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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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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최명원 성균관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최명원 성균관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남자들은 간혹 여자들에게 질려버리겠다고 말하는데, 그건 바로 여자들의 초인적 기억력 때문이다. 하지만 여느 집 부부싸움의 단골 메뉴이기도 한 이 여자들의 시시콜콜 완벽에 가까운 기억력도 인공지능(AI)이 가진 기억능력에 비하면 초라해 보일 뿐이다.

기억은 무엇인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기억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어도 편향되고, 왜곡되고 주관적이다. 가수 이소라가 쓴 노랫말의 한 구절처럼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하지만 그 똑똑한 인공지능은 기억의 왜곡도 편향도 주관성도 허락하지 않는다. 때문에 완벽을 추구하는 그들의 기억방법은 재생에 불과하다. 영어로는 똑같은 메모리(memory)이지만, 우리말로는 기억도, 추억도 또는 회상도 된다. 그리고 그 각각의 의미가 지니는 색채와 맛깔스러움이 똑같을 수가 없는데, 인공지능에는 언제나 한결같은 재생단위 메모리와 그 저장고(칩)일 뿐이다.

기억의 왜곡·망각은 인간의 특권
인공지능은 똑같이 재생만 할 뿐
아련한 향기의 추억 만들지 못해

오래전에 썼던 ‘다산포럼’ 기고문에서 기억과 추억, 회상을 떠올리며, 무엇이 재생과의 차이를 만드는지 언급한 적이 있다. 나쁜 기억은 있을 수 있지만, 나쁜 추억은 낯설고 나쁜 회상은 아예 없다. 나쁜 추억이 되는 순간 그것은 나쁜 기억으로 환원된다. 차라리 아픈 추억이라면 모를까. 우리의 지적 능력을 비웃는 뛰어난 지능의 AI라 해도, 그들이 가진 기억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닐뿐더러, 아픔이나 슬픔, 배시시 배어 나오는 웃음과 따스함과는 어울릴 수도 없는 그저 재생단위의 코드일 뿐이다. 그래서 한껏 젖어 드는 추억거리도 될 수 없고 회상의 아련함도 가져볼 수 없는 것이다.

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비스를 종료해야만 했던 챗봇 ‘이루다’는 100억 회의 실제 대화를 깊이 학습하고(deep learning), 마치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환상을 만들어 주지만, 그 대화 내용을 가지고 좋고 싫음은 물론 기쁨과 슬픔을 가늠해보는 기억과 추억의 뿌리를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에, 감각도 감성도 상실한 말대답만 생각 없이 토해낼 뿐이었다.

그 어떤 것도 허투루 지우지 않고, 일말의 왜곡도 허락하지 않는 인공지능은 완벽한 기억재생체다. 이들이 담고 있는 저장물들은, 사람들에게 때로는 잊히고픈 아픈 기억들일 수도 있는데, 이조차 아무 때나 마구잡이로 재생해버린다. 이제 와서는 ‘나보다 나를 속속들이 더 잘 아는’ 나의 그 무엇들이 되어서 내 기억에서조차 희미해져 버린 모든 것들을 시도 때도 없이 까발려버린다. 그뿐만이 아니다. 내가 뒤적이며 스쳐 간 검색창의 내용들이 마치 나의 전부인 양 나의 분신으로 기억되어, 나의 취향과 선호도에 섣부른 판단을 내린다. 이를 빌미로 아무 때나 불쑥불쑥 보내오는 맞춤형(?) 제안들은 신통하다기보다 불쾌지수가 높아지는 일이다.

어디선가 보았던 몇 마디 글귀가 노트 한 귀퉁이에 담겨 있다. “사람이 언제 죽는지 알아? (…) 잊혀질 때야.” 이를 보면서 아주 오래전 교과서에서 읽었던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한 노인의 대답이 “망각”, 즉 ‘잊(혀지)는 것’이라던 글의 내용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하지만 10여 년 전부터 ‘잊혀질 권리’를 찾는 부르짖음은 ‘디지털 장의사’라는 생소한 직업마저 탄생시켰고, 교과서에서 보았던 그 무시무시한 이야기의 주인공 ‘망각’이란 녀석은 생뚱맞게 찾아온 인공지능의 기억력 때문에 ‘권리’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렇듯 기억의 편향과 왜곡은 인간들을 ‘똑똑지 못한 미물’로 전락시키는 반면, 완벽한 인공지능의 기억능력은 신의 경지를 넘본다. 그래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또 하나의 ‘신’(『구글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을 모시고 살게 되었다. 그렇지만 인공지능이 휘둘러대는 그것이 정말 기억이라는 것일까? 그저 완벽한 재생을 위해 기억의 이름으로 저장된 코드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도돌이표만을 맴도는 그런 디지털 재생의 조각들. 편향되고 왜곡된 인간의 기억능력은 한편으로는 너무나 인간적인 향기를 품지만, 유독 범죄 집단과 정치인들에게서 기억의 소재가 선택적이고 탄력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기억이라기보다는 완벽하고 빈틈없는 인공지능의 재생능력에 진저리 내고 싶었던 나의 예전 기고문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었다. “내게서 멈추지 않던 생각이 버무려져 왜곡의 촌극을 빚어내는 기억의 엉뚱함도, 손맛 어린 추억의 아련함도 모르는 채 회상의 향기도 색깔도 낼 수 없는 너는 재생만을 되풀이할 뿐이야, 나는 기억하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