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은 이는 정치·인생 역정을 함께한 전두환 전 대통령이 아닌 그의 부인 이순자 여사였다. 노 전 대통령이 별세한 지 3일째인 28일 이 여사는 지팡이를 짚고 부축을 받으며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찾았다. 조문 후 “5·18 유족에게 사과할 생각은 없는가” “유족과 무슨 대화를 나눴는가” 등 취재진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이날 오후 빈소에 도착한 이 여사는 노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여사, 아들 노재헌 동아시아문화센터 이사장 등과 10여 분간 대화를 나눴다. 노태우 정부에서 청와대 총무수석비서관을 지낸 임재길 전 수석은 기자들과 만나 “이 여사께선 ‘전 전 대통령이 건강이 좋지 않아서 함께 못 왔다, 죄송하다’고 말씀하셨다”며 “영부인(김 여사)과는 오랫동안 같이 여러 가지 일을 하셨기 때문에 옛날이야기를 하시고 건강 이야기를 나누셨다”고 전했다. “두 분에게는 (남편이) 군 생활할 때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 전 대통령은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을 진단받고 치료 중이다.
김 여사는 이날 오전 11시40분쯤 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부축을 받으며 빈소에 왔다. 김 여사는 이날 이 여사를 비롯한 정·재계 인사의 조문을 직접 받으며 4시간 30분가량 빈소를 지킨 뒤 입관식을 마치고 자리를 떴다. 노 전 대통령의 입관식은 유족들만 참석한 가운데 천주교식으로 진행됐다. 2006년 병상의 노 전 대통령에게 세례를 했던 꽃동네 설립자 오웅진 신부가 마지막 기도를 했다.
이날 조문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 김영삼민주센터 상임이사는 “김 전 대통령과 더불어 정치 발전과 민주화 이행에 결정적 역할을 하신 분”이라며 “87년 체제도 6·29선언의 결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고, 1990년 3당 합당 등 온건 군부세력의 대표인 노 전 대통령과 온건 민주화세력 김 전 대통령 두 분의 대타협이 없었다면 민주화 이행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더 이상 용서받지 못하는 대통령이 나오지 않길 바란다”는 내용의 방명록을 남겼다.
홍석현 중앙홀딩스 회장, 전경련 회장을 맡고 있는 허창수 GS그룹 회장, 한국무역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구자열 LS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 김장환 목사 등의 조문도 이어졌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 정운찬 전 국무총리,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도 빈소를 찾았다.
특히 이날은 외교계 인사들이 고인의 외교 업적을 기리는 장면이 잦았다.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는 “한·중 수교와 대만 단교를 결단한 업적은 지금도 양국 국민에게 의의를 갖고 있다”며 “대사가 된 후 한·중 수교일을 즈음해 찾아뵙고 ‘우물 마시는 사람은 우물 판 분 잊지 않는다’고 했더니 (공감하는) 느낌이 있었다”고 전했다. 노 전 대통령은 1992년 한·중 수교를 이뤄냈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과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도 빈소를 찾아 애도를 표했다.
서울대병원 빈소는 30일까지 운영된다. 유족 측은 장지로 파주 통일동산 내 후보지를 살펴본 뒤 행정안전부와 논의를 거쳐 세부 위치를 결정할 예정이다. 후보지로는 노 전 대통령이 생전 조성했던 파주 동화경모공원 등이 거론된다. 묘지 조성 전까지는 파주 사찰인 검단사에 임시 안치할 예정이다.
한편 행안부는 28일 노 전 대통령 국가장 장례위원회(위원장 김부겸 국무총리) 구성을 마쳤다고 밝혔다. 코로나19 방역 상황을 고려해 총 353명의 장례위원으로 구성됐다. 2015년 김영삼 전 대통령 국가장 장례위원회(2222명)의 6분의 1 규모다.
이날 오전 9시부터는 서울시청 앞 광장에 시민들이 조문할 수 있는 분향소도 차려졌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첫 조문객으로 분향소를 찾아 방명록에 “평안히 영면하소서”라는 글을 남겼다.
영전에 바치는 질경이 꽃 하나의 의미
남들이 고인의 영전에
국화 한송이 바칠 때에
용서하세요. 질경이 꽃 하나
캐다 올리겠나이다.
하필 마찻길 바퀴자국난
굳은 땅 골라서 뿌리내리고
꽃 피운다하여 차화(車花)라고도
부르는 잡초입니다.
독재와 독선, 역사의
두 수레바퀴가 지나간 자국 밑에서
어렵게 피어난 질긴
질경이 꽃 모습을 그려봅니다.
남들이 서쪽으로 난
편하고 따듯한 길 찾아 다닐 때
북녘 차거운 바람 미끄러운
얼음 위에 오솔길 내시고
남들이 색깔이 다른 차일을
치고 잔칫상을 벌일 때
보통 사람과 함께
손 잡고 가자고 사릿문 여시고
남들이 부국강병에 골몰하여
버려 둔 황야에
세든 문화의 집 따로
한 채 만들어 세우시고
이제 정상의 영욕을
역사의 길목에 묻고 가셨습니다.
어느 맑게 개인날 망각에서
깨어난 질경이 꽃 하나
남들이 모르는 참용기의 뜻,
참아라 용서하라 기다려라
낮은 음자리표 바람소리로
전하고 갈 것입니다.
-2021년 10월 28일 이어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