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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합천 500㎞…칠순잔치 버리고 30억 기부 향해 걸었다 [장인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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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자란 고향에서는 서울을 ‘한양천리’라고 했다. 소년에게는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거리였다. 대학에 입학하며 소년은 그 먼 길을 떠났다. 타향살이를 시작한 소년은 한걸음, 한걸음 꾹꾹 눌러가며 고향으로 돌아갈 소망을 가슴 한쪽에 품고 살았다. 칠순을 맞은 소년은 특별한 귀향을 준비했다.

정인조 부천희망재단 이사장(70)은 지난여름 경기도 파주 임진각을 출발해  500km 이상을 걸어서 고향인 경남 합천에 도착했다. 칠순 잔치 대신 고향까지 걸어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고향은 어머니의 품이잖아요. 어릴 적 소 몰고 동산을 뛰

어다니던 기억,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먼저 떠난 형제들… 애잔하고 따스한 추억이 담긴 곳이죠”  

정인조 부천희망재단 이사장이 귀향길의 시작점인 임진각에 섰다. 장진영 기자

정인조 부천희망재단 이사장이 귀향길의 시작점인 임진각에 섰다. 장진영 기자

그저 걷기만 한 것이 아니다. 현재까지  20억 이상을 기부한 그는 ‘1km에 100만원씩 기부’하는 도보 기부를 계획했다. “유산을 포함해 30억을 기부하겠다”라는 그의 신념이 담긴 여정이었다. 하루 평균 25km~30km, 총 18일간 묵묵히 걸어 고향에 도착했다.

정 이사장은 몇 차례나 인터뷰를 거절했다. “자랑할 것도 없고, 뭐 대단한 일도 아닙니다”라는 이유에서였다. 오랜 설득 끝에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임진각 인근 평화누리길을 걷고 있는 정 이사장. 그는 팔순에는 걸어서 신의주까지 가고싶다고 했다. 장진영 기자

임진각 인근 평화누리길을 걷고 있는 정 이사장. 그는 팔순에는 걸어서 신의주까지 가고싶다고 했다. 장진영 기자

고향까지 500km 걸어가는 데 성공했다
내 삶에 감사하기에 특별한 칠순을 맞고 싶었어요. 평생 수많은 인연이 저에게 선하게 작용했고, 스스로 생각해봐도 삶을 감사하게 잘 산 거 같아요. 감사의 표현으로 고향까지 걸으면서 5억을 기부하자 생각한 거죠.  
기부만 해도 되는데 이렇게까지 걷는 이유가 궁금하다
모금가의 첫 번째 계명은 ‘스스로 기부하라’ 입니다. 상대에게 공감하고 나의 선한 뜻을 전하는 게 기부죠. 기부와 모금 활동을 함께 하고 있는데 모금을 위해 솔선수범처럼 기부를 해왔던 것이죠. 내가 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한테 어떻게 기부하라고 할 수 있겠어요. 많은 분이 걸음에 동참했어요. 함께 걷기도 하고, 내가 걷는 만큼 기부를 하기도 했죠. 기부와 모금의 선순환을 바랐습니다.  이렇게 더해진 금액이 2000만원이 넘습니다.   
정인조 이사장이 첫날 여정인 평화누리길 1코스를 설명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정인조 이사장이 첫날 여정인 평화누리길 1코스를 설명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나이가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는지
다행히 아직 무릎은 고장 나지 않았어요. 폐에 문제가 약간 있는데 3년 전부터 아파트 계단 오르기를 했어요. 매일 25층까지 3번 왕복. 하루 만보 이상 걷고, 작정하고 30km 이상 걷기도 했어요. 합천까지 16구간으로 나눠서 지인들이 교대로 함께 걸었는데 항상 내가 선두였어요.  
왼쪽부터 강명구 평화마라토너, 조헌정 목사, 정 이사장, 대학동기인 이화영씨. 이들은 가장 많은 구간을 함께 했다. 사진 정인조

왼쪽부터 강명구 평화마라토너, 조헌정 목사, 정 이사장, 대학동기인 이화영씨. 이들은 가장 많은 구간을 함께 했다. 사진 정인조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나
고향으로 향하다 보니 가족, 어린 시절부터 학창시절, 젊을 때의 모습이라든지… 그리고 나와의 인연들로 쭉 이어지더라고요. 한걸음에 삶을 조금씩 뒤돌아보니 힘든 기억은 없고 아스라하지만 모든 추억이 아름답게 남아있더군요.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서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 순간도 많았습니다.  
도보귀향 당시 사용했던 물품들. 비상약과 여벌옷, 안정자구까지 총 8kg가 넘는다. 18일의 일정동안 함께했던 배낭의 모습. 장진영 기자

도보귀향 당시 사용했던 물품들. 비상약과 여벌옷, 안정자구까지 총 8kg가 넘는다. 18일의 일정동안 함께했던 배낭의 모습. 장진영 기자

멈추고 싶었던 순간은
무주읍 용포리를 출발해 구천동까지 가는 날이었어요. 빼재 터널로 가로질러가면 빠른데 무슨 도전의식에서인지 나제통문을 경유하는 길을 가기로 했죠. 새벽 4시에 출발해 졸면서 걸었어요. 사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었는데 ‘러너스 하이’라고 할까요. 희열이 느껴지면서 내가 걷는 게 아니라 자동으로 그냥 걷게 되는 느낌. 선두였기에 쉽사리 그만두지도 못했죠. 그날 총 46km를 걸었어요.  
8월 29일 걷는 도중 비를 피하며. 사진 정인조

8월 29일 걷는 도중 비를 피하며. 사진 정인조

이번 귀향에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걸으며 기부에 동참했다. 사진 정인조

이번 귀향에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걸으며 기부에 동참했다. 사진 정인조

임진각 인근 평화누리길을 걷고 있는 정 이사장. 그는 팔순에는 걸어서 신의주까지 가고싶다고 했다. 장진영 기자

임진각 인근 평화누리길을 걷고 있는 정 이사장. 그는 팔순에는 걸어서 신의주까지 가고싶다고 했다. 장진영 기자

또 다른 도전을 준비하고 있는지
칠순에는 고향을 향했다면, 팔순에는 휴전선 넘어 평양을 거쳐서 신의주까지 가보고 싶어요. 그 이후에도 기회가 된다면 백두산에서 출발해 남도 땅끝까지도 걸어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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