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사설

전환기 이끈 ‘보통 사람’ 노태우의 리더십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노태우 전 대통령

노태우 전 대통령

민주화 요구 수용 … 6·29선언 승부수

북방 외교는 혜안, 쿠데타·비자금 오점

노태우 제13대 대통령이 어제 별세했다. 대통령 중 드문 연성(軟性) 리더십의 소유자였던 고인은 국내적으론 박정희·전두환 대통령의 권위주의 통치를 지나 명실상부한 민주화 시대로 나아가는, 세계사적으론 냉전체제가 무너져 내리는 전환기에 선 대통령이었다.

고인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선 반세기를 함께한 전두환 전 대통령을 빼놓을 수 없다. 육사 11기 동기인 두 사람은 사조직인 ‘하나회’ 세력의 핵심으로 12·12 군사쿠데타를 주도했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 진압했다. 고인은 전두환 정권의 2인자로 대통령 후보에까지 올랐다.

1987년 6·29선언이 고인에겐 변곡점이 됐다. 민주화 요구를 수용해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을 약속했다. 전 전 대통령의 의도였다곤 하나 고인이 수용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승부수였다. 그해 말 대선에서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을 제치고 36.7%의 득표로 당선됐다. 이듬해 총선에선 여소야대의 국회까지 만들어졌다. 정치·사회·경제 각 분야에서 분출하는 거센 민주화 요구까지 맞물리면서 ‘1노 3김의 시대’로 불릴 정도로 권력은 분산됐다. 과거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고인은 순응했다.

둘도 없는 친구인 전 전 대통령을 백담사로 보냈고, 3김과 협의해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을 발표한 것도 이 무렵이다. 입법 주도권도 국회로 넘어갔다. 고인이 ‘물 대통령’으로 불린 까닭이다. 고인은 외려 “물 한 방울 한 방울이 모여 큰 바다를 이루는 과정을 보면 물의 힘은 참 크다. ‘물 대통령’이란 별명 참 잘 지어주었다고 생각한다”고 넘겼다.

재임 중 88년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는 한국의 달라진 위상을 세계에 널리 알린 상징적 사건이었다. 공산권 붕괴란 세계사적 변화를 놓치지 않고 북방 외교를 펼친 점은 단연 고인의 혜안이었다. 소련(러시아)·중국 등 공산국가들과 처음으로 국교를 맺었으며 북한과 유엔에 동시 가입했다. 91년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란 진전도 있었다. 사실상 ‘섬’이었던 한국을 세계와 연결했다.

경제 분야에선 경부고속전철 건설이나 영종도 공항 건설 등 대대적인 사회간접자본 투자와 함께 주택 200만 호 건설이 있었다. 하지만 흑자 경제를 물려받아 적자 경제를 넘겼다는 비판도 나온다. 더불어 대통령 재직 시 수천억원을 부정 축재했다는 사실은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았다. 정치적으로도 민주정의당(노태우)·통일민주당(김영삼)·신민주공화당(김종필)의 3당 합당을 통해 사실상 호남 배제를 낳았다는 점에서 논란을 불러왔다.

고인의 집권기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한 역사가는 “선악의 사고를 넘어서야 넓은 영역이 보인다”고 했다. 고인의 공과(功過)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야 그 시대를 이해할 수 있고, 그 시대로부터 배울 수 있다. ‘보통 사람’이길 원했던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