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핵 선제 불(不)사용(no first use)' 원칙을 채택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자 유럽·태평양 지역의 주요 동맹국들이 이를 막기 위해 미국을 상대로 로비 벌이고 있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3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영국·프랑스·독일·일본·호주 등 동맹국들은 바이든 행정부가 새로운 핵전략 지침인 '핵 태세 검토 보고서(NPR)'를 만드는 가운데 로비에 나섰다.
냉전 이후 미국 정부는 핵무기 정책을 전략적으로 모호하게 유지해 왔다. 경우에 따라 핵무기를 선제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적의 도발을 사전에 억제하기 위해서다. 유럽과 아시아의 동맹국들은 미국의 이런 '핵우산' 아래에서 분명한 보호를 받아왔다.
이 때문에 바이든 정부가 보고서에서 '핵을 먼저 사용하지 않는다' 또는 '보복 공격에 사용한다'는 식으로 핵 사용 원칙을 보다 분명하게 명시할 경우 오히려 핵 억제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게 동맹국들의 우려다.
일부 전문가들도 바이든 행정부가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하는 상황을 명확하게 규정하면 러시아와 중국을 담대하게 만들 수 있다며 우려하고 있다. 또한 일본과 한국 같은 동맹국들의 핵무기 개발을 자극해 군비 경쟁을 촉발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오고 있다고 FT는 지적했다. 익명을 요청한 유럽의 한 관계자는 FT에 "(바이든 정부가 핵 선제 불사용 등의 원칙을 채택할 경우) 중국과 러시아에 큰 선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FT는 두 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미국이 올해 초 동맹국들에 핵무기 정책 변화와 관련한 질문지를 보냈고, 이에 동맹국들은 어떤 정책 변화도 엄청난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올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전했다. 실제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이 이달 초 벨기에 브뤼셀에 위치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본부를 방문했을 당시 동맹국들의 로비가 상당히 치열했다고 FT는 보도했다.
FT에 따르면 일부 동맹국들은 미 당국자들이 동맹국의 반대 의견을 바이든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미군 철수, 호주와의 핵 추진 잠수함 기술 이전 협정 등을 강행하는 과정에서 백악관이 동맹국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전례가 있어서다.
미국이 작성 중인 NPR에 '선제 불사용'이 포함될 가능성과 관련, 외교부는 31일 보도자료를 통해 "한미 연합방위태세 및 미국의 확장억제 공약은 굳건하며, 한미는 동맹국으로서 다양한 안보 분야에서 긴밀히 소통·협의하고 있다"며 "미측은 현재 검토가 진행 중인 NPR 동향을 우리측에 공유하고 있으며, 한미는 다양한 계기에 관련 논의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