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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기찬의 인프라

실제 배달까지 20여분, 배달 앱엔 12분…이러니 사고 안 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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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김기찬
김기찬 기자 중앙일보 고용노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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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서울 양천구 일대에서 배달을 하는 30대 김모씨는 지난달 12일, 저녁부터 밤까지 정신없이 오토바이를 몰았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 이란과의 최종 예선이 있던 날이다. 그의 배달 앱에는 자동배정 알림이 연신 울렸다. 음식점 간 거리가 만만치 않아 어느 곳에서 먼저 픽업해야 배달시간을 줄일 수 있을지 고민할 지경이었다. 픽업하는 동안 배달 배정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할 수 없이 그는 오토바이 속도를 높이고, ‘칼치기’에다 막히는 곳에선 인도 주행도 감행했다. 시속 30㎞로 속도가 제한된 학교 주변에서도 그는 늦출 수 없었다. 사고 위험이 있는 걸 그도 안다. “차량 운전자와 보행자가 우리를 ‘딸배’라는 속어로 부를 정도로 욕도 무지 먹는다”고 한다. 김씨는 “(배달)시간이 늦으면 낮은 평점을 받게 되고, 이후 물량을 배정할 때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오토바이 사고로 매년 400명 숨져
“법규 지키다간 밥 못 먹어” 호소
배달시간 측정 알고리즘이 문제
날씨·교통 등 여러 변수 반영해야

직선 거리 중심으로 시간 계산

서울 시내에서 배달기사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하고 있다. 이들은 배달 시간에 쫓겨 법규 위반이 잦은 것으로 나타났다. [뉴스1]

서울 시내에서 배달기사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하고 있다. 이들은 배달 시간에 쫓겨 법규 위반이 잦은 것으로 나타났다. [뉴스1]

배달 라이더의 세계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교통법규를 다 지키다간 밥벌이를 못 한다”는 게 그들의 하소연이다. 음식 서비스 거래액은 2017년 2조9624억원에서 지난해 17조3336억원으로 연평균 80%씩 성장했다. 덩달아 오토바이 교통사고도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있다. 도로교통공단의 교통사고분석시스템(TASS)에 따르면 이륜차 교통사고는 2011년 1만170건에서 2019년 1만8280건으로 연평균 8%씩 증가했다. 이로 인해 매년 400명가량이 숨졌다. 경찰이 단속에 나서고, 도로교통공단이 라이더를 대상으로 안전교육에 나서는 등 부산을 떨지만 그저 보여주기식 홍보에 불과할 뿐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대응방법이어서다. 교육한다고, 단속한다고 라이더의 운전방식이 바뀔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안전 사각지대에 배달 라이더를 방치할 수 없는 노릇이다. 배달시장이 커지는 것을 고려하면 더 그렇다.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고, 어느 정도인지 원인부터 찾아야 할 시점이다. 정부와 학계 등에선 배달 알고리즘을 문제의 출발점으로 꼽는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산하 미래전문기술원 오기석 부장은 “산재 사고 감축을 위해서는 촉박한 배달 시간 책정과 같은 배달 기사에 대한 압박 요인부터 들여다봐야 한다”고 말했다. 산업안전공단은 이륜차의 안전배달시간에 대한 연구용역을 한양대 물류교통공학과에 의뢰했다. 결과는 충격적이다.

유명 배달회사의 인공지능(AI) 배차 시스템에는 실제 20여 분이 걸리는 거리를 직선거리로 책정해 배달 완료까지 배정되는 시간을 12분으로 표시했다. 서울 강남의 A호텔에서 B의원까지 배달을 한다고 가정하고 데이터를 분석했다. 도로를 따라가는 직선거리로는 3.1㎞였다. 배달회사는 12분으로 소요시간을 제시했다. 한데 제한속도를 지키면 배달 지점까지 가는데 ㎞당 54.3초가 더 필요했다. 지능형 교통체계(ITS)의 정보를 기반으로 배달시간을 책정하니 ㎞당 101.4초가 더 소요돼 출발지에서 도착지까지 17분 넘게 걸렸다.

서울 강남 A호텔 인근 음식점에서 B의원까지 배달할 경우(총 길이 3.1㎞).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서울 강남 A호텔 인근 음식점에서 B의원까지 배달할 경우(총 길이 3.1㎞).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이 거리를 배달 라이더들은 15분에 주파했다. 교통정보를 반영한 소요시간보다 2분이나 빨랐다. 그만큼 속도를 높였다는 얘기다. 그래도 배달 회사가 제시한 소요시간보다 3분이나 늦었다. 여기에다 음식을 들고 걸어서 전달하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배달을 완료하는데 20분이 족히 걸린다. 늦었다. 이렇게 되면 배달기사가 페널티를 물 수 있다. 결국 과속과 신호위반, 보도주행을 감행할 수밖에 없다. 배달 알고리즘이 불법을 조장하고 안전을 도외시하는 셈이다. 이런 식으로 검증을 거듭하자 배달 거리에 따라 실제 배달시간과 배정된 배달시간 간의 차이가 63~79%나 차이가 났다.

사고 다발지역 경고 시스템 구축

주말이나 눈·비가 올 때는 더 소요되는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이런 요소를 반영한 알고리즘은 아직 찾기 힘들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올 때 배달 수수료를 더 올리는 식으로, 안전보다 돈으로 땜질하는 문화가 팽배하다.

산업안전공단은 연구용역 결과를 토대로 조만간 배달 플랫폼 운용 기준을 마련할 방침이다. 여기에는 ▶사고 다발지역 ▶안전속도 ▶교통량 ▶교차로 비율 ▶경사 ▶커브 ▶공사 여부 ▶사고나 고장 또는 행사 ▶눈·비·안개농도·풍속 등 기상조건 ▶주중·주말 여부가 모두 망라된다. 이런 요소는 따지고 보면 배달 라이더의 근무조건이다. 이런 조건이 배달 알고리즘에 가미되면 적절한 배달 소요시간의 책정이 가능해진다. 이른바 ‘안전배달시간’이 산출된다. 사고 다발 지역에선 음성과 문자 등으로 경고하는 시스템도 구축한다.

산업안전공단은 이 알고리즘이 구축되면 불량 알고리즘의 자진 퇴출을 유도할 방침이다. 앱 개선과 자가점검 장치 보급을 위해 국토교통부와 협의해 적정한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빨리빨리’에 익숙한 배달문화의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 배달이 조금만 늦어도 별점으로 기사를 비난하는 ‘별점 테러’ 문화에서는 아무리 좋은 장치가 나와도 사고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박두용 산업안전공단 이사장은 “배달 시간을 고객이 나눠 부담하는 문화, 즉 수수료를 올리는 금전적 방안 이외에 좀 더 느긋하게 기다리는 슬로푸드형 타임을 배달 문화로 받아들이는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