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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종전선언 입장 “순서·시기·조건, 한국과 다를 수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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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종전선언에 대해 “한국과 계속 협의한다”는 원론적 입장만 유지하던 미국이 순서·시기·조건 등 세 가지 요소를 특정해 한국과 이견이 있을 수 있다고 시사했다. 임기 말 총력전에 나선 문재인 정부의 ‘종전선언 만능주의’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드러낸 셈이다.

제이크 설리번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지난 26일(현지시간) 언론 브리핑에서 중앙일보 기자로부터 “미국의 대북정책에 있어 종전선언을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자 “각각의 단계에 대한 정확한 순서(sequencing)·시기(timing)·조건(condition)에 대해 한국과 다소 이견이 있을 수 있다”며 “다만 (한·미 간) 핵심적인 전략적 구상은 근본적으로 일치한다”고 말했다.

미국 내에서 유엔사령부와 주한미군의 지위 변경 등 종전선언의 파급력에 대한 우려가 표출된다는 중앙일보 보도(10월 26일자 6면)가 나오자 안은주 외교부 부대변인은 “종전선언은 신뢰 구축을 위한 정치적·상징적 조치로 현 정전체제의 법적·구조적 변화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설명했으나, 설리번 보좌관의 발언은 결이 달랐다.

설리번 보좌관이 한·미 간 의견이 다를 수 있다고 특정한 세 가지 요소는 모든 협상에서 핵심이다. ▶누가·무엇을 먼저 할 것인가(순서) ▶언제 할 것인가(시기) ▶무엇을 대가로 할 것인가(조건) 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미국 종전선언 3원칙 … 비핵화 먼저, 뒤탈 없게, 제재 그대로

설리번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26일 종전선언에 대해 브리핑하고 있다. [연합뉴스]

설리번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26일 종전선언에 대해 브리핑하고 있다. [연합뉴스]

설리번 보좌관이 언급한 ‘순서’는 종전선언과 북한의 비핵화 조치 간 선후관계에 해당할 수 있다. 미국은 종전선언 논의가 처음 시작된 조지 W 부시 행정부 때부터 북한의 비핵화 조치 전에 종전선언부터 하자는 한국의 제안을 수용하지 않으려 했다. 종전선언은 북한의 진정성 있는 비핵화 조치가 선행되거나 최소한 담보됐을 때 가능하다는 게 미국의 입장이다.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 조치와 그에 비례하는 미국의 상응 조치를 하나의 ‘패키지’로 묶는 접근을 해왔는데, 그 패키지 안에서도 누가 먼저, 어떤 조치를 할 것인지는 마지막까지 신경전이 벌어지는 부분이다.

실제 2018년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간 싱가포르 북·미 합의도 결국 순서가 문제가 됐다. 4개 항으로 구성된 싱가포르 합의는 1항에 ‘새로운 북·미 관계 수립’, 3항에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규정하고 있다. 북한은 이에 따라 북·미 관계 회복부터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미국은 비핵화가 먼저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북·미 협상은 교착됐다.

한국 제재 완화 거론에 미국은 반대 확고

설리번 보좌관이 두 번째로 언급한 ‘시기’는 문재인 정부가 임기 말 종전선언을 서두르고 있다는 점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정부는 내년 2월 베이징 겨울올림픽을 전후로 남·북·미·중 종전선언이 성사되기를 바라는 분위기다. 지난달부터 외교·안보 라인 각급에서 대미 설득전에 나선 것도 베이징 올림픽 개막이 채 100일도 남지 않았다는 시간적 촉박함과 연결된다.

동시에 정부는 미국과 협의한 뒤 “종전선언이 북한과 대화를 시작하기 위한 계기로 상당히 유용하다는 데 한·미의 공감대가 있다”(지난 19일 미 워싱턴, 정부 고위 당국자), “미국도 진지하다”(이수혁 주미 대사, 13일 미 워싱턴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 등 논의의 긍정적 측면을 부각해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다. 정작 미국은 “계속 협의한다”는 원론적 입장만 표명하는데도 말이다. 일각에선 내년 3월 대선 등 국내 정치적 요소를 의식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반면에 미국은 종전선언이 초래할 수 있는 의도치 않은 부작용은 없는지 법률 검토를 철저히 하는 게 우선이라는 입장이다. 한 외교 소식통은 “현재 한국의 종전선언에는 유효기간이 있지만, 사실 미국은 그렇지 않다. 한국이 원하는 시간표에 맞춰 미국이 검토를 끝내고 명확한 입장을 표명할지는 미지수”라고 전했다.

종전선언을 비핵화 프로세스의 초반부에 둘지, 후반부에 둘지도 민감한 문제다. 정부는 종전선언과 관련해 ‘비핵화 입구론’을 펴고 있다. 프로세스 초반에 비핵화 협의를 추동하는 데 유용한 조치라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초반부에 종전선언을 해버린 뒤 비핵화 조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경우 부정적 효과를 우려하는 분위기가 짙은 게 사실이다.

마지막 요소인 ‘조건’은 말 그대로 ‘종전선언을 무엇과 바꿀 것이냐’와 관련된다. 현재 북·미는 모두 종전선언에 대해 ‘내가 받는 게 아닌, 상대에게 주는 선물’처럼 인식하고 있다. 국립외교원장을 지낸 김준형 한동대 교수는 “2018년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서 종전선언이 거론됐을 때와 마찬가지로 현재도 미국 내 강경파를 중심으로 종전선언을 북한에 대한 미국의 양보 조치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통일외교안보 특보를 지낸 문정인 세종연구소 이사장은 지난 26일 환황해포럼 토론회에서 “남북이 종전선언을 하고 북·미가 대화하려면 북한이 원하는 것도 줘야 한다”며 유엔 대북제재 완화 등을 거론했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도 지난 20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북한이 대화에 응한다면 제재 완화도 충분히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설리번 보좌관이 한·미 간 이견이 있는 부분으로 ‘조건’을 든 것도 이런 한국 내 분위기를 염두에 둔 것일 수 있다. 조 바이든 행정부는 조건 없는 대화에 열려 있지만, 북한의 의미 있는 변화 없이 제재 완화는 안 된다는 입장이 확고하기 때문이다.

김정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미국 국가안보회의(NSC)의 책임자가 이처럼 명확히 이야기한 것은 협의 과정에서 이견이 있다는 뜻이며, 한국에 대한 견제의 의미도 있어 보인다”며 “특히 ‘조건’은 미국이 가장 우려하는 부분으로, 종전선언 이후 유엔사의 법적 지위 등에 대해 북·중이 문제를 제기할 경우 미국의 장기적인 전략 구상까지 흐트러질 수 있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문 대통령, 아세안+3서 종전선언 지지 당부

문 대통령은 27일 화상으로 열린 아세안+3 정상회의에 참석해 종전선언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를 당부했다. 종전선언을 통해 한반도에 화해와 협력의 질서를 만들겠다는 의지도 표명했다. 사실상 임기 말 핵심 과제로 종전선언 드라이브를 이어가겠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도 이날 러시아 모스코바에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과 회담을 갖고 한반도 종전선언에 대한 지지와 협력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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