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바이오 토대는 벤 존슨 금메달 박탈한 데이터 사이언스”

중앙일보

입력 2021.11.01 17:49

업데이트 2021.11.01 21:35

한문희 전 한국생명공학연구원장이 서울 ICU 미디어연구센터 카이스트 소프트웨어대학원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한 박사는 "디지털과의 접목이 한국 제약바이오산업의 한 단계 도약을 위한 첫 번째 과제"라고 강조했다. 김상선 기자

한문희 전 한국생명공학연구원장이 서울 ICU 미디어연구센터 카이스트 소프트웨어대학원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한 박사는 "디지털과의 접목이 한국 제약바이오산업의 한 단계 도약을 위한 첫 번째 과제"라고 강조했다. 김상선 기자

“나라를 위해 조그맣게 공헌한 흔적을 높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디지털 전환의 시대에 젊은 과학자들이 연구하는데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을 고민해 보겠습니다.”

오는 3일 열리는 세종과학기술인 대회에서 ‘과학기술 유공자증’을 받는 한문희(87·전 한국생명공학연구원장) 한국바이오협회 명예회장은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수상 소감을 밝혔다. 더 기여할 일을 찾아보겠다는 과학기술계 원로의 일성이 인상적이다.

한 박사는 국내 효소공학의 선구자로 불린다. 미국 미네소타대 조교수로 근무하다가, 박정희 정부 때 ‘유치과학자 제도’를 통해 1974년 한국과학기술원(KIST)으로 옮겼다. 이때 처음 부여된 목표가 전분(고구마)으로 설탕을 만드는 것이었다. 정부와 럭키(현 LG화학)가 각각 2000만원씩 4000만원의 연구비를 댔다. 아파트 한 채에 500만원이던 시절이니 상당한 금액이었다.

“소련(러시아)이 원당을 대량 매입해 세계적으로 설탕값이 치솟을 때였습니다. 설탕을 100% 수입하는 한국으로선 직격탄이지요.”

한 박사는 고구마를 주성분으로 하는 대체감미료(이성화당)를 개발했다. 지금도 한과나 인삼 등을 꿀 같이 생긴 액상감미료로 찍어 먹는데, 이게 바로 한 박사가 개발한 감미료다.

88서울올림픽 100m 남자 달리기 결승은 캐나다의 벤 존슨 선수와 미국의 칼 루이스 선수가 맞대결하면서 '세기의 대결'로 불렸다. 당시 대결에서 벤 존슨 선수가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했지만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약물검사소가 시행한 도핑 테스트에서 양성 반응이 나와 금메달을 박탈 당했다. [중앙포토]

88서울올림픽 100m 남자 달리기 결승은 캐나다의 벤 존슨 선수와 미국의 칼 루이스 선수가 맞대결하면서 '세기의 대결'로 불렸다. 당시 대결에서 벤 존슨 선수가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했지만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약물검사소가 시행한 도핑 테스트에서 양성 반응이 나와 금메달을 박탈 당했다. [중앙포토]

이후엔 결핵 치료제 국산화에 나섰다. 당시 국내 제약사는 해외에서 치료제 원료를 수입해 정제(錠劑)로 만들었기 때문에 값이 비쌌다. 한 박사는 “항결핵제 원료는 모든 수입 항생제 중 가장 고가(高價)였다”며 “국가 발전을 위해 유치과학자의 길을 택한 만큼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고 회고했다. 이후 KIST는 유한양행과 합작해 직접 투자를 결정하며 주요 원료를 개발했다. 당시 설립한 합작사(K-TEC)는 지금으로 따지면 일종의 바이오벤처기업이다.

한 박사는 주로 KIST 응용생화학연구실에서 근무하다 1985년 약물검사소장을 맡았다.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을 앞두고서다.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운동선수의 도핑을 검사하는 약물을 개발하라는 특명이 떨어졌습니다. 외국에서 지원받을 수도 있었지만 ‘한국 과학자의 자존심이 달렸다’고 생각해 거절했지요.”

1974년 8월 9일 중앙일보에 실린 한문희 당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응용생화학연구원장 인터뷰. [중앙포토]

1974년 8월 9일 중앙일보에 실린 한문희 당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응용생화학연구원장 인터뷰. [중앙포토]

KIST 약물검사소는 110여 개의 약물을 분석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컴퓨터로 집계했다. 요즘 말로 ‘데이터 사이언스’를 접목한 셈이다. 이후 100m 경기에서 세계 신기록(9초79)을 세웠던 벤 존슨(캐나다)의 도핑을 순수 우리 진단 기술로 적발한 건 유명한 얘기다.

한 박사는 “앞으로 바이오기술에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를 접목하는 작업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이미 30여 년 전에 데이터 사이언스를 도입한 인물다웠다. 한국이 코로나19 진단키트와 백신 생산 허브를 통해 K바이오로 주목 받는 데는 이 같은 숨은 성과물이 있었다.

“코로나19 백신 개발 과정에서 확인됐듯이 제약·바이오 산업은 상업성과 공공성을 동시에 가졌습니다. 백신을 개발한 기업도 돈을 벌지만, 사회적으로는 감염병 확산을 막을 수 있습니다. 정부가 먼저 디지털 바이오테크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를 통해 연 매출 1조원이 넘는 블록버스터 신약이 나오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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