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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뱅 이전은 '지금, 여기'···흉악범 감옥서 쓴 요한복음 신비" [백성호의 예수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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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호의 예수뎐]  

요한복음은 첫 구절부터 남다르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예수의 출생’으로 시작한다. 마태복음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자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풀면서 전개된다. 누가복음은 수태고지 일화와 예수의 탄생으로 막을 연다.

요한복음은 다르다. 육신의 예수, 족보의 예수가 출발점이 아니다. 창세기와 연결된 우주적 존재, 예수의 주인공, 신의 속성을 이야기하며 복음서의 문을 연다. 성서 학자들은 “그리스 등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거기에는 ‘예수의 주인공’을 꿰뚫어 보는 깊은 영성의 안목이 담겨 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좀 각별하다.

사도 요한은 아흔의 나이에 파트모스 섬의 동굴에서 요한복음을 썼다. 그 동굴 위에는 그리스 정교회의 교회가 세워져 있다. 교회 벽면에 그려진 사도 요한의 벽화.

사도 요한은 아흔의 나이에 파트모스 섬의 동굴에서 요한복음을 썼다. 그 동굴 위에는 그리스 정교회의 교회가 세워져 있다. 교회 벽면에 그려진 사도 요한의 벽화.

(24) 요한복음을 쓴 곳은 흉악범 수용소였다

사도 요한이 말년에 유배를 당했던 그리스의 파트모스(밧모)섬으로 갔다. 아름다운 섬이었다. 나는 야트막한 산에서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 요한이 유배지에서 살았던 동굴로 갔다. 지금은 동굴 위에 성 요한 수도원이 세워져 있고, 그리스 정교회의 수도사들이 거기서 지내고 있었다.

동굴은 그리 크지 않았다. 당시 요한이 엎드려 기도하다가 일어설 때 짚었다는 동굴의 벽면에 홈이 파여 있었다. 아흔 살 노구여서 몸을 일으킬 때마다 짚을 곳이 필요했다고 한다. 순례객들은 그 홈에 손을 대고 기도를 하기도 했다.

나는 동굴 구석에 가서 쪼그려 앉았다. 요한복음을 펼쳤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복음 1장 5절)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누가복음 17장 21절)라고 말했다. 그럼 요한복음에서 언급한 ‘그 빛’은 어디에 있을까. 그렇다. 내 안에 있다. 하느님 나라가 내 안에 있으니 빛도 내 안에 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빛이 내 안에 있다는데 빛이 보이질 않는다. 어둠 때문이다. 우리의 눈은 어둠에 익숙하다. 빛이 있는데도 어둠만 바라본다. 왜 그럴까. 우리가 ‘빛’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스 파트모스 섬에 있는 교회의 종을 울리고 있다. 종소리가 섬 가득 울려퍼졌다.

그리스 파트모스 섬에 있는 교회의 종을 울리고 있다. 종소리가 섬 가득 울려퍼졌다.

요한복음은 말한다. “어둠은 그(빛)를 깨닫지 못하였다.” 2000년 전 이스라엘의 유대인들만 예수를 몰라본 게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는 우리도 ‘내 안의 빛’을 몰라본다.

사도 요한의 그림에는 종종 독수리가 등장한다. 요한이 박해를 받으면서도 예수를 당당하게 기록한 용맹함, 그리고 예수에 대한 사건 전달에 치중한 다른 복음서들보다 ‘예수의 의미’를 다룬 점이 각별하다는 뜻에서 높이 나는 독수리가 사도 요한의 상징이 됐다고도 한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독수리 복음’이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가 어둠만 보기에 예수가 왔다. 빛과 하나가 된 사람이 왔다. 요한복음에서는 그걸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복음 1장 14절)라고 표현했다. 예수는 우리에게 어둠을 녹이고 빛을 찾는 방법을 일러준다. 복음서에서 피어나는 예수의 많은 어록에 담긴 메시지로 인해 내 안의 어둠이 빛이 된다.

세례 요한은 예수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요한복음 1장 15절) 세례 요한은 예수보다 조금 먼저 태어났다. 일부 신학자는 세례 요한을 예수의 스승쯤으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도 세례 요한은 자신보다 늦게 태어난 예수에 대해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고 “나보다 앞서신 분”이라고 했다. 무슨 뜻일까. 세례 요한은 겉으로 보이는 예수를 말한 게 아니다. 예수의 내면에 있는 ‘예수의 주인공’을 가리킨 것이다.

페리 선박을 타고 에게해를 가로질러 파토모스 섬에 도착하면 사도 요한의 자취가 느껴진다.

페리 선박을 타고 에게해를 가로질러 파토모스 섬에 도착하면 사도 요한의 자취가 느껴진다.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다는 말은 우주가 생기기 전부터 있었다는 뜻이다. “나보다 앞서신 분”은 우주보다 앞선 이를 의미한다. 그게 뭘까. ‘빅뱅 이전’을 뜻한다. 사람들은 따진다. “그렇게 두리뭉실하게 말하지 말고 콕 집어서 말하라. ‘빅뱅 이전’이 뭔가? 그게 어디에 있는가? 지금 여기서 직접 내게 보여보라” 그렇게 반박한다.

이제 파트모스 섬은 고급스러운 휴양지로 변모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저택이 있고, 바닷가에는 보트가 늘어서 있다. 푸른 하늘에 갈매기들이 날고 햇볕은 쨍하다. 산 중턱에는 올리브 나무가 자란다. 이 모든 자연이 생겨나기 전, 우주가 태어나기 전, 바로 거기에 “말씀이 있었다”라면서 요한복음은 시작된다. 사도 요한이 말한 ‘태초’는 무엇일까. 그건 과학자들이 말하는 우주의 출발점 빅뱅과 어떻게 다를까. 빅뱅 이전에 정말 뭔가가 있을 수가 있을까. 만약 있다면 우리는 빅뱅 이전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는 그리스어로 ‘en archE(εν αρχη)’다. 영어로 풀면 ‘in the origin’이다. ‘우주의 근원’, ‘우주의 바탕’을 뜻한다. 이는 시간적 개념도 아니고 공간적 개념도 아니다. 오히려 시간과 공간의 바탕에 해당한다. 그런데 ‘태초’를 ‘in the beginning’으로 풀어 시간상의 출발점으로 보면 곤란하다. 그러면 태초에 말씀이 있었나, 아니면 빅뱅이 있었나를 따지게 된다. 그래서 빅뱅 이론과 충돌한다.

산에서 내려다 본 파트모스 섬의 전경. 지금은 아름다운 휴양지이지만 2000년 전에는 흉악범 수용소였다.

산에서 내려다 본 파트모스 섬의 전경. 지금은 아름다운 휴양지이지만 2000년 전에는 흉악범 수용소였다.

사도 요한에 대한 기록이 파트모스 섬에는 남아 있다.

사도 요한에 대한 기록이 파트모스 섬에는 남아 있다.

가령 100m 달리기 코스가 있다고 하자. 과학자들은 빅뱅을 100m 달리기의 출발선으로 본다. 왼쪽 끝의 출발점, 거기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난다. 가스 구름이 생기고, 그 속의 원소 알갱이들이 충돌한다. 그러다 덩어리가 생기고, 덩어리끼리 또 충돌한다. 부서진 조각들이 더 크게 뭉치고, 그게 별이 된다. 별이 별끼리 부딪치고, 부서지고, 다시 뭉치며 더 큰 별이 생겨난다. 그런 별들이 태양이 되고, 목성이 되고, 지구가 되고, 달이 된다. 그렇게 낮과 밤도 생긴다. 과학자들은 이 우주의 출발점을 ‘100m 달리기 코스의 출발선’으로 본다. 이것이 빅뱅이다.

성서에서는 달리 말한다. ‘빅뱅 이전’을 말한다. 100m 달리기 코스의 출발선 이전을 말한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그런 건 없다고 말한다. “빅뱅이 우주의 출발선인데 ‘출발선 이전’이라는 게 어디 있나. 만약 있다면 출발선을 그쪽으로 옮겨야 한다”라고 반박한다. 과학자들은 왜 ‘빅뱅 이전’을 부인할까. 이유가 있다. 과학자들은 100m 달리기 코스의 선상에서 ‘빅뱅 이전’을 찾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간이라는 선 위에서 ‘빅뱅 이전’을 찾고 있다.

그런 식으로는 ‘빅뱅 이전’을 찾을 수 없다. 왜일까. ‘시간’이라는 선은 빅뱅으로 인해 생겨났기 때문이다. ‘빅뱅 이전’에는 그런 선도 없었다. 다시 운동장을 들여다보자. 100m 달리기 코스가 있다. 출발점에 하얗게 선이 그어져 있다. 100m 달리기를 시작하는 곳, 거기가 ‘빅뱅’이다.

우주의 대폭발이 있었고, 그로 인해 무수한 별과 시간과 공간이 펼쳐졌다. 그렇게 우주의 역사가 시작됐다. 10m, 20m, 30m 지점에도 하얀 선이 그어져 있다. 그것이 우주의 역사다. 과학자들은 빅뱅 이후 지금껏 138억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고 한다. 그런 시간의 끝자락에서 인간이 출현했다고 한다. 다시 운동장을 들여다본다. ‘빅뱅 이전’은 어디에 있을까.

파트모스 섬의 아름다운 풍경. 에게해의 바다가 푸르기만 하다.

파트모스 섬의 아름다운 풍경. 에게해의 바다가 푸르기만 하다.

파트모스 섬의 기념품 가게에는 사도 요한에 대한 여러 물건들이 진열돼 있다.

파트모스 섬의 기념품 가게에는 사도 요한에 대한 여러 물건들이 진열돼 있다.

‘빅뱅 이전’은 시간과 공간의 바탕이다. 100m 달리기 코스의 바탕이다. 빅뱅 이후 흘러온 138억 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의 바탕이다. 거기가 어디일까. 다름 아닌 ‘운동장’이다. ‘100m 달리기 코스’의 전체를 품고 있는 바탕이다. 그게 ‘빅뱅 이전’이다. 그러니 ‘빅뱅 이전’은 어디에 있을까. 출발선 속에도 있고, 10m 지점에도 있고, 15m 지점에도 있고, 20m 지점에도 있다. ‘빅뱅 이전’은 모든 시간, 모든 공간에 들어가 있다. 그래서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 없이 계신 분’이다. ‘무소부재(無所不在)’의 하느님이다. 이 모든 창조물의 바탕에 ‘신의 속성’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말한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복음 1장 3절) ‘운동장’으로 풀면 이렇게 된다. ‘모든 달리기 코스가 운동장을 통해 생겨났고, 운동장 없이 생겨난 코스는 하나도 없다.’

그럼 어디일까. 우리가 신을 찾아야 할 곳 말이다. 하느님을 만나야 할 곳 말이다. 그건 출발선이자, 13m 지점이자, 27m 지점이자, 39m 지점이 아닐까. 달리기 코스의 모든 시공간이 아닐까. 그게 어디일까. 다름 아닌 우리의 일상이다. 그곳에 ‘빅뱅 이전’이 있다. 타임머신을 타고 138억 년 전으로 돌아가서 다시 빅뱅의 순간을 거슬러야만 만날 거라 생각했던 요한복음의 ‘태초’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사도 요한이 머물렀던 동굴 위에 세워진 그리스 정교회의 교회. 정교회 수사들이 보인다.

사도 요한이 머물렀던 동굴 위에 세워진 그리스 정교회의 교회. 정교회 수사들이 보인다.

이를 알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우리가 사는 하루는 ‘신비’가 된다. 사도 요한도 그런 신비를 체험하며 살았다. 유배지인 파트모스 섬에서도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나는” 걸 보면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노랗게 되어가는 은행나무는 무엇을 통해서 물드는 걸까. 길가의 코스모스는 무엇을 통해서 피어나는 걸까. 아침 출근길에 마주치는 교통 체증은, 우산도 없는데 느닷없이 쏟아지는 소나기는 어떤 걸까. 이 모두가 그분을 통하여 생겨난다는 걸 깨닫는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의 일상은 신비가 된다. 어마어마한 신비가 된다. 그런 신비 속에서 나의 하루가 피고 진다. 나의 삶이 피고 진다.

그런데 궁금해진다. 왜 철수에게는 ‘신비’가 드러나고, 영희에게는 ‘신비’가 드러나지 않는 걸까. 어째서 누구는 그 신비를 보고, 또 누구는 보지 못하는 걸까. 숫자 ‘0’은 참 오묘하다. 아라비아 숫자라고 하지만 ‘0’의 고향은 사실 인도다. 인도에서 만들어진 숫자가 아랍으로 전해졌고, 아라비아 상인들에 의해 유럽으로 전해졌다. 그래서 유럽 사람들이 ‘아라비아 숫자’라고 불렀다.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에 ‘순야(Sunya)’ 또는 ‘순야타(Sunyata)’란 말이 있다. 기원전부터 사용하던 용어로 ‘빈 채로 있음’, ‘형상이 없음’, ‘만물의 근원’이라는 뜻이다. 인도 수학에서는 이를 ‘0’이라고 표현했다. 인도 수학에서 ‘순야’라는 말은 ‘0’이란 뜻이다. 이것이 중국으로 건너가서 ‘공(空)’ 또는 ‘진공(眞空)’으로 옮겨졌다. 그런데 이 ‘진공’은 묘하게 존재한다. 왜 그럴까. 없이 있기 때문이다. ‘진공묘유(眞空妙有)’다.

그럼 숫자 ‘0’의 진공묘유는 뭘까. ‘0’은 ‘없음’인데, 그 ‘없음’은 어디에 있는 걸까. 그렇다. ‘1’ 속에 있고, ‘2’ 속에 있고, ‘3’ 속에 있고, ‘4’ 속에 있다. 우리 앞에 펼쳐지는 온갖 숫자들 속에, 풍경들 속에, 사람들 속에 ‘0’이 이미 들어가 있다. 그게 어디일까. ‘나의 일상’이다. 그렇게 ‘0’은 이미 ‘1’ 속에 있는데, ‘1’은 ‘0’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빛이 어둠 속에 있는데, 어둠이 빛을 알아차리지 못하듯이.

사도 요한은 12사도 가운데 처형을 당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다. 그는 아흔의 나이, 깊은 눈으로 요한복음을 기록했다.

사도 요한은 12사도 가운데 처형을 당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다. 그는 아흔의 나이, 깊은 눈으로 요한복음을 기록했다.

파트모스 섬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밤하늘은 맑고, 별들은 더 맑았다. 사도 요한은 18개월간 저런 별들을 바라봤으리라. 저 수많은 별마다 ‘0’이 들어 있다. 별뿐만 아니다. 파트모스 섬의 바닷가에도, 몰아치는 파도에도, 무리 지어 앉은 갈매기들 속에도 ‘0’이 들어 있다. 내 안에도, 그리고 당신 안에도 ‘0’이 들어 있다.

산 위의 수도원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그 속에도 ‘0’이 들어 있다. 태초의 신비, ‘빅뱅 이전’이 우리의 일상에 깃들어 있다. 그래서 예수는 말했다. 천국이 너희 안에 있다고. 어둠 속에 빛이 있다고.

〈25회에서 계속됩니다. 매주 토요일 연재〉

짧은 생각

 그리스의 파트모스(밧모) 섬은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큰 배를 타고 에게해를 한참이나 항해하고서야
그 섬에 닿았습니다.

지금은 아주 멋진 섬이었습니다.
유럽에서도 부자들이 이 섬에 별장을 짓고,
요트를 타고, 에게해의 아름다움을 누린다고 하더군요.

2000년 전 사도 요한 당시에는 달랐습니다.
섬 전체가 거대한 감옥이었습니다.
풍랑을 각오해야만 그 섬에 갈 수 있고,
풍랑을 각오해야만 그 섬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파트모스 섬에서 출발해 터키쪽으로 배를 타고 한참을 왔는데,
갑자기 바람이 몰아치고 파도가 거세어졌습니다.
결국 배를 다시 파트모스 섬으로 돌려야 했습니다.
배도 작고 항해술도 허술한 옛날에는 더 위험했을 겁니다.

그러니 사도 요한 당시에는 오죽했을까요.
그때는 온갖 흉악범들을 이 섬에 수용했다고 합니다.
2000년 전에 중범죄 죄수들이 득실거리는 섬,
그 섬에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썼다고 합니다.

요한의 거처는 동굴이었습니다.
상당히 가파른 산비탈 중간에 있는 자연 동굴이었습니다.
흉악범 죄수들로부터 동떨어져 지내려고
일부러 외진 장소에 거처를 정한 것 같더군요.

당시 사도 요한은 아흔 살 정도였다고 합니다.
12사도 중에서 십자가형이나 참수형 등 처형을 당하지 않고,
가장 오래 산 인물이 사도 요한입니다.
예수를 만났을 당시에도
가장 어린 제자가 요한이었습니다.

동굴 안의 바위 벽에는 홈이 파져 있었습니다.
손이 하나 들어갈만한 홈이었습니다.
아흔 살의 요한이 자리에서 혼자 일어설 때
얼마나 힘겨웠을까요.
그때 요한이 손으로 짚고 일어서던 홈이라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의외였습니다.
온갖 흉악범들이 우글거리는 감옥에서 어떻게 요한복음을 썼을까.
그것도 아흔 살의 나이에 말입니다.

동굴 안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거기에는 깊은 고요가 있었습니다.
그제야 알겠더군요.
사도 요한에게 파트모스 섬의 동굴은 일종의 수도원이었습니다.
거기서 아흔 살의 요한이 깊은 영성의 눈으로
하늘의 뜻을 대신 기록한 글이 요한복음이더군요.

생명이 살기 힘든 메마른 광야를
예수가 영성의 공간으로 바꾸었듯이,
사도 요한도 죄수를 가둔 험악한 감옥을
영성의 공간으로 바꾸었습니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구절처럼
어둠 속에는 늘 빛이 있더군요.

다만,
어둠이 빛을 알아차리지 못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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