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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춧잎 투표지와 선거 민주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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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방현 기자 중앙일보 내셔널부장
김방현 대전총국장

김방현 대전총국장

지난 1일 청주지법에서 예정됐던 청주 상당구 지역구 투표지 재검표가 사실상 무산됐다. 재검표는 4·15총선에 출마했던 윤갑근 전 국민의힘 충북도당위원장이 선거무효 소송을 제기함에 따른 절차였다. 투표용지 QR코드 전산 조작과 사전투표 부정의혹 등이 소송 이유였다. 윤 전 위원장은 민주당 후보에게 3025표 차이로 졌다. 충북선관위에 따르면 대법원은 재검표 기일을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를 동시에 치르는 내년 3월 9일 이후로 미뤘다. 청주 상당구는 당선자가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지난 8월 당선 무효가 됨에 따라 재선거를 치른다.

당초 이곳 재검표는 지난 8월 10일 하기로 했다. 그런데 코로나19 확산 차단을 이유로 10월 1일로 변경했다. 그러더니 또다시 연기했다. 윤 전 위원장은 최근 소송을 취하했다. 윤 전 위원장 측은 “재검표 기약이 없는데 소송을 끌어봐야 얻을 게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그가 제기한 선거무효 소송은 당선무효와 상관없다. 당락을 떠나 투·개표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는지 살펴보는 게 목적이다. 그래서 대법원의 재검표 연기 사유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인천지법에서 진행된 인천연수을 지역구 재검표 결과 나온 투표지가 접착제(원 안)로 붙어있다. [사진 클린선거시민행동]

인천지법에서 진행된 인천연수을 지역구 재검표 결과 나온 투표지가 접착제(원 안)로 붙어있다. [사진 클린선거시민행동]

4·15 총선 이후 선거(당선)무효 소송은 120여 건이나 된다. 대부분 “선관위가 위법행위를 했다”라거나 “투표지 분류기 오류 등으로 당선자가 뒤바뀌었으니 확인해달라”는 것이다. 선거가 1년 6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재검표를 한 곳은 인천 연수을 등 딱 3곳이다. 이미 국회의원 임기는 절반 가까이 지났다. 공직선거법 제225조에 따르면 대법원 단심으로 진행되는 선거 소송은 접수한 지 6개월 이내에 선고해야 한다.

더 이상한 것은 재검표한 선거구에서 나온 투표지다. 시민단체가 인천지검에 제출한 고발장에 따르면 인천 연수을에서는 지역구 투표지와 비례 투표지가 중첩 인쇄된 ‘배춧잎 투표지’와 여러 장이 본드(접착제)로 붙어 있는 투표지 등이 다수 발견됐다. 대부분 잉크젯 프린터로 출력하는 사전선거 투표지였다. 경남 양산을 등 다른 재검표 지역구 2곳에서도 이상한 투표지가 나왔다.

재검표 참관인이었던 40년 경력의 인쇄업체 대표는 “잉크젯 프린터로 출력했는데 용지가 중첩된 상태로 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중앙선관위는 “투표사무원 부주의로 겹쳐 인쇄된 것으로 추정되며, 개표 후 투표지를 묶는 과정에서 접착제가 묻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민주주의 시스템은 선거로 유지된다. 선거의 핵심은 공정하고 투명한 투·개표 절차다. 그런데 요즘 투·개표 시스템을 믿지 못하겠다는 국민이 늘고 있다. 내 표가 제대로 집계되는지 의심하고 있다. 지지부진한 재검표와 다수의 이상한 투표지는 불신에 기름을 부었다. 어쩌면 표를 세는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시대가 온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