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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차이나 유상철의 직격인터뷰

한국의 ‘전략적 모호성’ 수명 다해가고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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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한국의 새 외교전략 모색 『생존의 기로』 낸 정재호 교수

중국의 ‘전략적 겸허’가 사라지며 미·중이 치열하게 맞붙는 지금 한국의 생존 방정식은 무언가. 정재호 교수는 우리 국익을 잣대로 누구와도 논쟁하길 두려워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김성룡 기자

중국의 ‘전략적 겸허’가 사라지며 미·중이 치열하게 맞붙는 지금 한국의 생존 방정식은 무언가. 정재호 교수는 우리 국익을 잣대로 누구와도 논쟁하길 두려워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김성룡 기자

“한국이 ‘두 분의 시어머니’를 섬겨야 할지 아니면 ‘두 명의 시누이’만 두게 될지는 우리 하기에 달렸다.” 두 시어머니 또는 두 시누이는 모두 미국과 중국을 가리키는 말이다. 둘 다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미·중 사이에 낀 한국의 쉽지 않은 신세를 정재호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이렇게 표현했다. 총만 쏘지 않을 뿐 사실상 전쟁 같은 경쟁에 돌입한 미·중은 겉으론 관련 국가들에 줄 세우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속으론 편 가르기와 세 키우기에 안간힘이다. 이런 상황에서 삐끗했다간 자칫 나라의 운명이 어찌 될지 모를 판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은 과연 어디로 가야 하나. 무얼 준거로 삼아 미·중 패권 경쟁이 일으키는 풍랑을 헤쳐나갈 것인가. 40년 가까운 중국 공부와 미·중 관계 연구 끝에 최근 『생존의 기로: 21세기 미·중 관계와 한국』을 출간한 정재호 교수를 지난달 28일 만났다.

대립 넘어 충돌로 가는 미·중 관계
통합·안보·번영·통일을 잣대로
국익 위한 논쟁 두려워 말고
실리 확보와 국격 수호 외교 펼쳐야

바이든 미 행정부는 중국과의 관계를 ‘협력’과 ‘경쟁’ ‘충돌’의 세 가지로 구분한다. 이 셋 중 미·중 관계의 미래는.
“협력은 제한적일 것이다. 미·중 간 국력의 격차는 감소하는 데 반해 전략적 신뢰의 결여는 커지고 있다. 이에 더해 상호 인식의 악화로 미·중 관계는 앞으로 경쟁 및 대립을 넘어 충돌의 길로 나아갈 개연성이 매우 높다.”
바이든의 대중 정책은 트럼프 시기와 어떻게 다른가.
“강경한 대중 정책이란 점에서 트럼프와 그 방향은 같지만, 차이점은 세 가지 점에서 압박의 강도가 훨씬 높아졌다는 것이다. 첫째, 트럼프 정부가 주로 무역 분야에서 중국을 압박했다면 바이든은 그 전선을 투자와 과학기술, 전략산업 등 경제 전반으로 확대하고 있다. 둘째, 트럼프의 중국 견제가 미국 중심이었다면 바이든은 동맹과 함께 대중 연합전선을 구축하려 한다. 셋째, 바이든은 대중 견제를 넘어 자아 성찰에 기반을 둔 ‘자기 발전’에 중점을 두고 있다. AI와 신재생 에너지 등에 막대한 재원을 쏟아붓고 있는데, 이는 중국과의 ‘극단적 경쟁’에 대비함을 뜻한다.”
미·중 관계 악화의 한국에 대한 함의는.
“세 가지 측면에서 심각한 악재로 작동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미국과는 동맹, 중국과는 동반자 관계를 맺고 있다. 두 나라 공히 몹시 중요한 존재로 이들과의 관계 악화는 필연적으로 한국에 매우 심각한 딜레마를 안겨줄 것이다. 추가로 미·중 패권 경쟁의 주요 무대 중 하나가 한반도라는 것이며, 경쟁과 대립으로 점철된 지정학적 중심에 한국이 위치해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북핵 문제나 4차 산업혁명과 같이 한국의 생존을 좌우할 거의 모든 영역에서 미·중은 독립변수로 작동할 것이기에 양국 관계의 악화는 종속변수인 한국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미·중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 나라가 세계적으로 적지 않다. 모두 자구책 마련에 여념이 없을 텐데.
“두 강대국이 경쟁할 때 중소국은 어떤 선택이 가능할까. 부상국의 요구를 어떻게 다루는지에 따라 대항하지 않고 순순히 들어주는 순응, 국제기구를 통하거나 거리를 두는 적응, 직접 부딪히는 대응의 전략이 대표적이다. 대부분의 국가는 이들 전략을 혼합한 섞기, 즉 헤징 전략을 구사한다. 헤징의 특성은 어느 한 편만을 들지 않는 모호성을 유지하면서 피해 최소화를 모색한다. 통상 적응과 대응 전략을 적절히 섞어 실리는 늘리고 피해는 줄이는 노력을 한다.”
네 가지 지표로 본 미·중 비교(2019년)

네 가지 지표로 본 미·중 비교(2019년)

한국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우리 역시 다수의 국가가 하는 것처럼 나름대로 섞기 전략을 택하는 게 합리적이다. 민주국가이자 미국의 동맹인 한국의 ‘최적 선택지(optimal choice)’는 대응과 헤징 사이 그 어딘가에 위치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중국에 할 말은 하는 지점을 뜻한다. 한데 실제로는 순응과 헤징 사이에 위치해 있어 문제다. 그러다 보니 ‘중국을 높은 산봉우리, 우리를 주변의 한 봉우리’라고 말하는 자조적이고 안타까운 상황까지 발생한다.”
한때 한국이 미·중 양국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다는 말도 있었는데.
“우리가 진정으로 두 강대국으로부터 ‘러브콜’을 받는 것인지 의문이다. 그보다는 양국으로부터 오는 압박 내지는 가려진 위협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치를 보는 행태가 너무 많지 않았나. 특히 지난 10여년간 우리 정부가 중국을 두려워하는 ‘공중증(恐中症)’의 상태는 매우 악화됐다.”
왜 그런 일이 생기나.
“우리 사회가 ‘국익’에 대한 공감대를 결여한 게 문제다. 우리 정부와 국민이 국익에 대해 진지한 논의를 한 적이 별로 없다. 국익의 개념과 기준에 대한 공감대가 없다면 외교 전선에서 뛰는 이들은 도대체 무엇을 준거점으로 삼아야 하는가. 그러다 보니 끊임없는 눈치 보기와 ‘조용한 외교’에 머무르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런 외교의 결과는 국익 손상과 국격(國格)의 상실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 외교가 국익 추구를 하지 않았나.
“지금까지 한국이 추구해온 국익은 대체로 돈으로 쉽게 환산되는 무역·투자·관광과 같은 단기적이고 경제적인 이익으로 치부돼 왔다. 이런 것이 바람직하고 또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것일까? 국가의 품격과 위신, 그리고 명성과 평판은 왜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지켜야 할 핵심 국익으로 인식되지 않는지 모르겠다.”
이 시대 우리의 국익은 뭐가 돼야 하나.
“대부분의 국가는 생존·통합·안보·번영의 네 가지를 꼽는다. 한국의 현 상황을 볼 때 생존 자체보다는 이를 떠받치는 구성 부분으로서의 대내적 통합, 대외적 안보, 경제적 번영, 그리고 통일의 네 가지를 들 수 있겠다. 만일 무역이나 관광에서의 일부 손실에도 불구하고 안보 주권의 수호와 강대국에 휘둘리지 않는 것에 대한 우리 사회의 넓은 공감대가 있었더라면 사드(THAAD) 사태와 같이 대외적으로 수치스러운 상황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한국만큼 외교안보 회의가 많이 열리는 나라도 없다. 그런데도 우리 외교의 현실이 나아지지 않는 원인은 뭔가.
“우리가 계속 ‘4분의 1’의 과정에만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학계와 정책 서클에서의 진지한 비판과 논의(1/4)에 이어 이것이 정책결정 구조에 제대로 전달되고(2/4), 또 이 중 최소한 일부는 정책에 충실히 반영되어야만(3/4) 상대국에 대해 유효한 외교(4/4)를 할 수 있다. 한데 우리의 경우 첫 단계만 빈번히 일어날 뿐 그다음으로의 이행은 거의 없다. 그 핵심 요인은 정치, 정치인들의 오만에 있다.”
한국의 정치와 정치인이 문제인가.
“한 미국 학자는 한국을 ‘소용돌이의 정치’라고 표현했다. 한국에선 정치가 모든 이슈를 집어삼키는 현상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특히 청와대와 국회가 관료·학계·재계 및 언론을 압도하고 있어 외교안보 영역에서도 인기 영합 위주의 정무화(政務化) 추세가 우려할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인터넷과 SNS, 그리고 오픈 소스의 확산을 통해 정치인들도 외교안보에 대해 나름의 견해를 갖게 됐는데, 문제는 적잖은 이들이 이를 ‘전문적 식견’으로 오해 내지는 착각한다는 점이다. 정치인들의 ‘전문가 무시’가 두드러진 시대가 온 것이다.”
마지막으로 미·중 패권경쟁의 시대에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는.
“미·중 간 극한 대립으로 그동안 우리가 전가의 보도로 사용하던 ‘전략적 모호성’의 유효기간이 끝나가고 있다. 이는 미·중 사이 한국의 생존 방정식이 ‘러브콜’도 아니고 ‘꽃놀이’는 더더구나 아닌 매우 민감하고도 생존이 달린 ‘줄타기’가 될 것임을 예고한다. 우리 외교는 플랜-B를 준비하지 않는 근거 없는 낙관론, 대통령 성과 부풀리기에 급급한 조급한 외교, 또 눈치만 보는 조용한 외교에서 이제 벗어나야 한다. 우리 국익을 기준으로 필요하면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논쟁하길 두려워하지 않으며 동시에 미·중이 우리를 계속 필요로 하게 만드는 ‘상관성’을 끊임없이 창출해야 한다. 모든 일은 사람이 하기에 국가의 리더인 대통령이 중요하다. 한데 우리나라 대통령은 대부분 대통령이 되기 위한 공부만 열심히 했지, 대통령이 된 다음 어떻게 국익을 수호하고 국격을 제고할지에 대한 준비는 미흡했던 것으로 보인다. 국익을 제대로 챙길 수 있는 대통령이 반드시 나와야 한다.” 

정재호

미 미시간대 정치학 박사. 홍콩과기대 조교수 거쳐 1996년부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로 재직 중. 서울대 중국연구소 소장 역임 후 2013년부터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의 미·중관계 프로그램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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