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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퇴직자들 '소리내 울지 못하는' 시간…이렇게 이겨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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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신성진의 돈의 심리학(106)  

최근 예비은퇴자를 위한 강의를 준비하면서 퇴직자가 겪는 심리적인 어려움이 무엇인지,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 버팀목은 무엇인지, 1차 퇴직 후 긴 노후를 준비해 나갈 때 어떤 마음으로 무엇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되는지 몇 가지 논문을 통해 정리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번 칼럼에서는 논문의 내용을 간단하게 나누면서 한 직장에서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일해 왔던 사람이 비자발적인 퇴직을 경험하고 심리적, 현실적 고통을 극복하면서 알게 된 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은퇴라는 단어를 일에서의 해방, 자유로운 삶으로 인식하는 해외의 모습과 달리 퇴직이 강제적으로 부과되는 ‘비자발적 퇴직’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 중년 남성에게는 새로운 삶의 기회라기보다는 위기와 상실로 다가갑니다. 그리고 원하지 않는 이 사건은 명예퇴직, 희망퇴직 등으로 시기가 점점 더 앞당겨지고 있습니다. ‘예정되어 있던 하지만 갑작스럽고 회피하고 싶은 사건’인 퇴직은 많은 퇴직자에게 정서적인 충격, 당혹스러움, 인지능력의 저하, 우울증과 분노를 일으키는 사건입니다.

퇴직은 삶의 공간을 빼앗고, 삶의 의미를 없애며, 감당하기 힘든 변화를 강요하는 폭력이자 충격으로 다가온다.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면 상실감과 분노로 힘들어하고 좌절한다. [사진 pxhere]

퇴직은 삶의 공간을 빼앗고, 삶의 의미를 없애며, 감당하기 힘든 변화를 강요하는 폭력이자 충격으로 다가온다.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면 상실감과 분노로 힘들어하고 좌절한다. [사진 pxhere]

논문 속에서 등장하는 많은 중년 남성에게 일은 단순한 생계수단이 아니었습니다. 삶의 활력소이자 원동력이고 삶의 규칙을 제공해 주고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해주는 삶, 그 자체였습니다.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역할을 존중받으며 삶의 의미를 부여하던 곳이 바로 ‘일터’였습니다. 그들에게 퇴직은 삶의 공간을 빼앗고, 삶의 의미를 없애고, 감당하기 힘든 변화를 강요하는 폭력이고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아프고 고통스럽지만 냉철한 자기 인식을 통해 잘나갔던 과거에 대한 기억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고 새로운 삶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데, 심리적 어려움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는 퇴직자는 아주 오랫동안 상실감과 분노로 힘들어하고 좌절하는 모습을 반복합니다.

“퇴직 후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 것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가장 많은 퇴직자가 언급한 것은 배우자(가족)와 경제적인 준비였습니다. 비자발적 퇴직 이후 3~6년이 지나면서 저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데, 적응 과정에서 도움이 된 핵심 조건은 배우자의 지원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배우자는 힘들고 낯선 생활에 대한 어려움과 당혹감을 공유하고, 하루 종일 일과를 함께 하는 동반자였습니다. 중요한 의사결정의 조언자이고, 때로는 보호자이자 코치였다고 고백합니다.

“인생의 터닝포인트마다 집사람이 어드바이스를 많이 해 주더라구요”, “다른 사람들은 삼식이라고 놀린다고 하는데, 같이 운동도 하고, 같이 배우면서 잘 지냈죠”, “걱정하지 말라고, 당신은 멋지게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준게 힘이 많이 됐죠.”….

적응에 성공한 사람들은 공통으로 배우자의 응원이 없었더라면, 기다려주고 믿어주지 않았더라면 정말 힘들었을 것이라고, 극복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배우자와 소통이 힘들고 배우자의 지원을 받지 못한 퇴직자는 방황과 좌절의 시간을 좀 더 겪어야 했습니다. 논문은 다양한 측면에서 퇴직 후 행복한 노후를 살아내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요건, 필요한 요소는 ‘원활한 부부 관계’라고 말합니다. 퇴직 후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 두 번째 요소는 ‘경제적 준비’입니다. 퇴직하면 당연히 경제적인 어려움에 봉착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산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일정 수준의 현금흐름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부동산으로 수십억 자산이 있더라도 현금 흐름이 없으면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합니다.

“일정 수준의 금액이 정기적으로 나올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생활비 걱정이 되면 마음 편하게 준비하는 시간을 가지기는 어렵지”, “남자들은 지갑에서 나오는 힘이 있는데, 그게 없으면 위축되고 숨게 되고”, “잘 나가던 사람들이 모임에 더 안 나와. 예전처럼 못 쓰니까”….

새로운 삶을 계획하고 만들어가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배움’이다. 자기 인식의 시간을 가지고 자신이 정말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찾아봐야한다. [사진 pixnio]

새로운 삶을 계획하고 만들어가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배움’이다. 자기 인식의 시간을 가지고 자신이 정말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찾아봐야한다. [사진 pixnio]

퇴직자에게 중요한 두 가지를 이렇게 표현해도 될 것 같습니다. 두 가지다 사실 만만찮습니다. 일터에서 하루 종일 보내다가 갑자기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된 아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도 쉽지 않고, 퇴직을 대비해 현금 흐름을 준비하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두 요소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니 은퇴 전인 분들은 배우자와의 대화부터 시도하고, 자산 중심에서 현금 흐름 중심으로 바꾸려는 시도가 필요해 보입니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적응에 성공한 은퇴자들의 공통점은 배움과 일입니다. 퇴직 직후 겪는 심리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그리고 새로운 삶을 계획하고 만들어가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배움’입니다. 배우자와 함께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에 참여해 그동안 모르고 있던 세상의 변화를 배울 수 있고, 퇴직자를 위한 강의를 들으면서 자기 인식의 시간을 가지고 자신이 정말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찾아볼 수도 있습니다. 살아오면서 했던 수많은 일을 되돌아보고 잘한 선택과 바꾸고 싶은 선택을 숙고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때의 원칙을 생각해 보는 계기를 배움 속에서 가질 수도 있습니다. 심리적인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도, 퇴직 후 일을 찾는 과정에서도 배움은 아주 유용합니다. 다양한 배움 속에서 ‘퇴직 전 가치와 자신에 대한 평가’를 내려놓고 새롭게 가치를 재구조화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일을 찾는 것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배움 과정 또는 배움을 마치고 찾은 일은 더 이상 ‘생계를 위해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닙니다. 가족 부양을 위해 ‘참고 견뎌야 하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원하는 방식으로, 하고 싶을 때까지 하는 것이 목표가 되고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한 노후임을 알게 됩니다. 이때 강력한 유혹은 ‘2~3년 정도의 임시직’을 제안받는 것입니다. 퇴직 전 하던 일과 비슷하고 사회적인 지위나 역할도 크게 다르지 않은 일, 하지만 기간은 아주 짧은 일을 누군가가 제안해 오면 쉽게 흔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짧은 시간이 지난 후 또다시 힘든 시간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선택한 일, 그 일이 사회적으로 그렇게 평가받는 일이 아니더라고 포기하지 않고 한 우물을 팝니다.

은퇴자를 다룬 논문 세편을 살펴보면서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였습니다. 친구들이 하나씩 퇴직했다고 연락이 오고, 명퇴를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하면서 전화를 합니다. 쉽게 적응하는 친구도 있고 힘들어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오늘의 이 글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 땅의 퇴직자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미리 경험한 선배로서 알려주고 싶은 노하우는 사실 우리가 어디선가 들었거나 이미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소리 내 울지도 못하는’ 시간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내고 있는 사람이 들려주는 조언들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퇴직은 ‘예정되어 있는 갑작스러운 사건’입니다. 갑작스럽게 당하지 말고 예정된 일로 맞이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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