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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대신 노태우 빈소 찾은 이순자, “5·18 사과” 질문엔 침묵

중앙일보

입력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은 이는 정치·인생 역정을 함께 한 전두환 전 대통령이 아닌 그의 부인 이순자 여사였다. 노 전 대통령이 별세한 지 3일 째인 28일 이 여사는 지팡이를 짚고 부축을 받으며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진 빈소를 찾았다. 조문 후 “5ㆍ18 유족에게 사과할 생각은 없는가”, “유족과 무슨 대화를 나눴는가” 등 취재진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굳어진 표정으로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황급히 자리를 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 여사가 28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 빈소를 찾아 조문을 마친 귀 이동하고 있다. 2021. 10. 27. 사진공동취재단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 여사가 28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 빈소를 찾아 조문을 마친 귀 이동하고 있다. 2021. 10. 27. 사진공동취재단

이날 오후 빈소에 도착한 이 여사는 노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여사, 아들 노재헌 동아시아문화센터 이사장 등과 10여분 간 대화를 나눴다. 노태우 정부에서 청와대 총무수석비서관을 지낸 임재길 전 수석은 기자들과 만나 “이 여사께선 ‘전 전 대통령이 건강이 좋지 않아서 함께 못 왔다, 죄송하다’고 말씀하셨다”며 “영부인(김 여사)과는 오랫동안 같이 여러가지 일을 하셨기 때문에 옛날 이야기를 하시고 건강 이야기를 나누셨다”고 전했다. “두 분에게는 (남편이)군 생활 할 때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노 전 대통령과 전 전 대통령은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로 육사 출신 결사 조직 ‘하나회’를 꾸리고 12ㆍ12 쿠데타를 함께 주도했다. 앞서 전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의 별세 소식을 전해듣고 눈물을 흘렸다고 전 전 대통령 측이 전했다. 현재 사자명예훼손 혐의 등으로 재판이 진행 중인 전 전 대통령은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을 진단받고 투병 중이다.

김옥숙 여사는 이날 오전 11시 40분쯤 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부축을 받으며 빈소에 도착했다. 김 여사는 이날 이 여사를 비롯한 정ㆍ재계 인사들의 조문을 직접 받으며 4시간 30여분 가량 빈소를 지킨 뒤 입관식이 끝난 후 자리를 떴다. 노 전 대통령의 입관식은 유족들만 참석한 가운데 이날 오후 3시부터 1시간에 걸쳐 천주교식으로 진행됐다. 2006년 병상의 노 전 대통령에게 세례를 했던 꽃동네 설립자 오웅진 신부가 마지막 기도를 했다.

故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여사가 28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마련된 빈소에서 입관식을 위해 이동하고 있다.

故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여사가 28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마련된 빈소에서 입관식을 위해 이동하고 있다.

이날 조문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 김영삼민주센터 상임이사는 “김 전 대통령과 더불어 정치발전과 민주화 이행에 결정적 역할을 하신 분”이라고 평가했다. 김 이사는 “87년 체제도 6ㆍ29 선언의 결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고, 1990년 3당 합당 결단 등 온건 군부세력의 대표인 노 전 대통령과 온건 민주화세력 김 전 대통령 두 분의 대타협이 없었다면 민주화 이행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거듭된 사과와 반성을 기억하겠다. 더 이상 용서받지 못하는 대통령이 나오지 않길 바란다”는 내용의 방명록을 남겼다.

윤 원내대표는 전 전 대통령을 겨냥해 “아직도 사죄하지 않는 그분이 계셔서 (노 전 대통령이)온전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했고, "(노 전 대통령과 달리)전 전 대통령에 대한 국가장은 있을 수 없다. (이를 막기 위해)법 개정이 필요하다면 개정하겠다”고 말했다.

유인태 전 국회 사무총장도 “그 친구(전 전 대통령)과 비교가 된다. 노태우 정부 초기 2년 간이 아마 국회의 가장 모범적 협치의 기간이었다”고 말했다.

특히 이날은 외교계 인사들이 고인의 외교업적을 기리는 장면이 잦았다. 싱하이밍 주한중국대사는 “노 전 대통령은 중국의 오랜 친구”라며 “한·중 수교와 대만단교를 결단한 업적은 지금도 양국 국민에게 의의를 갖고 있다. 고인의 업적을 계속 빛나게 하고 양국관계를 보다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대사가 된 후 한·중수교일 즈음해서 찾아뵙고 ‘우물 마시는 사람은 우물 판 분 잊지 않는다’고 했더니 (공감하는)느낌이 있었다”고 전했다. 노 전 대통령은 1992년 한·중수교를 이뤄냈다.

북한에서 영국 주재 공사를 지낸 탈북민인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은 “대한민국의 수많은 대통령 가운데 북한 당국의 정책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도록 설득한 분은 노 전 대통령이 유일무이하다”고 평가했다. 태 의원은 “(노 전 대통령은)중국과 소련을 설득해 김일성이 수십년 간 반대하던 남북한 유엔동시가입을 받아들이도록 했다”며 “북한에 길을 열어주고 체면과 기를 살려줬다. 선견지명이 있는 대통령이었다”고 말했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은 1991년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개정에 대해 “한국이 강력범죄에 대해 기소권을 갖는 등 주권을 되찾아오는 데 상당히 중요한 일을 하셨다”며 “외교지평을 아주 대폭적으로 확대한 분”이라고 평가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주러시아 대사를 지낸 우윤근 전 대사도 “북방정책의 문을 열고 열심히 하신 점을 높게 평가한다”고 말했다.

 홍석현 중앙홀딩스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허창수 GS그룹 회장,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스님, 김장환 목사 등 각계 인사들의 조문이 이날도 이어졌다.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정운찬 전 국무총리, 김형오 전 국회의장 등도 이날 빈소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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