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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푹 빠진 한국의 맛, 김치] 산 넘으면 절임 농도, 강 건너면 젓갈 종류 달라져…자연이 만들어 낸 오묘한 '김치의 경계' 아시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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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권역으로 본 '대한민국 김치 지형도'
산으로 둘러싸인 산간 지역과 바다가 넓게 펼쳐진 해안 지역은 생활양식뿐만 아니라 음식도 많이 다르다. 문화의 구분에 있어 공간성이 그만큼 중요한 요소다. 한국의 김치 또한 지형에 따라 각양각색의 맛과 멋이 담긴 수백여 종의 김치로 분화해왔다. 편의상 김치의 종류를 행정 구역에 따라 전라도 김치, 경상도 김치 등으로 구분한다.

하지만 행정구역은 관리의 편의에 따라 인위적으로 구분한 것이다 보니 산·들·하천과 같이 재료 조달에 영향을 주는 지형 조건을 비롯해 바람·기압·연평균기온 등 저장성에 영향을 주는 환경적 요소를 반영하지 못한다. 특히 젓갈의 종류와 다소, 양념과 간의 세기, 부재료의 종류 등은 같은 김치임에도 지역에 따라 큰 차이를 만들어내는 핵심이다. 재료 산지와의 물리적 접근성과 저장환경의 제약을 받기 때문이다.

또한 남쪽지역은 기온이 높기 때문에 발효를 지연시키기 위해 간이 세고, 재료 대비 양념의 비율이 북쪽보다 높은 편이다. 큰 산맥으로 연결된 산줄기는 지역 김치문화의 이동을 막는 지형지물이면서 경계가 됐고, 산과 강줄기는 김치 재료 및 상품을 사고, 팔고, 만드는 사람의 이동을 도와주는 교통로 역할을 해왔다. 또한 김치 제조법이 인적 교류나 전승으로 전해져 왔기 때문에 김치에는 유기체적인 문화 전파의 움직임이 나타난다. 따라서 김치의 문화적 동질성을 반영한 구분이 필요하다. 이러한 자연 경계와 그에 따른 재료의 이동 가능 거리에 따라 김치의 맛과 형태는 사뭇 달라졌는데, 크게 4개 권역으로 묶어 볼 수 있다.


한강·금강 일대 젓갈 활용한 고급김치 발달척박한 충청 내륙산지는 담백한 ‘짠지’담가

서해안·내륙 문화권

서해안·내륙 문화권

서해안·내륙 문화권은 서울을 포함한 경기·호서·영서 지역을 아우르는 문화권이다. 이 문화권은 크게 하나로 설명하지만 한강 유역의 서울, 경기, 영서 북부 내륙 지역과 금강 유역의 호서 해안 지역, 그리고 영서 남부 내륙 지역으로 더 세밀하게 구분되며 그에 따라 다른 김치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서해와 한강·금강 유역에 위치해 곡물과 해산물이 풍족하게 유통됐던 서울, 경기, 충청도 해안 지역의 경우는 서해안에서 잡은 새우 및 흰 살 생선으로 만든 젓갈이 금강·한강 줄기를 따라 운송돼 유사한 젓갈 문화권을 형성했다. 주로 조기젓·새우젓을 김치에 활용했고 밴댕이젓도 사용됐다.

 김장철이 되면 한강과 금강 포구 일대가 젓갈을 실어 나르는 배와 장사치들로 성시를 이뤘다. 남해안과 서해안에서 잡은 각종 해산물도 같은 경로를 통해 유통되면서 조선시대 이래 행정·경제·문화의 중심이었던 서울 경기지역에 물자가 집중될 수 있었고, 자연히 통배추와 해산물을 풍부하게 넣은 섞박지·보쌈김치와 같은 고급김치가 발달했다.

 같은 충청이라도 해안지역과 달리 내륙지역에는 젓갈과 해산물이 유통되지 않고 척박한 산지가 대부분이어서 김치의 재료가 귀했다. 땅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식량작물을 재배해야 했기 때문에 젓갈과 해물은 물론이고 파·마늘·생강·고추도 쉽게 얻을 수 없어 양념의 비율이 낮다. 충청 내륙에선 무나 배추에 소금과 고추씨를 많이 넣어 칼칼하고 담백한 맛의 김치를 만들었는데, 지역 사람들은 이 김치를 짠지라고 불렀다. 그래서 충청도 내륙에 거주하는 어르신들은 아직도 짠지를 김치의 동의어로 사용한다.

 산세가 더 험한 강원 산간에선 민들레·질경이·더덕 등 산에서 쉽게 캘 수 있는 산야초를 이용한 김치가 발달했다. 고춧가루 대신 제피나 산초의 껍질을 넣어 칼칼한 맛을 내고 동시에 저장성도 높였다. 기온이 낮고 옹기도 흔하지 않아 김치를 땅에 묻는 대신 통이 빈 나무 독에 넣어두고 꺼내 먹었다.

황석어 등 어종 다양해 진한 젓갈 맛이 특징고구마 줄기, 고들빼기 … 지역 특산물도 활용

서남해안·평야 문화권

서남해안·평야 문화권

서남해안·평야 문화권은 호남 지역과 영산강·섬진강 유역에 속하며, 소백산맥의 서쪽 지역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수온이 높은 서남해안에서 잡힌 지방 함량이 높은 멸치와 갈치는 물론이고, 새우·조기·황석어 등 다양한 어종으로 만든 젓갈들이 영산강·섬진강 줄기를 따라 운반해 유통됐기 때문에 각 가정의 형편과 기호에 따라 진한 젓갈로 담근 독특한 남도 김치문화를 형성했다.

 형편이 넉넉한 집에선 젓갈을 담근 후 3년 정도 숙성시켜 투명한 노란색으로 말갛게 뜬 상등 액젓을 김치에 사용했고, 그렇지 못한 경우는 그해 봄에 담근 젓갈을 써야 했다. 살이 채 뭉그러지지 않아 젓갈 양도 부족했기 때문에 물을 붓고 달여서 거른 액젓으로 김치를 담갔다. 지금은 대한민국 김치의 기본 재료가 돼버린 찹쌀풀도 넓은 평야에서 곡물이 넉넉히 조달됐던 전라도 지역 김치 제조법으로부터 확산한 것이다.

 드넓은 땅과 바다, 풍부한 일조량 덕분에 식재료가 다양하고 풍성해서 일찍이 맛에 대한 관심이 높아 음식문화가 발달한 편이라 다른 지역에서 사용하지 않는 특이 재료를 이용한 별미김치도 많다. 고구마 줄기, 생강 싹, 고들빼기 등 채소의 줄기·싹·뿌리를 활용하기도 하고, 유자·석류 등 따뜻한 남해지역에서 자라는 특산물이 김치의 재료로 쓰이기도 했다. 해안가와 섬의 김치는 젓갈과 더불어 신선한 해산물을 통으로 사용하기도 하며 감태· 파래와 같은 해조류로 김치를 담그기도 한다.

 다른 지역보다 연평균 기온이 높아 오래 두고 먹기 위한 방법으로 젓갈·고춧가루 등의 양념을 많이 사용해 맵고 짠 편이지만 배·감 등 과일과 찹쌀죽 덕분에 단맛이 보완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감칠맛을 잘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김칫국물 양이 많으면 잘 쉬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해 양념의 비율이 높다.

 한편 김치의 순우리말인 ‘지히’의 어형이 그대로 살아있는 지역도 전라도다. 현재 ‘지’는 대부분  섞박지·짠지·싱건지와 같이 ‘~지’의 형태로 종속어미로만 쓰이고 있는데, 유독 전라도에선 김치를 단독으로 ‘지’라고 칭하고 있다. 전라도가 미식가뿐만 아니라 김치를 언어학적으로 연구하는 이도 관심을 가져야 할 지역인 이유다.

태백산맥 경계로 중부 내륙, 동서로 갈려어종 풍부해 무 이용한 식해문화로 유명

동해안·해양 문화권

동해안·해양 문화권

동해안·해양 문화권은 태백산맥의 동쪽인 영동 지역과 영남 지역에서 낙동강 유역의 영향을 덜 받는 동해안 지역 전체를 포함한다. 이 문화권은 태백산맥이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중부 내륙 지역과 동서로 분리돼 있다.

 동해안은 사계절에 걸쳐 한류와 난류가 교차해 명태·청어·대구·오징어 등의 어종이 풍부하고, 배추보다 무를 이용한 식해문화가 발달한 지역이다.

식해는 해산물에 소금과 좁쌀 등의 곡물을 넣어 발효시킨 것을 말하는데, 발효가 잘 일어나도록 엿기름을 추가하기도 한다. 생선을 삭힐 때 좁쌀과 엿기름을 넣는 것은 찹쌀풀을 김치에 넣어 유산균의 발효를 돕는 것과 같은 이치이며 가자미식해·명태식해 등이 대표적이다.

 젓갈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까닭에 김치를 담글 때도 오징어·명태·대구와 같은 해산물이 젓갈을 대신했다. 식해에 분해효소 역할을 하는 무가 들어가다 보니 대구깍두기·서거리지와 같이 깍두기와 식해의 경계를 넘나드는 특이한 형태의 김치가 발달했다.

 명태·대구와 같은 생선의 경우, 살은 국이나 반찬의 재료로 활용하고 버려지는 아가미나 내장이 김치의 재료가 됐다. 강원도에선 생선 아가미를 ‘서거리’라고 하는데, 이 부레 부분은 살아있는 동안 온갖 불순물이 잘 끼기 때문에 소금을 뿌려 팍팍 치대면서 깨끗이 잘 씻어내야 잡맛이 나지 않는다. 아가미에는 내장까지 붙어있어야 하며, 씻은 부레를 부채 모양으로 벌려 갈기갈기 찢어서 엿기름·소금·양념과 함께 보관해 두었다가 김치 담글 때 넣는다.

 밭에서 자란 푸성귀보다 해물이 더 흔하다 보니 채소보다 해산물의 비중이 높은 김치도 많다. 도루묵에 미나리와 무를 조금 넣어 김치 소에 버무린 도루묵김치, 열무에 해우(멍게의 강원도 사투리)를 넣고 담근 해우열무김치 등이 해당된다.

더운 날씨 탓에 마늘·젓갈 양념 많이 사용고춧가루 귀해 제피열매 대신 갈아 넣기도

동남해안·산간 문화권

동남해안·산간 문화권

남해안·산간 문화권은 낙동강 유역과 태백산맥·소백산맥으로 나눠진 경계 아래의 영남 북부 산간 지역에 해당한다. 이 지역은 한반도의 남부 산간 지역으로, 분지가 많아 날씨가 덥고 따뜻한 기후로 인해 김치를 담글 때 마늘·고춧가루·소금·젓갈을 많이 넣는데, 맵고 짠맛이 있어 자극적이다. 농지가 많지 않아 김치의 재료로 쓸 채소류를 따로 재배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배추김치보다 양념을 적게 넣은 짠지에 가까운 무김치가 월등히 많은데 중부지역에서 무말랭이라고 부르는 골곰짠지, 무 오그락지 등 무김치 형태의 김치가 그런 유형에 해당한다.

 자투리땅을 활용해 키울 수 있는 채소나 콩잎·깻잎과 같은 부산물을 최대한 활용한 김치도 발달했다. 산간지역에선 찹쌀은 고사하고 멥쌀도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밀가루풀이나 국수 삶은 물, 보리밥을 찹쌀풀 대신 사용하기도 했고, 밥을 지을 때 보글보글 끓어 올라오는 밥물을 떠서 김치를 담그기도 했다.

 더운 기후 때문에 소금 농도는 높은데, 단맛을 제공해주는 배 같은 과일이나 곡물죽은 많이 사용하지 못하다 보니 짠맛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것도 특징이다. 다른 부재료가 넉넉지 않다 보니 상대적으로 고추·마늘·소금의 비중이 높아 김치 맛이 짜고 강하게 느껴진다. 고춧가루가 넉넉하지 않은 산간지역에선 산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제피열매를 갈아 넣는 것이 당연한 제조법으로 여겨지기도 했는데, 고춧가루가 한반도에 들어오기 전 김치를 만드는 방식과 흡사하다.

 젓갈은 남해안에서 구할 수 있는 멸치젓이나 갈치속젓을 주로 사용하는데, 지방 함량이 높은 어종이기 때문에 강한 맛이 난다. 서남해안 지역과 마찬가지로 연평균 기온이 높아 김치의 발효를 늦추기 위해 국물을 적게 만든다.

중앙일보·세계김치연구소 공동기획

중앙일보·세계김치연구소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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