대한 우리의 문제의식과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 유엔과 우방국들, 국제 인권단체들의 비판 여론을 경청하고 설득력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인권 침해로 인식될 수 있는 정책적 조치나 법안이 추진되기 전 국제 인권 공동체의 반응과 국익에 미칠 영향을 숙고해야 한다. 국군 포로, 납북자, 탈북민을 포함한 국민 보호에서는 당사자로서 집요하게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국가 차원의 추진 체제도 정비해야 한다. 일본의 납치 문제에 대한 정상 차원의 해결 의지, 미국의 웜비어법 제정 등도 참고 사례다.

특정 정권 아닌 한국 인권 정책

3중 파고 중 어느 하나 만만한 것은 없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을 거꾸로 되돌려서는 안 된다. 우리가 자초한 국내적 파고는 결자해지해야 한다.

미·중 전략 경쟁, 세계적인 민주주의와 인권의 후퇴 추세 속에서 인권 모범국을 지향하는 한국이 갈 길은 분명하다. 권위주의 편에 서도 안 되고 회색지대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도 오는 12월 초 미국 주최 민주주의정상회의 등 국제 인권 관련 협의체에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가치 동맹의 파트너로서 책임을 분담할 필요가 있다. 보수와 진보를 넘어 대한민국의 일관된 인권 정책이 제시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