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백순의 퍼스펙티브

미국 도와야 분쟁 줄고 호주가 안전해진다고 판단했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2면

호주는 왜 중국에 맞섰나

이백순의 퍼스펙티브

이백순의 퍼스펙티브

미국·영국·호주 3국 정상들은 지난 9월 화상 정상회의를 개최하고 회의 말미에 3국 군사동맹인 오커스(AUKUS)를 출범한다고 발표했다. 이 발표는 중국은 물론 프랑스를 비롯한 많은 서방국가도 놀라게 했다. 그 정도로 방식은 전격적이었고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오커스 출범은 앞으로 세계 질서와 동맹 관계의 변화가 더 가속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한 질서 변화는 대한민국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이기에 담긴 의미를 곱씹어 보고 전략과 진로 설정에 두루 참고해야 할 것이다.

오커스 동맹이 어느 국가를 겨냥하는지는 불문가지다. 호주가 왜 이런 전격적인 행보를 했는지 알기 위해 시계를 좀 되돌려 볼 필요가 있다. 호주와 중국의 갈등은 최근 들어 더 격화하고 있지만, 그 전조는 2017년 말 호주가 ‘외국 간섭 금지법’을 입법할 때 시작됐다. 이 법은 호주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차단할 목적이었다.

중국 경제 보복은 동맹 유지 비용
미·영과 3국 군사동맹 전격 체결
중국, 결국 호주산 석탄 수입 재개
한국, 냉혹한 국제현실 직시해야

2018년 5월 중국 화웨이 5G 통신 장비를 호주 정부가 자국 네트워크에 사용하지 못하도록 결정하면서 양국 관계는 심하게 틀어졌다. 연이어 중국계 기업이 호주에서 추진 중이던 10여 개 인프라 관련 프로젝트와 기타 투자 사업을 호주 정부가 국가 안보를 이유로 사업승인을 취소하면서 양국 관계는 더욱 경색됐다.

지난해 코로나19가 발발하자 스콧 모리슨 총리가 이끄는 호주 정부는 발원지 조사에 대한 독립조사위원회를 구성하자는 제안을 국제사회에 공식 제기했다. 이런 호주 정부의 조치에 대해서 호주 국내에서도 너무 많이 나간 것 아니냐는 이견도 존재했다. 그러나 호주 정부는 코로나가 전 세계에 끼치는 악영향을 고려할 때 발원지를 철저히 조사해 재발을 방지하는 것은 국제사회의 의무라고 주장했다.

호주가 이처럼 최근 미·중의 패권 경쟁 속에서 미국으로 기우는 선택을 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호주의 전략적 사고 속에 뿌리 박힌 ‘동맹의 방기(Fear of Abandonment)’ 두려움을 알아야 한다. 호주는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영국을 가장 믿을만한 동맹국으로 믿고 영국과 결속을 굳건히 해왔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 대영제국이 쇠락하면서 영국으로부터 버림받을 가능성, 즉 방기의 위험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래서 2차 대전 이후 최강국으로 부상한 미국을 선택하고 동맹국으로 삼았다.

국제 정세가 대격변을 겪는 이 시점에 호주의 고민은 다시 시작되고 있다. 호주는 미국의 국력이 쇠락하고 있어 이전처럼 자국의 안보를 전적으로 미국에 맡길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래서 새로 부상하는 중국과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는지를 한동안 고민했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중국의 행보를 지켜본 호주는 전략적 결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 가는 길이 자유민주국가인 호주의 정체성과 너무 동떨어지기 때문에 2014년 맺은 중국과의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를 더 유지할 수 없다는 결론에 호주는 도달했다.

중국과 거리를 둔다 해도 쇠락하는 미국과는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이냐는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전략적 숙고 끝에 호주는 쇠락하는 미국 혼자서 동맹국의 안전보장을 감당하기 힘들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미국을 도와서 함께 국제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자국에 유리하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미·중의 패권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미국을 도우면 호주가 미·중 분쟁에 연루될 위험성이 있다는 점도 잘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미국 혼자 중국을 감당하도록 맡겨두는 것보다는 동맹국들이 미국을 도울 때 분쟁이 발생할 확률이 줄어들어 자국 국익에 부합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변화하는 중국을 보면서 호주는 미국을 도우면 중국으로부터 보복당할 가능성도 예견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의 경제 보복도 호주의 주권을 수호하고 동맹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으로 간주하기에 이를 두고 호주 내부에서 논란도 거의 없는 편이다. 호주는 동맹관계에 무임승차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동맹에 수반되는 비용을 감당하려 한다. 그것이 동맹으로부터 방기되는 것보다는 낫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호주는 ‘동맹의 방기’와 ‘동맹의 연루(Entrapment)’의 위험성 사이에서 전략적 계산을 면밀하게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호주는 도널드 트럼프 정부 시절 미국이 자국 우선주의로 직진할 때는 이를 비판도 하고 아울러 대비도 했다. 호주는 미국이나 중국 등 강대국이 자국 국익을 위해 일방적으로 국제규범을 무시하는 행위를 할 때 이를 비판하고 ‘규범에 입각한 국제질서’를 지켜나가기 위해 목소리를 높여왔다. 지금의 국제 질서에서 평화와 번영을 누려온 호주는 현상을 변경하려는 세력의 의도를 차단하는 것이 국익에 부합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호주는 이런 국제 질서 유지 노력을 혼자 해나가는 것보다 다른 중견국들과 연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봤다. 그래서 힘을 합칠 대상국으로 일본·인도·한국·인도네시아 4개국을 2017년 외교백서에 적시했다. 그 이후 한국과의 협력이 기대에 못 미쳐서 그런지 호주는 베트남을 전략적 협력대상국으로 추가하고 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호주와 베트남은 2013년 시진핑 국가주석 취임 이후 중국이 공세적 대외정책을 펴자 경계심을 높이고 중국에서 오는 위험을 줄이기 위해 ‘역 균형(Counter-balancing)정책’으로 대응하고 있다.

호주는 선진국 중에서 중국에 대한 경제의존도가 제일 높다. 이 때문에 중국은 서방국 중에서 호주를 제일 약한 고리로 여기고 한동안 다각도로 공을 들였다. 그러나 최근 호주의 반중국 외교 행보는 중국의 눈에는 가시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었고, 호주에 대한 중국의 경제 보복은 예견된 수순이었다. 지난해부터 중국은 석탄·쇠고기·와인 등의 수입을 제한해 관련 분야 호주 산업계가 큰 피해를 보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국제 철광석 가격이 급등함에 따라 호주의 대중국 수출 총액은 오히려 더 늘어났다. 게다가 석탄 부족으로 인해 심각한 전력난을 겪고 있는 중국은 최근 호주산 석탄 수입 재개를 결국 허용했다. 중국이 자기 발등을 스스로 찍은 모양새가 됐다. 다행히 호주는 중국이 필요로 하는 원자재를 보유하고 있기에 중국의 압력을 버틸 여유가 더 있었던 셈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호주는 최근 미·영과 오커스 동맹을 체결함으로써 중국에 다시 한번 일격을 가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팍스 아메리카나 시절에 미국은 ‘바퀴 축과 바큇살 체제(Hub & Spokes System)’의 양자 동맹을 구축해왔는데, 오커스 동맹은 과거엔 잘 볼 수 없던 3국 동맹 체제여서 눈길을 끈다. 외교사를 되돌아보면 3국 동맹이 등장할 시점에는 국제정세가 불안하고 전쟁의 그림자가 어른거렸기에 그런 측면에서 우려스럽다. 그리고 이 동맹에 참여한 3국은 모두 앵글로 색슨 국가들이며 해양국가들이다. 정체성이 거의 같은 세 나라가 뭉친다는 것은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나라끼리만 손을 잡는 흐름이 우세할 것임을 예고한다.

오커스 동맹이 체결되는 과정에서 프랑스 외교부 장관은 “3국이 등 뒤에 비수를 꽂았다”는 표현을 동원할 정도로 협상이 비밀리에 진행됐다. 과거 국제정세가 출렁일 때 이러한 비밀외교가 횡행했는데, 오커스를 계기로 향후 이런 비밀외교가 더 빈번할 수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또한 국가 관계에 규범과 신의가 중요하지 않게 될 수도 있는 냉혹한 현실주의 시대가 다가온다는 사실을 이 동맹의 출현은 시사하고 있다.

오커스 동맹 출범으로 프랑스는 약 74조 원에 달하는 잠수함 사업에서 손을 떼야 할 상황이다. 호주와의 계약을 믿고 있던 프랑스는 큰 낭패를 본 셈이다. 미국도 핵 비확산을 불가침의 원칙처럼 내세우다 자국 이익 앞에서 가볍게 내버렸다. 국익을 위해서는 새로운 동맹에 과감히 참여하고 기존 우호국과의 신의도 저버리는 냉엄한 현실주의 노선을 호주가 택한 셈이다.

“정치의 어려움은 자신이 보고 싶지 않은 곳을 끈질기게 바라보는 데 있다”고 프랑스 정치사상가 피에르 마낭트(Pierre Manent)가 설파했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그대로 이뤄지길 기대하는 것은 국제정세의 대변환기에는 순진하다 못해 위험하다. 현실을 직시하고 다른 국가들의 행보를 눈여겨봐야 우리의 갈 길을 개척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