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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은 깡패, 나는 애국자" 갱단 두목이 당당한 나라 어디

중앙일보

입력

'바비큐'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갱단 두목 지미 셰르지에. 경찰 출신인 그는 아이티 연료망을 장악하고 "총리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바비큐'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갱단 두목 지미 셰르지에. 경찰 출신인 그는 아이티 연료망을 장악하고 "총리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가 아닌 갱단이 수도의 절반을 장악한 북중미 빈국 아이티에서 갱단 두목이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당당하게 “총리 사퇴”를 요구하고 나섰다. 갱단 두목은 인터뷰 도중 총리를 포함한 정치인과 기업인들을 “깡패”라 지칭하고, 자신은 “책임있는 지도자이자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갱단이 연료망 장악…발전소·통신망도 멈춰 

27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과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 일대를 장악한 갱단 연합체인 ‘G9’의 두목인 지미 셰르지에가 현지 라디오 인터뷰에 출연해 자신의 범죄 조직이 아이티의 연료 공급을 차단하고 있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그는 “평범한 시민을 위협하려는 목적이 아니고, 오직 아이티의 정치인과 기업가를 압박하고 아리엘 앙리 총리의 사임을 촉구하기 위한 행동”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셰르지에의 갱단은 2주 넘게 도로를 봉쇄하고 연료 트럭의 통행을 막거나 트럭 기사를 납치하는 방법으로 연료망을 사실상 장악했다. 갱단의 위협에 연료 공급업체들도 수송을 포기한 상태다. 주유소의 기름이 떨어져 거리에는 교통량이 크게 줄었고 상점들도 문을 닫았다. 발전기를 돌릴 연료도 바닥나 곳곳에 전기가 끊겼고 통신 기지국이 멈춰 통신도 두절 상태다.

갱단으로부터 사퇴를 종용받고 있는 아리엘 앙리 아이티 총리. 연합뉴스

갱단으로부터 사퇴를 종용받고 있는 아리엘 앙리 아이티 총리. 연합뉴스

가장 심각한 곳은 병원이다. 인큐베이터 안에서 겨우 호흡을 이어가고 있는 조산아들은 병원의 자체 발전기마저 작동을 멈추면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다. NYT는 한달 일찍 태어난 아들을 둔 오토바이 택시 운전사 로슬리우 데스로지에의 사연을 소개했다. 그는 오토바이에 넣을 연료가 없어 생업을 포기했다. 조산아인 아이를 돌보기 위해 병원 5곳을 전전해야 했다. 겨우 인큐베이터가 있는 병원을 찾아 아이를 맡겼지만, 이 곳 역시 며칠 뒤면 전기가 끊기고 병원 전체가 폐쇄될 예정이다. 그는 “제대로 숨도 못 쉬는 손바닥만한 아이를 살릴 방도가 없다”고 좌절했다.

갱단 두목인 셰르지에는 라디오 인터뷰에서 “우리는 늘 더 가난하고 불리한 사람들 편에 섰다”면서 “책임있는 지도자이자 이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연료가 병원에는 도달할 수 있게 허가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총리가 오전 8시에 사퇴하면, 우리는 8시 5분에 도로 봉쇄를 해제하고 연료 수송 트럭 통행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아이티는 연료 수송이 끊겨 자체 발전을 하는 병원도 남은 전력을 다 쓰면 운영을 중단하고 폐쇄해야 하는 상황이다. 특히 조산아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다. 연합뉴스

아이티는 연료 수송이 끊겨 자체 발전을 하는 병원도 남은 전력을 다 쓰면 운영을 중단하고 폐쇄해야 하는 상황이다. 특히 조산아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다. 연합뉴스

경찰 출신 갱단 두목 "내가 총리" 선언도

무법천지가 된 아이티의 혼란상은 지난 7월 조브넬 모이즈 대통령이 자신의 숙소에서 암살당한 뒤 극에 달했다. 경찰 출신인 셰리지에는 모이즈 대통령이 암살된 뒤 추모 집회를 열어 암살 배후라는 의심을 샀다. 지난 17일에는 아이티 건국영웅의 추모식에 난입해 헌화하려던 앙리 총리를 내쫓고 “이제부터 내가 총리”라고 선포한 뒤 직접 기념식을 진행했다. 셰리지에는 2019년 이미 체포영장이 발부된 상태지만 대중들 앞에 스스럼없이 모습을 드러내고 언론 인터뷰까지 나서는 데도 공권력이 전혀 손을 쓰지 못하고 있다.

NYT는 아이티에서 갱단이 이렇게 급성장한 배경에는 정부의 근시안적이고 잘못된 전략이 있었다고 전했다. 한 인권운동가는 NYT에 “정부 고위 관료들이 정치 라이벌이나 개인적 복수에 정부 자원은 물론 갱단의 힘을 빌려 왔다”고 말했다. 정치인과 고위 관료들이 자신의 세력을 다지는 용도로 갱단을 이용하고 비호하다 갱단에 뒤통수를 맞은 것이란 설명이다. 아이티에는 150개 이상의 갱단(2019년 기준)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는데, 최근 그 수가 훨씬 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도 포르토프랭스는 40%가 갱단 손아귀에 있다고 한다.

지난 17일 아이티 건국 영웅 추모식에서 총리를 내쫓고 직접 행사를 진행하는 셰르지에의 모습. 연합뉴스

지난 17일 아이티 건국 영웅 추모식에서 총리를 내쫓고 직접 행사를 진행하는 셰르지에의 모습. 연합뉴스

정부가 갱단 비호하다 뒤통수…국민들 "희망 없다"

실제로 이달 초 아이티의 장 페레르 미셀 목사는 “복면을 쓰고 무장한 남성들이 자택에 침입해 내 온몸을 결박하고 갱단에 넘겼다”면서 “가족들이 여러 차례 몸값을 지불한 뒤에야 겨우 풀려났다”고 말했다. 미셀 목사는 “나를 납치한 사람들은 법무부 차량을 타고 왔고 갱단과 한팀이었다”고 말했다. 리스트 키텔 아이티 법무부 장관은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서 이 같은 의혹을 부인했다.

쓰레기 더미가 된 아이티 시내에서 쓸만한 물건을 뒤져 나르는 아이티 시민들. 연합뉴스

쓰레기 더미가 된 아이티 시내에서 쓸만한 물건을 뒤져 나르는 아이티 시민들. 연합뉴스

갱단이 장악해 무법천지가 된 아이티 국민들은 기아 상태로 전락했다. 유엔은 아이티 인구 1100만명 중 440만명이 식량 지원이 필요한 상태로 파악하고 있다. NYT는 “이곳 시민들은 ‘이 나라가 나아지기 바라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안다’며 거의 자포자기 상태에 빠졌다”면서 “현재 아이티에는 국가는 없고 혼돈만 남았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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