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안혜리의 시선

만약 그분이 위험한 인물이라면

중앙일보

입력 2021.10.28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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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원희룡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왼쪽)와 이재명측 현근택 변호사가 원 후보 부인인 정신과 전문의 강윤형씨의 "소시오패스"발언을 놓고 세게 붙었다. [사진=MBC 유튜브 캡처]

원희룡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왼쪽)와 이재명측 현근택 변호사가 원 후보 부인인 정신과 전문의 강윤형씨의 "소시오패스"발언을 놓고 세게 붙었다. [사진=MBC 유튜브 캡처]

원희룡측 '소시오패스' 발언 논란
여당, 면허 박탈 운운 입막음 시도
박근혜 정신분석 땐 환호하더니…

"병적인 거짓말쟁이에다 도덕관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고, 전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나르시시스트이고, 상습적인 바람둥이다. "

이미 상당한 권력을 쥔 이 정치인에 대해 이같이 평가한 건 대선 레이스 경쟁자만이 아니었다. 정신과 의사 등 적잖은 전문가들까지 "소시오패스"라는 비슷한 의견을 냈다. 당연히 후폭풍이 있었다. 진료를 직접 보지 않았고, 당사자 허락도 없었는데 정신과 의사가 전문가적 의견을 제시하는 건 '골드워터 규칙'을 위반한 비윤리적 행위라는 비판이 이어졌다. 관련 학회도 골드워터 규칙을 앞세워 '입을 다물라'고 압박했다.

오해 마시길. 2021년 대한민국이 아니라 2017년 미국 얘기다. 하버드대와 예일대 의과대학 교수 등은 이제 막 대통령이 된 트럼프를 직접 진료하지도 않고 "병적인 나르시시스트""소시오패스"라고 불렀다. 심지어 이런 주장을 담은 책『도널드 트럼프라는 위험한 사례』까지 냈다. 우리 눈엔 별거 아닌 윤리 위반으로도 의사 면허를 박탈하는 엄격한 나라가 미국이다. 하지만 『트라우마』의 저자인 주디스 허먼 하버드대 정신의학과 교수와 미국립정신건강연구소(NIMH) 회원인 벤디 리 예일대 교수를 비롯해 이런 분석에 참여한 전문가 중 누구도 의사 면허를 박탈당하지 않았다. 윤리위에 제소돼 징계를 받지도 않았다. 반(反) 공화당 정서가 강한 미 학계 분위기가 일부 작용했을 수는 있지만, 그보다는 경고의 의무인 '타라소프 원칙'이 공인에 대한 진료 없는 진단을 금지하는 골드워터 규칙에 앞선다는 주장에 힘이 실린 덕분이다. 만약 위급한 상황이라면, 가령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이 위험한 징후를 보인다면 골드워터 규칙을 어기고 대중에게 알리는 의무가 더 윤리적이라는 주장 말이다. 소련 비밀경찰이 반정부 인사를 마구 정신병원에 감금했던 과거처럼 정신의학이 정치에 이용당해선 안되겠지만, 거꾸로 경보를 울려야 할 상황을 목격하고서도 입을 다무는 것 역시 비윤리적 행위라는 지적이다.
다시 돌아와, 이번엔 2021년 한국 얘기다. 원희룡 국민의힘 대선 예비 후보의 부인이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강윤형씨가 최근 한 언론 인터뷰에서 여당 이재명 대선 후보를 놓고 "소시오패스 경향이 있다"고 언급해 논란이다. 의사 출신인 신현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변인은 "의사로서 지켜야 할 규범을 내던진 막말 내조"라고 비난했다. 정신과 의사이기에 앞서 정치적 이해관계가 분명한 당사자라는 점에서 강씨 발언이 사려 깊지 못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재명 후보 측 현근택 변호사가 원 후보와 마주한 라디오 생방송에서 "학회 제명"을 운운하고, 이재명 후보로부터 경기관광공사 사장으로 내정됐던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씨가 "의사면허 취소"를 주장하는 걸 보면서 이번 사태의 본질은 의사의 직업윤리와 거리가 먼 입막음용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혹여 내 편에 불리한 말을 할 전문가의 발언을 아예 차단하려는 노림수 말이다.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로 유명한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은 지난 2005년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를 "부성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전형적인 인물"로 진단한 책을 썼고, 박근혜 정부 때인 2015년에도 "박 대통령은 세월호 유가족을 가소롭게 본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트라우마가 치유되지 않았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 후유증"이라고 진단한 책을 한 번 더 썼다. 정 박사가 박 전 대통령을 직접 진료한 적은 물론 없다. 그럼에도 언론 인터뷰에서 이런 주장을 반복해도 정치권, 언론, 심지어 학회조차 골드워터 규칙을 내세워 의료 윤리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면밀한 검사를 통해 정신 질환 여부를 가려내는 게 아니라 관찰 가능한 행동을 통해 대중에게 의견을 제시했을 뿐이어서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리 소란스러운가. 그 시절과 달리 어마어마한 SNS와 유튜브 동영상 자료 덕분에 직접 진료 없이도 오히려 더 정확히 볼 수 있게 됐는데 전문가의 단순한 견해 표명조차 차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니 그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질문이 하나 남는다. 만약 유력 권력자의 정신 상태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면? 직접 진료한 의사는 비밀 유지 지침 탓에 공개할 수 없고 진료 안 본 의사는 골드워터 룰 탓에 위험을 경고조차 할 수 없다. 이런 아이러니를 깨기 위해서라도 이참에 대선 후보들이 정신 감정 결과를 스스로 공개하는 건 어떨까. 정신 질환 있다고 정치적 활동을 배제하자는 게 아니다. 링컨은 우울증, 처철은 양극성 장애를 앓았지만 통치에 문제없었다. 다만 국가는 물론 국민을 불안하게 만드는 위험 인물은 어떻게든 좀 걸렀으면 하는 바람이다. 불가능하겠지만.
*맨 위 발언은 2016년 예비선거 당시 테드 크루즈가 했다.

골드워터 규칙 vs. 타라소프 원칙
1964년 팩트 매거진이 대선에서 린든 존슨과 겨루던 배리 골드워터(아래 사진)를 진단해달라고 정신의학자 1000여 명에게 설문 조사를 의뢰했다. 기사는 설문을 토대로 '골드워터가 대통령직을 수행하기에 부적절한 정신 질환을 앓고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 골드워터는 선거에서 졌고, 이후 편집장을 고소해 7만5000달러를 배상받았다. 그리고 미국정신과학회(APA)는 1973년 제정한 의료 윤리 원칙에 정신과 의사나 심리학자가 직접 감정하지 않은 공인의 정신 건강과 관련한 전문적 의견을 공개적으로 표명하면 윤리 위반이라는 조항을 포함했다.

하지만 미국 트럼프 대통령 당선을 계기로 골드워터 규칙 대신 '경고의 의무'를 주장하는 전문가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런 주장의 근거엔 타라소프 판결이 있다. 1969년 살인범이 정신과 의사와 상담하며 "타라소프를 죽이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런데도 의사는 환자와의 비밀 유지 의무를 들어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타라소프는 결국 살해됐다. 피해자 부모는 의사를 상대로 소송을 했고, 1976년 법원은 개인의 질환이 타인에게 심각한 위해를 입힐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그 위험을 알려주거나 상응하는 보호 조치를 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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