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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치며 화내고 삿대질…“정치인들 토론 수준 한심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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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0호 06면

낙제점 받은 대선 TV토론

지난 23일 MBC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인 ‘정치인싸’는 생방송 도중 방송사고가 나 최근까지 큰 화제가 됐다. 이날 라디오에 출연한 원희룡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는 상대측 패널로 나온 현근택 변호사(이재명 민주당 후보 캠프 전 대변인)와 토론을 벌였다. 며칠 전 정신과 전문의인 원 후보의 부인이 한 유튜브 채널에서 이재명 후보를 상대로 “소시오패스일 수 있다”고 발언한 것이 이날 문제가 됐다.

공직선거법 위반 등을 이유로 현 변호사가 사과를 요구하자 원 후보는 이를 거부하면서 토론은 격한 설전으로 이어졌다. 급기야 원 후보는 “협박하는거냐, 법적 조치해라 책임진다니까. 구속시켜라”고 소리치며 화를 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프로그램 진행자와 제작진은 현 변호사에게 잠시 자리를 옮겨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화를 참지 못한 원 후보의 삿대질과 격앙된 반응은 한동안 이어졌다.

이스라엘 토론 공부법 ‘하브루타’  

2019년 2월 미국 전국토론대회 개회식. 참가자들이 한국에서 열린 세계대학생토론대회 소개 영상을 보고 있다. [사진 디베이트코리아]

2019년 2월 미국 전국토론대회 개회식. 참가자들이 한국에서 열린 세계대학생토론대회 소개 영상을 보고 있다. [사진 디베이트코리아]

“원 후보가 시원하게 잘 받아쳤다”는 반응에서부터 “화내고 삿대질하는 것은 토론의 기본이 안 된 것”이라는 엇갈린 반응이 나왔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정치평론가는 “토론은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토론을 듣는 대중에게 누가 더 설득력 있고 논리적으로 다가가느냐가 중요하다”며 “이날의 토론 상황은 최악이었다”고 평했다. 유튜브로 이날 방송을 끝까지 봤다는 한 네티즌은 포털 게시판에 “여든 야든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토론 수준은 정말 한심하다”며 실망감을 표했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펼쳐지는 각 당 후보들의 TV토론회가 세간의 화제다. 최근 진행되고 있는 국민의힘 후보들의 TV토론회는 시청률이 5~10%까지 나오면서 대중의 큰 관심을 끌고 있다. 후보들의 TV토론 자세나 대처 등을 놓고 흥미로운 관전평도 이어진다. 이종훈 정치평론가(정치경영컨설팅 대표컨설턴트)의 후보별 평가를 들어보자.

“윤석열 후보는 준비된 원고 외에는 가급적 언급을 자제하고 피하는 토론전략을 택하고 있다. 준비가 안 된 질문에 대해서는 시간을 끄는 지연전략을 쓰는 것처럼 보일 때가 종종 있는데, 잘 모르는 문제에 대해 엉뚱한 얘기를 하는 것보다는 이게 더 실익이 크다고 보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홍준표 후보는 과거에는 강하고 직설적인 톤과 내용으로 토론하다 실수를 할 때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여유 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상대 후보와 날 선 공방을 벌이기보다는 유연하게 넘기는 토론 방식을 자주 선보인다. 유승민 후보는 토론 초기에는 1위 후보였던 윤석열 후보를 곤란하게 하는 질문으로 집중 공략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했는데 최근 들어서는 정책과 공약에 집중하고 잘 설명함으로써 후보 중에 정책 토론에 가장 능숙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전략을 택했다. 원희룡 후보는 상대 후보를 신랄하게 공격하기보다는 상대의 주장이나 공약에 일면 동조하는 듯하면서도 자신이 디테일에서 더 잘 알고 있다는 비교우위의 토론 방식을 쓴다. 방어적 공세전략도 엿보인다.”

여당 후보로 확정된 이재명 후보에 대해서 이종훈 정치평론가는 “이 후보는 토론 과정에서 항상 직설적이고 최대한 쉽게 풀어서 말하는 장점이 있다”며 “전달력 측면에서 큰 효과를 보고 있다”고 평했다. 하지만 본지가 접촉한 전문가들은 여야 대선 토론회 전반에 후한 평가보다는 낙제점을 주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충분치 않은 토론시간, 사회자의 매끄럽지 못한 진행 방식 등 외적인 요인 탓도 있지만, 역시 후보 개인의 토론 능력과 자세에 문제가 많다는 지적이 주를 이뤘다.

국내에서 토론전문가로 손꼽히는 윤석호 디베이트코리아 대표는 “여야를 막론하고 토론회에서 정책이나 비전에 대한 기대감을 거의 보여주지 못했다”며 “주로 말꼬리 잡기, 자극적 비유와 멘트, 특정 프레임을 통해 상대를 깎아내리는 전략과 장면만 자주 보인다”고 평가했다. 미국 코넬대 출신인 윤 대표는 이 학교에서 디베이트 코치를 맡는 등 한국인 최초의 아이비리그 토론 코치로 활동한 국내 최고 전문가 중 한 사람이다. 윤 대표는 또 “특히 리스닝(듣기) 태도가 전반적으로 좋지 않고, 답변을 회피하거나 동문서답을 하는 등의 모습도 자주 보여 아쉬울 때가 많다”고 덧붙였다. 토론 실력 부족은 비단 정치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인들은 토론 문화에 익숙지 않고 미국 등 서구 선진국들보다 후진적이라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어린 시절부터 짝을 지어 질문하고 토론하는 유대인의 공부법인 ‘하브루타’가 이스라엘을 강대국으로 이끈 비결로 꼽는 전문가도 있다. 반면 한국은 학교 교육에 토론과 질문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박정하 성균관대(의사소통영역) 교수는 “한국인의 태생적 능력 부족이라기보다 그동안 교육 훈련이 부족했던 것”이라며 “일부 대학에서 토론 과목을 필수로 지정하는 등 기회를 확대하고 있지만 여전히 미흡하다”고 했다. 박 교수는 이어 “승자를 가리고 점수를 매기는 토론에만 집중하고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탐구형 토론이 별로 없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윤석호 대표는 “미국에선 중·고교는 물론이고 대학에서도 디베이트나 디스커션을 통한 다양한 평가 방식을 갖고 있고 대외활동에서도 토론 능력은 강조된다”며 “하지만 한국의 교육과정에는 토론 교육은 포함돼 있지 않으며, 이를 통한 평가 방식, 성적 반영 시스템도 없다”고 말했다. 윤 대표에 따르면 미국은 각 고교나 대학에 토론 교육과 훈련을 전담하는 코치와 교수가 있으며 교내 토론팀과 동아리를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또 전국 규모의 디베이트 대회가 활성화돼 있어 여기서 우승하면 그것이 곧 학생 개인의 주요 스펙이 된다. 윤 대표의 얘기를 더 들어보자.

“한국과 달리 미국은 취업과 진학 과정, 입시 등에서 토론 능력이 큰 장점으로 반영된다. 또 미국에선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가 교육 과정에서 중요한 화두다. 토론 문화가 교육 과정에서부터 자연스럽게 형성돼 있다.”

토론은 상대 제압 아닌 대중 설득

배상훈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토론 교육은 세대·지역·이념 갈등을 치유하기 위한 중장기적인 수단이 된다”며 “토론 교육을 일반교사에게만 맡겨둘 것이 아니라 전문적인 토론 교육 방법론을 개발해야 한다”고 했다. 토론을 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우선 독서와 글쓰기를 평소 꾸준히 하라고 조언했다. 다양한 지식을 바탕으로 자기 생각을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토론에서 상대방의 주장에 귀 기울이는 것은 기본으로 강조되는 덕목이다. 이와 관련 박정하 교수는 “상대주장의 문제점이 뭔지 허점과 오류를 잘 짚어내고, 타당한 주장은 인정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 자신의 주장을 펼칠 때는 구체적인 통계나 숫자, 권위자의 말 등 타당한 이유와 근거를 적절히 제시하는 것도 필요하다. 토론의 절차와 규칙을 지키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도 신경 써야 한다. 박 교수는 “주어진 시간에 논점을 이탈하지 않고 쟁점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며 “상대의 발언을 자르거나 감정적·고압적 표현과 태도는 피해야 한다”고 했다.

세련된 케네디, 미 대선 첫 TV토론서 닉슨 압도해 판세 뒤집어

1960년 대선 TV토론에 나온 닉슨과 케네디(오른쪽). [중앙포토]

1960년 대선 TV토론에 나온 닉슨과 케네디(오른쪽). [중앙포토]

미국에서는 흔히 대선 TV토론을 놓고 ‘지상 최대의 정치쇼’라고 부른다. 유권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미 대선 TV토론은 미국의 유권자들 뿐 아니라 전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미국에서 첫 대선 TV토론이 열린 것은 1960년 민주당의 존 F.케네디와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이 후보로 나섰을 때다. 케네디는 매사추세츠 상원의원이었고 닉슨은 현직 부통령이었다. 당시만해도 대중 인지도 면에서는 케네디가 닉슨에 밀리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TV토론은 일거에 두 후보의 판세를 뒤집어 놓았다.

TV토론에 나선 케네디는 시종일관 여유 있게 웃는 모습과 생기 넘치는 표정으로 현안을 논리적으로 설명해 나갔다. 반면 토론 내내 창백한 얼굴을 한 닉슨은 연신 손수건으로 이마에 땀을 훔치는 등 지치고 힘겨운 표정이었다. 젊고 세련된 이미지로 대중에게 어필한 케네디의 압승이었다. 특히 라디오로 두 후보의 목소리만 들었던 이들에 비해 토론을 TV로 시청한 600만여 명의 유권자들 상당수는 케네디의 손을 들어줬다. 토론 과정에서 TV의 특성을 잘 활용한 케네디는 최연소 대통령에 당선됐다. 미국 언론과 정치평론가들은 역대 미 대선 TV토론 중 1988년 네브래스카 토론회를 최고로 꼽는다. 당시 41세의 댄 퀘일 공화당 후보는 자신의 젊은 나이에 대한 진행자의 질문에 “1960년 (43세의)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 가졌던 경험을 나도 갖고 있다”고 재치있게 답했다. 이에 민주당 후보 로이드 벤슨은 “나는 케네디와 일했고, 그를 잘 알고, 그의 친구였다. 그렇지만 당신은 케네디가 아니다”라고 맞받았다.

토론회가 끝난 후 유권자들의 머릿속에 남은 것은 “당신은 케네디가 아니다”라는 벤슨 후보의 한마디였다고 한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마이클 듀카키스의 러닝메이트(부통령 후보)로 나선 벤슨은 듀카키스가 당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 조지 부시의 벽을 넘지 못해 TV토론에서의 인상적 장면을 연출하고도 빛을 보지는 못했다.

TV토론이 유권자들의 표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대선 승패의 향방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2016년 대선 때 공화당 트럼프 후보와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 간 첫 TV 토론회를 시청한 미국민은 사상 최고치인 8천400만 명이나 됐다. 당시 여론조사에서도 앞선 데다 TV토론에서도 클린턴 후보가 더 잘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마지막 승자는 트럼프였다. 당시 미 여론조사 전문업체인 퓨리서치센터가 실시한 선거 후 조사에 따르면 유권자의 10%만이 ‘TV토론 중 또는 그 이후에 마음을 정했다’고 답했다고 한다. 부동층에게 TV토론이 유권자 결정에 유용한 수단이긴 하지만 강력한 양당 정치 체제에서는 TV토론이 항상 대선 승패를 결정짓는 것은 아니라는 한계를 보여줬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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