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김호동의 실크로드에 길을 묻다

절세가인 왕소군, 국가 희생양인가? 스스로 선택인가?

중앙일보

입력 2021.10.29 00:33

업데이트 2021.10.29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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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전쟁과 눈물의 비단길

내몽골자치구 후허하오터 외곽에 있는 왕소군의 묘(청총) 앞에 세워진 동상. 흉노의 호한야선우와 왕소군이 나란히 말을 타고 가는 장면이다. 동상 왼쪽 뒤로 청총이 보인다. 박정호 기자

내몽골자치구 후허하오터 외곽에 있는 왕소군의 묘(청총) 앞에 세워진 동상. 흉노의 호한야선우와 왕소군이 나란히 말을 타고 가는 장면이다. 동상 왼쪽 뒤로 청총이 보인다. 박정호 기자

실크로드는 흔히 다양한 문명이 만나고 교류하는 현장이자 통로로 인식돼왔다. 물론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적 현실의 일면에 불과할 뿐이다. 실크로드는 동서 문명이 충돌하고, 전쟁과 살육이 벌어지며, 애꿎게 희생된 사람들의 눈물로 얼룩진 곳이기도 하다. 당나라 현장 법사가 인도를 다녀온 뒤 불경 원전을 번역하여 동아시아 불전이 확고히 자리 잡던 바로 그 시기에, 당과 돌궐 사이에 벌어진 끊임없는 전쟁으로 변경 지역은 황폐해졌다.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서 17년간 체류한 것을 토대로 유럽에 동방의 사정을 알렸을 때도 몽골의 세계 정복이 남긴 상처는 아직 치유되지 않은 상태였다.

왕소군의 묘(청총) 앞에 세워진 동상 아래에는 ‘화친(和親)’이라는 한자와 몽골어가 새겨져 있다. 박정호 기자

왕소군의 묘(청총) 앞에 세워진 동상 아래에는 ‘화친(和親)’이라는 한자와 몽골어가 새겨져 있다. 박정호 기자

실크로드의 역사에서 명과 암이 혼재하고 공존했던 예는 수없이 많다. 예를 들어 중국의 왕조들이 북방 유목국가의 군사적 위협을 완화하기 위해 ‘화친(和親)’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의 조약을 맺었는데, 그러한 미명 하에 본인 의지와는 무관하게 적국으로 시집을 가야 했던 여인들의 삶이 그러하다. 문제는 그들의 비극이 단지 개인적인 아픔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역사적·문명사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흉노 군주에 시집간 한나라 궁녀
수많은 묵객이 노래한 애달픈 삶

북방 유목민과 화친 위해 보내져
한시 명구 ‘춘래불사춘’의 주인공

오늘날 중국선 “식견 높았다” 칭송
‘단일한 중화민족’ 이미지로 이용

시선 이백 “내일 아침이면 오랑캐의 첩”

청총 묘역 안에 있는 왕소군 조각상. 박정호 기자

청총 묘역 안에 있는 왕소군 조각상. 박정호 기자

역사상 북방 초원의 군주에게 시집 보내진 여인은 수없이 많지만,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아마 한나라 때 흉노로 건너간 왕소군(王昭君)일 것이다. 그녀의 ‘빼어난 미모’-왕소군은 서시·초선·양귀비와 함께 중국 ‘4대 미인’의 하나로 꼽힌다-도 비운의 삶에 더욱 극적인 효과를 높여주고 있다. 그녀는 수많은 시인 묵객이 즐겨 찾는 소재가 됐다. 중국의 역대 시문을 모아 놓은 인터넷 사이트를 검색해 보니, 그녀를 주제로 삼은 시만 1200편을 넘는다.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중국의 시인들이 노래한 왕소군의 모습은 어떠한 것일까. 그 많은 작품을 다 읽어보지 않았으니 뭐라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세간에 알려진 시들을 통해 그녀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러한 ‘이미지’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는 점이다. 즉 고국에서 버림받은 비극의 주인공 왕소군도 있지만, 오랑캐의 땅에서 새 삶을 찾은 왕소군도 있고, 그런가 하면 두 나라를 화목하게 하는 데 공을 세운 왕소군도 있다.

이백

이백

먼저 비극의 여인 왕소군을 보도록 하자. ‘시선(詩仙)’으로 유명한 당나라 이백(李白)은 이렇게 노래했다. ‘왕소군이 옥(玉) 안장을 떨치고, 말에 오르니 붉은 뺨에 흐르는 눈물. 오늘은 한나라 궁인이지만, 내일 아침이면 오랑캐 땅의 첩이 되리라.’ 여기서는 ‘오랑캐의 땅’으로 끌려가는 한 여인의 슬픔이 짙게 배어 나온다.

그보다 약간 앞선 시기에 활동했던 동방규(東方虬)라는 시인 역시 ‘소군의 원망(昭君怨)’이라는 시를 지었다. ‘오랑캐 땅에는 꽃도 풀도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라고 읊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소군이 이처럼 오랑캐에게 시집가게 된 것은 집안이 가난해서 황궁의 화공(畵工)에게 돈을 주지 못했고, 그래서 못생긴 얼굴로 그려져 황제의 눈에 들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스토리가 언제부턴가 널리 퍼져 있었다. 심지어 후대에 가면 이를 소재로 한 ‘한궁추(漢宮秋)’라는 유명한 희곡이 나오기도 했다.

이런 애달픈 이야기가 왕소군의 비극성을 한층 높이는 효과가 발휘했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한·당 두 왕조는 북방의 흉노와 돌궐이라는 유목민들의 군사적 위협을 모면하기 위해 수많은 비단과 곡식과 물자, 거기에 종실의 여자까지 보내면서 ‘화친’을 맺었다. 그런 의미에서 왕소군의 첫 번째 이미지는 중국의 애처로운 처지를 그녀의 삶에 투영함으로써 정치적으로는 자기 위안을 주고, 예술적으로는 비극적 카타르시스 효과를 내게 됐다.

송나라 왕안석 “오랑캐의 은혜 깊어라”

왕소군(일명 명비)가 출새(出塞), 즉 한나라 국경을 넘어서 흉노 땅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그린 ‘명비출새도(明妃出塞圖·일부)’. [사진 오사카시립미술관]

왕소군(일명 명비)가 출새(出塞), 즉 한나라 국경을 넘어서 흉노 땅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그린 ‘명비출새도(明妃出塞圖·일부)’. [사진 오사카시립미술관]

두 번째 이미지는 송대 정치가였던 왕안석(王安石·1021~86)이 지은 ‘명비의 노래(明妃曲)’에 잘 드러나 있다. 진(晉)나라 때 소(昭)라는 이름을 가진 황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 글자를 피해서 그녀는 ‘명비(明妃)’라고도 불리웠다.

왕안석은 오랑캐 땅에서 생활하는 소군을 기억하며 ‘한나라의 은혜는 실로 얕지만 오랑캐의 은혜는 깊어라. 인생의 즐거움은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는 데에 있다네. 가련하도다, 청총(靑冢)은 이미 잡초로 뒤덮였지만, 슬픈 비파 소리 지금도 남아 있네’라고 묘사했다,

왕안석

왕안석

여기서 충격적인 것은 바로 ‘한나라의 은혜는 실로 얕지만, 오랑캐의 은혜는 깊다(漢恩自淺胡恩深)’라는 구절이다. 송나라 대신 왕안석의 입에서 왕소군은 한나라에 버림받았지만 오랑캐에게는 오히려 은혜를 입었다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이 구절은 그 당시에도 문제가 돼 격렬한 비판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런 주장을 했을까.

왕안석이 이 시를 쓴 것은 1059년이고, 그는 바로 전 해인 1058년 인종(仁宗)에게 유명한 상소를 올린다. ‘상인종황제언사서(上仁宗皇帝言事書)’다. 당시 송나라는 북방의 요(거란), 서방의 서하(탕구트)의 위협에 직면했다. 극도로 어려운 처지여서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로부터 10년 뒤 ‘신법(新法)’을 시행해 유명해진 왕안석은 인재 발탁이 가장 먼저 필요한 조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유능한 인재들이 송나라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적국으로 넘어가 중용된다면 어찌 되겠는가. 왕안석은 당시 사정을 한나라 왕소군의 일화에 의탁해서 비판한 것이다. 시 말미의 ‘슬픈 비파 소리 지금까지도 남아 있구나(尙有哀弦留至今)’라는 표현은 그것이 한나라 때가 아니라 바로 지금의 일이라는 암시를 던지고 있다. 이것이 왕소군의 두 번째 이미지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지금 내몽골자치구 수도인 후허하오터(呼和浩特)에 가면 왕소군의 묘지 청총이 있는데, 그 앞에는 두 남녀가 다정하게 말을 타고 가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왕소군과 흉노의 군주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의 모습이다. 그리고 왕소군 묘지 앞에는 중국 공산당 창당 멤버이자 부주석을 지낸 동필무(董必武)가 지은 시구가 비석에 새겨졌다. ‘이미 천 년 전에 살던 소군, 호한화친(胡漢和親)의 식견은 높았도다.’

왕소군이 ‘화친’의 명목을 위해 시집간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자신의 ‘식견’에서 나온 일은 당연히 아니었다. 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한족과 나머지 55개의 소수민족이 함께 모여 ‘단일한 중화민족’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하는 신중국의 입장에서 왕소군에게 이러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 조금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시대·입장 따라 달라지는 역사 해석

지금까지 다룬 세 가지 이미지 가운데 어느 것이 왕소군의 실제 삶의 모습에 가장 근접한 것일까. 문학 작품이 아니라 역사서에는 어떻게 기록돼 있을까. 『후한서』라는 사서가 힌트를 제공한다.

왕소군은 원래 양가의 자녀로 태어났는데 나이 열아홉에 궁녀가 됐다. 여러 해 동안 황제를 만날 기회를 얻지 못하던 차에, 마침 흉노의 군주 호한야에게 시집 보낼 궁녀를 물색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가겠다고 자원하고 나섰다. 그때 왕소군을 처음 본 황제는 미모에 놀라 보내지 않기를 바랐지만, 흉노에 대한 신의 때문에 그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초원에 자리 잡은 왕소군은 호한야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하나 낳았고, 황후에 버금가는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남편이 사망한 뒤 흉노의 풍습에 따라 정처(正妻)의 큰아들에게 재가를 하도록 요구받았다. 그녀는 한나라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고국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청했지만 거부당했고, 재가한 뒤에는 10년간 같이 살면서 두 명의 딸을 더 낳았다. 마침내 서른다섯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왕소군에 대한 사서의 기록은 풍부하지 않다. 위에서 열거한 세 가지 이미지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잘 부합하는지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다. 다만 그 어느 것도 그녀의 삶을 온전히 대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 이와 비슷하다.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은 후대인의 주관적인 입장과 의도에 따라 달리 이해·해석되고, 그런 해석이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에 대해서 ‘과연 그랬을까?’하며 질문할 필요가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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