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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지에 몰린 나찰수 윤석열이 귀제갈 김종인을 삼고초려하다

중앙일보

입력

이정재의 정치풍자 무협판타지 대권무림

대권무림.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대권무림.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제7화〉 비오불서 비인불조(非梧不棲 非人不助)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고, 인물이 아니면 돕지 않는다

#털보가 재명공자를 돕다

늦가을 청와궐엔 어둠이 빠르다. 유시(酉時=오후 5~7시)의 석양이 북악(北岳)을 비출 무렵, 시커먼 전동마차 한 대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궐문을 지키던 수호병은 두말없이 문을 열어준다. 익숙한 동작이다. 대체 뉘길래 천하의 무림지존 거처를 한차례 검문도 없이 통과한단 말인가. 마차 문이 열리자 내리는 사내 하나. 궐내의 깔끔한 계단석에 어울리지 않는 봉두난발이다. 사내는 익숙한 듯 걸음을 옮긴다. 시종장이 웃으며 맞는다.

"어서 오시게, 지존께서 진작 기다리고 계시네."
"어이쿠. 오늘도 고생이 많으십니다. 껄껄껄."

쇳소리가 섞인 기괴한 웃음. 강호 잡사에 참견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만사무불참견, 봉두난염(蓬頭亂髥) 털보 김어준이 아닌가.

"오늘은 또 어떤 맛 난 요리가 나올까, 은근 기대되는 거 있죠. ㅋㅋㅋ"

귀를 거슬리는 예의 쇳소리 같은 웃음이 청와궐 석양의 틈새를 뚫고 퍼졌다.

"어서 오시게. 그래 오늘의 얘기부터 들어보세."

무림지존 재인군이 자리를 청하며 털보를 재촉했다. 벌써 몇 달째인가. 혼술이 늘어가던 재인군이 털보 김어준을 저녁 자리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 어느덧 재인군에게 털보와의 저녁 식사는 정례 행사가 됐다. 이제는 혼술·혼밥보다 털보와 대작하는 날이 더 많을 정도였다.

"반푼 재명공자를 청와궐로 부르신 것은, 시와 때와 장소가 다 좋았습니다. 역시 천하의 지낭(智囊). 재인군 다우십니다."
"자네는 늘 내 얼굴에 금칠을 하는군." 싫지 않은 미소로 재인군이 화답했다.

"원래 금빛이 번쩍번쩍하시는 용안(龍顔)에 제가 따로 금칠을 왜 하겠습니까. 저는 사실만 말씀드릴 뿐입니다."
"금칠 솜씨도 나날이 발전하네 그려. 그나저나 지난번엔 좀 과하지 않았나 싶네." 재인군이 돌연 정색하며 말했다.

"재명공자를 지지하라고 공개 방송한 것 말씀이신가요?"
"그렇네. 아무리 재명공자에게 여권 무림의 미래가 있다고 자네에게 언질을 줬지만, 그리 과해서야 되레 역효과가 날까 걱정일세."

털보 김어준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아니 이게 무슨 호랑이 풀 뜯어 먹는 소리람. 지난 저녁 자리에서 '재명공자가 화천대유 괘에 걸려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심히 걱정이라. 이러다 차기 지존좌를 뺏길 수도 있네. 자네가 도와줄 수 없겠나' 이러면서 내 손을 꼭 쥐었던 건 뭐고.
그 간절한 눈길에 내가 홀딱 넘어가 방송인의 본분을 잊고 "재명공자 지지"를 외쳤건만, 그 바람에 야권무림과 한성시장에게 거친 공격을 받고 있건만, 잘했다고 칭찬은 못 해줄 망정 질타를 해?

"ㅋㅋㅋ.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제가 누굽니까. 천하의 털보 김어준입니다. 제 무공 타인조종초식의 위력을 잘 아시잖습니까. 제 초식에 당한 이들은 제가 하는 말을 무조건 믿고 따릅니다. 콩을 팥이라 해도, 팥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믿습니다. 믿고 맡겨주십시오. 제가 반드시 지존의 명을 받들어 재명공자를 차기 지존좌에 앉혀 놓겠습니다. 걱정은 붙들어 매십시오."

"내 자네의 무공 실력과 무림을 보는 눈매를 어찌 안 믿겠나. 그러나 만사불여튼튼, 만분의 일의 사태에도 대비가 필요하다는 뜻일세."

아하~. 그 뜻이었군. 지존의 계략이 본래 꼬리 아홉 달리 여우 뺨친다더니, 명불허전이군.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재명공자의 낙마에 대비한 플랜B도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러니 지나치게 재명공자에 올인하지 말라?"

재인군은 가타부타 대답 없이 딴청부리듯 말했다.

"무슨 일이든 플랜B는 필요한 법 아니겠나. 이런 중대한 일에 플랜B가 없어서야 되겠나. 혹여 때가 되면 이를 테니 잘 준비하시게. 자네도 익히 알고 짐작하는 인물, 그 사람일세. 내 이미 적당한 사람을 골라 말을 전해둔 터일세. 그나저나~"

재인군이 털보의 대답도 듣지 않고 혼잣말처럼 화제를 돌렸다.

"나찰수 윤석열이 심술(心術)도사 홍준표를 이겨낼 수 있을까"

유 시종장이 그런 재인군을 이상하다는 듯 힐끗 쳐다봤다. 기이한 일이야. 어째서 평소 낯가리기로 유명한 재인군이 유독 저 털보 앞에선 저리 수다스러운 사내가 되는가. 쯧쯧쯧.

#귀제갈이 나찰수를 돕다

"귀공은 이런 말 들어보셨는가. 봉황은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고, 선비는 인물이 아니면 돕지 않는다(鳳翶翔于千仞兮 非梧不棲. 士伏處于一方兮 非人不助.)"

귀제갈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제갈량도 울고 간다고 해서 귀신같은 제갈, 귀제갈로 불리는 이름 김종인. 스승 앞 학생처럼 거구의 덩치를 잔뜩 웅크리며 듣고 있던 나찰수가 황급히 대답했다.

"예, 압니다. 거 뭐…. 유비가 삼고초려했을 때 제갈량의 동생 제갈근이 부른 노래 아닙니까. 봉황은 하늘 높이 날 되 오로지 오동나무에만 앉고, 선비는 숨어서 지내되 천하의 영웅이 아니면 돕지 않는다는."

귀제갈의 눈빛이 반짝했다. 호~. 제법일세. 문자 속을 다 알고.

"더 말할 것 없소. 딱 세 가지, 세 가지면 되오."

"경청하겠습니다."

"내가 이 나이 먹고 귀공이 부탁한다고 달랑 귀공 진영에 들어가는 건 안 되겠소. 경선 비무가 끝날 때까지 좀 지켜보십시다, 그게 첫째요. 둘째, 귀공 주변의 날 파리 떼를 몽땅 치워주시게. 그자들과는 같이 일할 수 없소. 셋째, 앞으론 모든 의사결정을 나와 협의 후에 한다고 다짐하시게. 이 세 가지만 들어주면 내 귀공을 위해 미력한 힘이나마 전력을 다해 도우리다."

"이를 말씀입니까. 그리하겠습니다. 우선 이번 경선 비무부터 이겨야 합니다. 부디 비공(秘功)을 전해주십시오."

나찰수 윤석열은 속으로 으드득 이를 갈았다. 귀제갈의 뜻은 분명했다. 예비 후보로는 안 된다. 경선 비무에서 내가 이긴 다음에야 제대로 도와주겠다, 이 말이렸다. 언제부터 이 자가 저리 오만해졌나. 그러나 어쩔 수 없다. 내겐 이 자의 지모가 절실하다. 지금의 난국을 헤쳐갈 입과 머리를 가진 자는 귀제갈, 이 자뿐이다. 진작 이 자를 영입하지 못한 것은 큰 실수였다. 지금 내겐 다른 선택지가 없다.

귀제갈은 내심 흐뭇했다. 불과 석 달 전 저자, 나찰수 윤석열은 얼마나 기고만장했던가. 내게 도움을 청하기는커녕, 인사도 오지 않았다. 듣자니 주변의 날파리떼들이 "귀제갈의 도움을 받으면 안 된다, 아예 상왕 노릇을 하려 할 거다"라며 말렸다지. 그 뒤 마지못해 찾아왔을 때도 내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국힘당에 합류하지 말고 먼저 독자 세력을 키우라고 조언했지만 콧방귀도 뀌지 않았지. 결과가 뭔가. 심술도사와의 승부도 승리를 자신하지 못하게 된 것 아닌가. 이제야 위급함을 깨닫고 내 앞에 조아렸으니, 이럴 때 확실히 쐐기를 박아놔야 할 것이야. 그가 돌연 시구 하나를 읊조렸다.

羅刹豪氣蓋天下(나찰호기개천하)
나찰수의 호탕한 기백은 천하를 덮었지만

競選相持枉歎嗟(경선상지왕탄차)
경선 비무에서 오래 대치하다 헛되니 기가 막히네

若使諸葛謀見用(약사제갈모견용)
만약 귀제갈의 계책을 채택했더라면

山河豈得屬洪家(산하기득속홍가)
중원 산하가 어찌 홍가의 것이 되었겠는가

시구의 뜻은 분명했다. 나찰수 윤석열이 귀제갈 김종인의 조언을 거부하다가 심술도사 홍준표에게도 패하게 됐다. 그러니 이제라도 내게 매달려라. 나찰수의 얼굴이 불그락푸르락 달아올랐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지금은 이 자, 귀제갈이 유일한 탈출구다.

"이를 말씀이겠습니까. 내 노사의 가르침을 기필코 따르리라."

귀제갈이 그제야 빙긋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상을 좀 볼 줄 압니다. 귀공의 상을 보건데 7척 장신에 허리는 보통 사람의 두배, 사악(四卾=이마, 턱, 양 관골)은 높고 미목(眉目=눈썹과 눈)이 분명한데다 귀는 희고 늘어졌으며 걸을 때는 호랑이 같고 목소리는 우렁차고 맑으니 타고난 백호의 상이라, 고양이상의 심술도사는 물론 살쾡이상의 재명공자를 능히 물리치고 대업을 이룰 것이요."

그제서야 나찰수의 표정이 환해졌다.

"자, 그럼 이만 돌아가시오. 보는 눈이 많으니 조심하시오. 내 귀공의 뜻과 정성을 충분히 알았으니, 이젠 그리 자주 오실 필요 없소."

그제서야 자리를 뜨는 나찰수. 나찰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귀제갈은 아내를 돌아봤다. 만뇌파파 김미경. 만 사람의 계략을 한 몸에 지녀 귀제갈마저 절절맨다는 바로 그녀다.

"야권무림의 최종 비무는 아무래도 나찰수가 유리한 것 같소. 심술도사는 당심을 못 얻었소. 많은 국힘당 고수들이 당주(黨主)시절 심술도사의 횡포를 잊지 못하고 있고, 심술도사는 그들의 마음을 풀어줄 능력이 없소. 나찰수가 최근 강호인의 신망을 크게 잃어 위태위태하나, 결국은 그가 이길 것으로 보오. 나는 그를 앞세워 내 뜻을 이루려 하오."

만뇌파파가 고개를 끄떡끄떡했다. 아내의 승락이 떨어졌다. 이젠 거칠 게 없다.

"이번엔 기필코 이루리라. 무림 내각제. 절대유일권력의 지존좌를 없애고, 무림의원들이 연합 통치하는 새 무림을 만드리라. 나찰수를 도구 삼아 내 필생의 대업을 이루리라."

늙은 호랑이 귀제갈의 포효가 강호를 쩌렁쩌렁 울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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