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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그 영화 이 장면

한창나이 선녀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원호연 감독의 ‘한창나이 선녀님’은 강원도 삼척에 살고 계신 임선녀 할머니의 일상을 담는다. 손주들이 있으니 분명 할머니가 맞지만, 그의 하루하루는 노인의 조용하고 잔잔한 삶이 아니다. 아침저녁으로 소를 돌보고, 먼 길을 달려가 한글을 배우고, 나무에 올라가 감을 따고, 지붕 위에 생선을 말리고, 새로 짓는 집 건축 현장에서 못질까지 하는, 노동으로 가득 찬 시간이다. ‘한창나이 선녀님’은 나이와 상관없이 말 그대로 ‘한창’(어떤 일이 가장 활기 있고 왕성하게 일어나는 때)인 주인공을 통해 잔잔한 울림을 준다.

그영화이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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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큐멘터리엔 수많은 사연이 있지만, 가장 흥미로운 건 새집을 짓는 주인공 모습이다. 진작부터 새집에 살고 싶었지만 꿈을 이루지 못했던 임선녀 할머니는, 남편과 사별한 후 결심한다. 결혼한 후 50년 동안 살았던 낡은 집을 버리고 직접 지은 새집으로 옮기기로 한 것. 이 결심은 단순히 거처를 옮기는 의미를 넘어선다. 주인공은 그 집에 있었던, 시간의 무게가 켜켜이 쌓인 사물들과 이별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때 옷 한 벌이 등장한다. 시집올 때 입었던 저고리다. 이삿짐 정리를 하던 중 발견한 주인공은, 새집으로 가기 전에 그 옷을 태운다. 종교적 느낌마저 드는 인상적 장면. ‘한창나이 선녀님’은 어쩌면 칠순이 다 된 나이에 어떤 깨달음을 얻은 한 노인의 초상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