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치밀한 준비 거쳐 빠른 논의가 바람직

중앙일보

입력 2021.10.28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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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전시 작전통제권 이양, 어떻게 할 것인가?

역사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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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이 주한유엔군사령관 겸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이양된 것은 1950년 북한의 남침 직후였다. 1950년 7월 12일 주한미군의 지위를 규정하기 위한 대전협정이 조인되었고, 이틀 후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 사령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국군의 작전통제권 이양에 대한 요청이 있었고, 이를 맥아더가 받아들였다.

전쟁 시기 작전통제권 이양은 당연한 것이었다.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작전권을 일원화해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연합국들이 효율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자 1942년 초 연합참모본부(CCS)가 조직되었으며, 1943년 퀘벡회담에서는 전범국가들과 개별국가들이 단독으로 강화하지 못하도록 할 것을 결정했다.

미국 정책·한국 정치·남북관계가 일치될 때 이양 가능
북한, 전작권 이유로 한국 배제 … 미국과 양자 협의 고집
미·중 갈등 고조되면서 전작권 이양 문제 더 복잡해져
한국군 국방태세 완비가 논의의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

정전협정이 맺어지면서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은 다시 한번 문제가 되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정전협정 후 한국을 중립화하는 방안을 추진할 만큼 주한미군의 감축 또는 완전한 철수를 희망했다. 이 경우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은 한국 정부에 이양되어야 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정전협정 체결 직전에 있었던 반공포로 석방과 이승만 정부의 북진통일 정책에 주목했다.

반공포로 석방은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었던 유엔군사령관의 승인 없이 한국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한국군이 움직인 결과였다. 미국은 북진통일을 주장했던 한국의 대통령이 유엔군사령관의 승인 없이 북한으로 진격을 명령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 경우 미국이 한국을 도울 수 있는 명분이 없었다. 미국 의회가 승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이 중요했던 이유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한다면 효율적인 작전과 관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할 것이다. 한국전쟁이 ‘종전’이 아니라 적대행위를 일시 멈추는 ‘정전’으로 마무리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의 가서명을 하고도 1954년 11월 17일 한미합의의사록이 조인된 이후에 가서야 그 효력이 발효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북한으로부터의 남침을 막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남쪽으로부터의 군사행동을 막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1968년 안보위기를 전후하여 한미 간에 갈등을 빚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북한은 한국군의 베트남 추가 파병을 막기 위해 도발 횟수를 늘렸고, 한국군은 이에 대응하여 북한에 대한 보복 공격을 실시했다. 미국 정부는 이러한 위기가 자칫 제2의 한국전쟁으로 전환될 경우 두 개의 전쟁을 동시에 수행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누가 먼저 전쟁을 일으켰는지를 판단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될 수 있다고 인식했다. 1968년 2월 청와대에서 있었던 박정희 대통령과 밴스 특사와의 만남은 한국군의 보복공격을 둘러싼 한미 간 갈등의 정점을 찍었다.

미국 정부가 한국군의 작전통제권 장악에만 몰두했던 것은 아니다. 닉슨 행정부는 이미 1970년대 초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한국 정부에 이양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해외 군사비의 감축을 위해 주한미지상군의 감축과 철수를 추진했던 닉슨 대통령에게 작전통제권의 이양은 불가피했다. 이 방안은 워터게이트 사건과 남베트남 패망으로 더 이상 논의되지 않았다.

1970년대 이후 작전통제권 이양 논의

1991년 작전통제권 이양을 위한 논의가 다시 재개되었다. 독일의 통일과 소비에트의 몰락으로 탈냉전이 진행되면서 해외주둔 미군의 재배치 작업이 시작되었고, 주한미군의 감축 논의가 재개되었기 때문이었다. 한국과 미국은 주한미군에 있는 전술핵무기의 철수를 합의하였고, 평시작전권의 이양에 합의하였다.

1991년 11월 노태우 대통령은 1995년까지 평시작전통제권을 넘겨받을 것이며, 2000년까지 전시작전통제권도 이양받을 것이라 밝혔다. 그 후속조치로 1994년 12월 1일 평시작전통제권이 주한미군사령관으로부터 대한민국 정부에 이양되었다. 이에 따라 군사정전위원회의 유엔군 측 대표도 한국군 장성으로 교체되었다.

전시작전권 이양 문제는 북핵문제가 터지면서 클린턴 행정부 시기에는 더 이상 논의가 진행되지 않았지만, 2001년 부시 행정부는 한국군의 전시작전통제권 이양을 위한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2005년 한미 국방장관은 제37차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의에서 전시작전권 이양 협의를 빠르게 진행한다고 합의했고, 2006년 부시대통령은 빠른 시기 안에 전시작전통제권을 한국 정부에 이양할 것을 지시했다.

2009년에는 제41차 한미안보협의회에서 2012년까지 전시작전통제권 이양을 가능하도록 한다는 합의를 이루었다. 그러나 2010년에 가서 전시작전통제권 이양 시기가 2015년으로 한 차례 연기되었으며, 2014년에는 무기한 연기를 결정했다. 작전통제권 이양 시기의 연기는 당시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전통제권 이양의 조건

1978년 이전에는 주한유엔군사령관, 그 이후에는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있었던 한국군의 작전통제권 이양의 과정을 보면 세 가지 중요한 조건을 알 수 있다. 첫째로 미국의 해외군사비 및 해외주둔 미군의 재배치 정책과 깊은 연관을 갖는다. 미 행정부에서 주한미지상군의 규모 및 철수에 대한 논의가 있을 때마다 작전통제권 이양을 위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둘째로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관련된다. 평시작전통제권의 이양은 1987년 한국의 민주화, 그리고 1993년 문민정부 수립 이후에 이루어졌다. 민주화로 인해 더 이상 권위주의 정부가 시민사회의 동의없이 군사작전을 결정할 가능성이 사라진 것이다. 문민정부 하에서 하나회가 해체되면서 군사쿠데타의 가능성이 사라진 것 역시 중요한 조건 중 하나였다.

셋째로 남북관계다. 닉슨 행정부에서 논의가 진행되었던 시기는 남북적십자 회담 및 7·4 공동성명이 나왔던 시기였다. 1990년대 초의 논의는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선언, 그리고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시기와 일치한다. 부시행정부에서의 논의는 6·15 선언과 10·4 공동선언이 나왔던 시기였다.

이러한 조건들을 감안한다면, 작전통제권 이양은 미국의 정책, 한국 사회의 정치적 수준, 그리고 남북관계 등이 모두 일치될 때 가능하다. 물론 이 중에서 제일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미국의 정책이다. 미국의 경제상황이 좋지 않을 경우 주한미군을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울 수 있다. 주한미군이 없다면, 한국군에 대한 작전을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주한미군 주둔비 부담 문제를 강조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물론 최근 미·중 간의 갈등 상황을 고려한다면, 전시작전통제권 이양 문제가 더 복잡한 상황에 마주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작전통제권은 치밀한 준비를 통해 빠른 시기 내에 한국 정부로 이양되어야 한다. 5·16 쿠데타나 광주항쟁에 미국의 책임 문제가 제기된 것은 한국군의 이동에 주한미군사령관의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즉, 한미관계에서 불필요한 오해를 없애기 위해서도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북한과의 협상에서도 필요하다. 북한이 안보문제나 평화협정과 관련된 논의에서 한국 정부를 제외하고 미국과 양자협의를 주장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경제상황이 더 어려워진 미국의 정책이 미래에 어떻게 변화할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전시작전통제권을 둘러싼 논의가 빠르게 진전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한 한국의 국방태세 완비는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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