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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환자 살리려는 의사, 치료 원치 않는 보호자…균형점은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조용수의 코드클리어(83)  

지난 죽음은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환자는 하필 마지막 순간까지 정신이 온전했다. 혈압이 분 단위로 뚝뚝 떨어졌건만 의식만큼은 또렷했다. 진정제를 밀어 넣어 환자를 재울까 고민이 될 정도로. 나도 보호자도 환자와 눈을 마주하는 게 괴로웠다. “당신 몇 시간 안에 죽습니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나요?” 이렇게 물을 수도 없는 노릇.

암이나 만성질환으로 사망하는 환자에 대한 고민은 무수히 많지만, 급성질환으로 응급실에 실려와 죽는 사람에 대한 고민은 아직 우리 사회에 턱없이 부족하다.

다행히 이번 환자는 의식이 없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마음이 한결 편하다. 죽음은 당사자보다 주변인에게 전달하는 게 훨씬 쉽다. “상태가 안 좋아요. 오늘 밤을 넘기기 어렵습니다. 지금 투석 치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 치료를 해도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만, 아무튼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 바로 이 치료입니다.”

우리는 종종 트롤리 딜레마에 놓인다. 그리고 실험은 때때로 한층 더 정교해진다. 꼬안 상황에서 선택을 강요당하기도 한다. 의사의 숙명이다. [사진 Arseny Togulev on Unsplash]

우리는 종종 트롤리 딜레마에 놓인다. 그리고 실험은 때때로 한층 더 정교해진다. 꼬안 상황에서 선택을 강요당하기도 한다. 의사의 숙명이다. [사진 Arseny Togulev on Unsplash]

보호자는 간단히 몇 가지를 더 물어보더니, 시술 동의서를 내 쪽으로 다시 내밀었다. 서명하지 않은 채다. 더는 치료를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는 다른 서류를 꺼내 들었다. 소생술 포기 각서. 보호자는 지체 없이 빈칸에 이름을 날인했다. 계약이 체결되었다. 이제 남은 건 한 생명의 소멸을 지켜보는 것뿐. ‘몇 날 며칠 몇 시 누구 사망’이라는 거룩한 선언만 하면 내 역할도 끝이다. 오케이.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기꺼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죽음을 통보하는 건 어렵지만, 죽은 사람에게 죽음을 통보하는 건 전혀 어려울 게 없다.

이대로 끝나면 좋으련만. 보호자가 퇴원을 요구했다. 어차피 살릴 수 없으니 환자를 모시고 가겠단다. 집에서 임종을 맞게 해주겠다고. 나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음을 들어 보호자를 만류했다. 집에 가는 도중에 사망할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길에서 객사하면 안 되지 않겠냐고 말렸지만, 보호자는 한사코 고집을 부렸다. 이래 죽으나 저래죽으나 마찬가지라며. 난감했다. 집으로 보내려면, 그나마 환자에게 숨을 붙여주는 이런저런 약과 수액을 모두 끊어야 했다. 의사로서 전혀 내키지 않는 일이다.

우리는 종종 ‘트롤리 딜레마’에 놓인다. 그리고 실험은 때때로 한층 더 정교해진다. 이렇게까지 상황을 꼬아도 선택을 내릴 수 있느냐고 물어온다. 의사의 숙명이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어려운 질문으로 나를 시험할 필요는 없다. 제일 쉬운 문제의 답도 어차피 나는 모른다. 집에 보내 달라는 보호자의 요구에 나는 금세 머릿속이 하얘진다. 한심한 노릇이다. 밥 먹듯이 윤리의 벼랑 위에 서 왔건만, 그런데도 나는 또 한 번 줏대 없이 휘청인다. 평생을 가도 모자란 의사이려나 보다.

복잡한 고민은 하고 싶지 않다. 내가 원하는 건 단순하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모두 해달라는 동의, 그것뿐이다. 그러면 나는 고민 없이 치료에만 전념할 것이다. 여러 가지 치료를 더 수행하면 업무량이 많이 늘겠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노동은 번뇌보다 결코 힘들지 않으니까. 그저 배운 대로 ABC 순으로 내 맡은 소임을 다하고 싶을 따름이다.

하지만 내 앞에 서 있는 건, 누구나 저마다의 사연과 사정을 지닌 하나의 인간이기에 나는 또다시 캄캄한 갈림길에 놓여진다.

그나마 가망이 없는 환자라면 고민이 덜하다. 하지만 치료에 따라 어느 정도 기대를 해볼 법한 환자라면? 시작부터 골치가 아프다. 더 곤란한 상황도 있다. 치료가 잘되면 죽음은 피하겠지만 대신 영구한 장애나 식물인간이 될 환자다. 이런 경우 깔끔하게 치료를 포기해달라는 보호자는 생각보다 훨씬 많다.

의사는 너무나 자주 사회적 고민을 환자를 대신해 떠안게 된다. 한 개인이 아닌 한 가족까지 고려해서 판단을 내려야 한다. 매번 지루한 줄다리기가 벌어진다. [사진 Hush Naidoo Jade Photography on Unsplash]

의사는 너무나 자주 사회적 고민을 환자를 대신해 떠안게 된다. 한 개인이 아닌 한 가족까지 고려해서 판단을 내려야 한다. 매번 지루한 줄다리기가 벌어진다. [사진 Hush Naidoo Jade Photography on Unsplash]

치료를 포기하는 이유는 저마다 다양하다. 돈이 되었건 정이 되었건. 아무튼 그럴 거면 애당초 병원에 데려오지 않으면 되잖은가? 기껏 병원에 모시고 와놓고 의사의 손발을 묶으면 어쩌란 말인지. 나는 환자를 마주한 바로 그 순간부터 무거운 책임 의식에 시달리거늘.

대부분의 환자가 의식이 없으니, 나는 그가 살고 싶어 하는지 죽고 싶어 하는지 알 도리가 없다. 어쩌면 환자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아직 최선의 치료를 다해본 건 아니라는 생각. 의사는 그 감정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더구나 지금껏 체화한 윤리와 법은 결코 포기를 허용하지 않는다. 윤리는 설령 환자가 살인마라도 일단 살리라고 하며, 법은 가장 소극적인 안락사조차도 용납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은? 의사는 너무나 자주 사회적 고민을 환자를 대신해 떠안게 된다. 한 개인이 아닌 한 가족까지 고려해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래서 매번 지루한 줄다리기가 벌어진다. 그리고 그 균형점은 대개 뻔하다. 보호자는 새로운 시술 및 처치 동의서에 서명을 거부한다. 그렇다고 모든 치료를 중단하고 집에 돌려보내는 일도 드물다. 결국 대부분의 환자는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장례식장으로 보내진다.

오늘날 가장 흔한 죽음의 절차다. 누구도 원치 않지만, 누구나 겪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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