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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키호택과 걷는 산티아고길 80일]신문 1면에 대문짝만하게…벼락 출세 3총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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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키호택과 걷는 산티아고길 80일] 11화

그냥 걷기만 했어요. 그런데 신문에 이렇게 났어요.

그냥 걷기만 했어요. 그런데 신문에 이렇게 났어요.

오늘 목표는 이라체까지다. 19km 거리인데 하루 평균 15km를 걷는 우리에게는 다소 먼 거리다. 이라체 가는 길은 와인으로 유명한 지역이라 들판에는 다양한 품종의 포도나무가 심어져있다. 포도 맛을 보고 싶은 유혹도 있었지만 순례자의 품위를 생각해 꾹 참고 걸었다.
“동훈아. 우리 저 마을까지 질러서 가 볼까?”
순례길과 지름길이 한눈에 파악되다 보니 꾀가 났다. 화살표가 있는 길은 벌판과 산을 돌아 마을로 연결되어 있었다.
“우리의 목표는 산티아고 성지지 화살표를 따라가는 게 아니잖아.”
“맞아요. 아부지. 모든 길은 산티아고로 통하잖아요?”
얘는 이런 건 나하고 뜻이 맞는다니까.
우리는 순례길을 벗어나 포도나무 무성한 들판으로 향했다. 일탈의 쾌감이 살짝 느껴질 즈음 길옆에 덩그러니 서있는 포도나무 한그루가 보였다.
“와! 포도다.”
앵두만한 포도가 잔뜩 달려 있었다. 주위에 있는 밀밭이 전에 포도밭이었을 것으로 생각됐다.
“전에 포도를 키우던 분이 이 나무 하나를 남겨 놓은 것 같아. 우리처럼 길가는 사람들에게 주는 선물일 거야.”
한 송이를 따서 입에 넣으니 꿀맛이다. 동훈이 입에도 한 송이를 투척했다. 갈증이 날아갔다. 몇 송이를 더 따 당나귀 등에 얹었다.
“이 정도만 가지고 가자.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 몫으로 남겨두고.”

이라체 지역은 온통 포도밭이다.

이라체 지역은 온통 포도밭이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포도송이. 침이 꼴깍꼴깍 넘어가지만 함부로 손댈 수야. 한국 신사 체면이 있지.

통통하게 살이 오른 포도송이. 침이 꼴깍꼴깍 넘어가지만 함부로 손댈 수야. 한국 신사 체면이 있지.

덩굴 아래는 떨어진 포도송이가 수북.

덩굴 아래는 떨어진 포도송이가 수북.

와 달다 달아. 이거 자연이 만든 건포도네.

와 달다 달아. 이거 자연이 만든 건포도네.

아부지, 포도가 진짜 달긴 다네요.

아부지, 포도가 진짜 달긴 다네요.

욕심 없는 순례자가 된 기분이었다. 다시 길을 가는데 포도 따느라 바쁜 주민들이 보였다. 멀리서 당나귀가 나타나자 일을 멈추고 포도밭에서 뛰어나왔다.
“부엔 까미노. 부로!”
그리고는 포도를 잔뜩 들고와 호택이에게 먹이려고 했다. 사람이나 당나귀나 단맛은 즐겁다. 하지만 포도밭을 지날 때 포도를 먹지 못하도록 하라는 아리츠의 충고가 생각났다. 포도밭 주인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는 의미이겠지만 사과를 먹고 죽다가 살아난 호택이 생각에 사양했다.
“안돼요. 당나귀가 먹으면 탈이 납니다.”
이 말을 들은 농부가 호택이 이빨을 까 보더니 포도를 먹이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충치가 있었나?
한바탕 소동이었다. 노란 화살표를 조금 벗어났을 뿐인데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길 가다가 목마르면 마음껏 따 먹으세요.”
농부들 인사를 받으며 다시 길을 걸었다. 우리에게 이런 호의를 베푸는 이유가 무얼까? 내가 읽은 까미노 순례여행기 어느 곳에서도 이런 일은 없으니 말이다.
〈비야투에르따〉라는 마을로 들어섰다. 부족한 물품을 구하려 슈퍼를 찾았다. 슈퍼는 마을 중심에 있어서 호택이를 데리고 성당으로 향했다. 성당 뜰에 노인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를 보고 그들이 다가왔다.
“나 다당신들 아아알아요. 시신문에서 바봤어요.”
말을 몹시 더듬었지만 영어로 말씀을 하셨다. 영어가 서툰 나는 이런 말이 귀에 더 잘 들어온다.
“아, 며칠 전에 바스크 신문에 나왔어요.”
“아아닙니다. 오오늘 신문에 나왔어요. 바바스크 시신문이 아니라 나바라 신문에 나났어요.”
나바라는 바스크를 포함하는 광역지역을 의미한다. 알게 모르게 우리 이야기가 퍼지고 있나보다.
“다당신들 유명한 사사람들입니다.”

당신들 엄청 유명해요. 신문에서 봤어요. 이라체 성당에서 만난 노인들. 표정으로 보아 신부님 아닐까 했다.

당신들 엄청 유명해요. 신문에서 봤어요. 이라체 성당에서 만난 노인들. 표정으로 보아 신부님 아닐까 했다.

호택아 반가웠어. 남은 길 재미있게 걸어가라.

호택아 반가웠어. 남은 길 재미있게 걸어가라.

쉬었으니 또 걸어볼까.

쉬었으니 또 걸어볼까.

마을을 지나니 다시 벌판이 이어졌다. 울타리 없는 말 농장에서 호택이는 배를 불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꼭지에서 포도주가 나온다는 이라체 마을에 들어섰다. 지나가다 과일이 풍성한 슈퍼에 들렀다. 우리를 본 여주인이 화들짝 놀라며 ‘부로’를 외쳤다. 그녀는 신문을 꺼내 들더니 1면에 실린 기사를 보여주었다. 여기는 슈퍼에서도 신문을 판다. 알아듣지 못할 말로 일장연설을 하기에 1.5유로를 주고 신문을 샀다. 가게를 나서는데 아주머니가 황급히 뒤따라 나와 들고 온 비닐봉지에 신문을 넣어 주셨다. 구겨지거나 비에 젖을까 걱정해서다.
잠시 뒤 로터리가 나왔다. 풀이 무성해서 호택이가 점심 먹기에 좋아 보였다. 짐을 내리고 우리도 풀밭에 앉았다. 차들이 지나가며 ‘엄지척’을 하거나 경적을 울려주었다. 운전자들이 우리를 구경하며 천천히 가느라 잠시 길이 막혔다. 동훈이가 주유소에서 먹을 것과 신문 몇 장을 더 사 왔다.
“아부지. 신문마다 우리가 다 나왔어요. 나바라 신문만이 아니라고요. 사람들이 저를 다 알아봐요. 글쎄.”

나바라 티비 인터뷰 중. 동훈이 영어실력 덕분에 걱정이 없다.

나바라 티비 인터뷰 중. 동훈이 영어실력 덕분에 걱정이 없다.

여기 당신들 있어요. 이라체에서 우리를 알아보고 신문 들고 뛰어온 아저씨.

여기 당신들 있어요. 이라체에서 우리를 알아보고 신문 들고 뛰어온 아저씨.

길을 가던 주민들도 발을 떼지 못했다. 당나귀랑 걷는 순례 여행은 이곳 사람들에게도 생소한 모양이었다. 갑자기 유명인이 되었다는 기분에 들떠 이라체 수도원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양조장이 보이고 철문 안에 수도꼭지 두 개가 있었다.
“동훈아. 우리 물마시고 가자.”
그런데 왼쪽 꼭지가 붉게 물들어 있다. 말로만 듣던 포도주가 나오는 수도꼭지였다. 시원하고 상쾌한 와인이 목을 타고 흘렀다. 수도원과 와인을 알리는 기막힌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라체 수도원 입구. 호택아 물 마시자.

이라체 수도원 입구. 호택아 물 마시자.

오른쪽은 수도꼭지, 왼쪽은 와인꼭지.

오른쪽은 수도꼭지, 왼쪽은 와인꼭지.

수도원을 지나자 집 몇 채가 나란히 보였다. 정원도 넓고 부유해 보였다. 길가에 수도가 있고 작은 풀밭이 있어 하루 묵어가기로 했다.
이때 담장 위로 중년의 농부가 고개를 내밀었다.
“당신들 알아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잠시 뒤 그는 신문을 가지고 담벼락으로 나와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이어 그는 염소젖으로 만든 치즈와 우유 한 통을 담장 너머로 건넸다. 이어 큰 문이 열리더니 그가 속옷에 무언가를 싸가지고 나왔다. 계란 여섯 개가 들어있었다.
“집에서 낳은 알 이예요. 맛있게 드시고 까미노를 걷기 바랍니다. 부엔 까미노.”
우리가 유명해져서 샘났는지 비가 한바탕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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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요, 신문에 난 당신들, 치즈 좀 드세요. 담장 위에서 불쑥 나타난 아저씨가 우유와 달걀도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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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거지 몰골이 되어가지만 그래도 중앙일보 마감은 미룰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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