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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길 대신 샛길로 빠져 와인 한잔, 나그네에겐 생명수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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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0호 28면

와글와글 

‘제주올레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사전답사팀이 제주올레1코스를 둘러보고 있다. 최충일 기자

‘제주올레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사전답사팀이 제주올레1코스를 둘러보고 있다. 최충일 기자

마침표를 찍은 뒤 제주도행 여객기에 몸을 실었다. 몇 달 동안 책을 쓰느라 육체와 영혼의 에너지가 모두 고갈되어 있다고 느꼈을 때 괴테의 시 한 편이 여행 충동을 일으켰다. “당신은 아는가, 저 레몬꽃 피는 나라를? / 그늘진 잎 속에서 금빛 오렌지 빛나고 / 푸른 하늘에선 부드러운 바람 불어오며 / 은매화는 고요히, 월계수는 드높이 서 있는 / 그 나라를 아는가?”

괴테가 알프스산맥 넘어 로마에 체류하던 시절을 그리워하면서 쓴 시로 레몬과 오렌지는 따뜻한 남유럽을 상징한다. 괴테처럼 레몬과 오렌지 나무가 있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었지만, 팬데믹의 여파 때문에 귤나무가 노랗게 익어가던 제주도로 향했다. 나는 렌터카를 빌리지 않고 바다 특유의 갯내음이 물씬 풍겨오는 삶의 현장으로서의 소박한 바닷가에 숙소를 정했다. 관광객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인공적으로 꾸민 곳이 아니라 하루 종일 파도 소리와 새소리, 풀냄새, 동네 사람들의 정겨운 제주도 사투리가 들려오는 동네 골목이었다. 낮에는 어촌 마을 골목과 한적한 바닷가, 그리고 서귀포 ‘작가의 산책길’을 걷다가 지치면 숙소로 돌아와 독서로 휴식을 취하곤 했다. 여행 가방에는 세스 노터봄의 『산티아고 가는 길』을 넣어왔다. 노터봄은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소설가이지만, 저널리즘과 여행을 결합한 훌륭한 여행작가이기도 하다.

“내 인생에는 변치 않는 것이 몇 가지가 있는데, 스페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다. 사실은 사랑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여자와 친 구는 내 곁을 떠났지만 한 나라는 그리 쉽사리 내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산티아고 순례길 중 피니스테레 해안 바위의 신발상. 손민호 기자

산티아고 순례길 중 피니스테레 해안 바위의 신발상. 손민호 기자

550쪽에 이르는 이 책은 제목과 달리 종교적 순례의 여행이 아니라 스페인이라는 나라를 탐구하는 명작이다. 그는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같은 대도시는 물론이고 관광객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지방의 구석구석까지 방문하여 옛 성 같은 곳을 국영호텔로 만든 파라도르, 시골의 허름한 숙소, 더 나아가 수도원에 투숙하며 세상을 등진 채 아직도 고립되어 살면서 똑같은 규칙으로 천년을 견디는 수도사들의 삶을 작가로서 관찰한 뒤 그곳에서 꿀과 빵, 치즈와 포도주까지 선물로 받는다.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의 무대인 메마른 고원 메세타의 땅에 들렸을 때의 기록은 명문 중의 명문이다.

“라만차의 옥수수밭과 포도밭은 가도가도 끝이 없다. 기사들, 작부들, 밀사들, 군인들, 거지들, 수사들, 은행가들, 무어인들, 유대인들, 기독교도들이 모두 이 길들로 다녔다. 역사를 만드는 옷감인 셈이다.”

이 책을 읽는 것은 이번이 세 번째로 읽을 때마다 다른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노터봄의 스페인 여행에서 먹고 마시는 이야기가 빠질 리가 없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독주 ‘아니스’의 명산지인 친촌의 시골 마을식당에서 나오는 메뉴 묘사가 화려하다.

“음식도 이곳에서는 아직 구수한 흙냄새가 난다. 빵과 달걀이 들어간 마늘 수프, 이름하여 ‘소파스 데 아호’가 담긴 둥글넓적한 큰 뚜껑냄비, 양고기구이와 새끼 돼지, 농부들이 즐겨 먹는다는, 달걀에다 볶은 소시지를 큼직큼직하게 썰어 넣은 ‘두엘로스 이 케브란토스’, 토마토와 양파 샐러드, 큼지막한 주전자로 나오는 진한 적포도주, 테라스에서는 밑에서 우리를 올려다보는 경찰관이 마치 무대 위에서 혼자 연기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책의 네덜란드 원제목은 ‘omweg’, ‘우회로’를 뜻한다. 이웃 나라 독일의 번역판도 ‘Umweg’으로 역시 우회와 돌아가는 길을 의미한다. 제주도 올레길에서 만나는 ‘산티아고 가는 길’의 의미는 또 다르다. 많은 이들이 성과 위주의 삶에 지쳐 까미노(Camino)라 부르는 산티아고 길을 걷고 올레길을 걷지만, 자기를 찾는 그 여행길에서도 사실은 효율성과 직진 개념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힘들다. 가는 곳마다 반드시 도장을 받아야 하고 모든 길을 완주하려고 한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왔다지만 우리가 익숙한 것은 직진이고 자기보상이라는 또 다른 욕심이 앞서기 때문일까. 그런 점에서 노터봄의 책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샛길의 유혹’이라는 장에서 작가는 직선이 아닌 곡선, 효율이 아닌 헤맴의 미학을 강조하고 있다.

“나에게 여행은 질러가는 길이 아니라 둘러가는 길이다. 나그네는 옆길로, 시골길로, 큰길에서 샛길로 빠지는 유혹, 지금까지 한 번도 들러본 적이 없는 이름을 가리키는 표지판의 유혹, 오솔길 하나만 난 저 멀리 성채의 윤곽이 주는 유혹, 저 언덕이나 산맥의 맞은 편에서 나그네를 기다릴지도 모를 수려한 장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제발로 일부러 영원한 미로를 만들어간다.”

작가는 ‘하느님도 점심을 먹고 나서는 주무신다는 스페인’을 걷다가 지칠 때면 그 샛길에서 포도주 한잔과 마주한다. 포도주는 여행자의 육체와 정신의 갈증을 해소해 주는 생명수와 같다. 주전자에 담겨 나오는 붉은 포도주와 커다란 빵 덩어리는 전통적이고도 건강한 시골생활을 말한다. 나는 노터봄의 여행법처럼 혼자서 제주도의 시골 마을 골목길을 우회하여 걷고 어촌의 허름한 식당에서 어부들처럼 밥을 먹었다. 직접 잡은 멍게와 뿔소라를 팔던 해녀 할머니, 오후 늦게 떠나 새벽에 들어오던 갈치잡이 어선 선장과 그가 잡은 싱싱한 갈치로 갈치국을 팔던 가족, 언제 닥칠지 모를 풍랑과 무서운 자연재해 앞에서 안전을 기원하는 석상들, 그것이 바닷가의 진짜 삶이었다. 그들은 도시인이 아닌 뱃사람의 다리를 갖고 있었다. 파도와 격랑에 흔들거려도 중심을 잡을 수 있는 탄력성이다. 팬데믹이 길어지고 있는 지금 같은 때에는 도시인의 다리가 아닌 어부들처럼 뱃사람의 다리감각이 필요하다.

몸과 마음이 지쳐 그저 산책만 하겠다고 떠났던 걷기 여행은 뜻밖에도 내게 많은 것을 주었다. 쓰고 싶은 글의 아이디어와 하고 싶은 강연 제안이 물밀듯 몰려왔다. 걷기는 참으로 위대한 치유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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