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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팀 믿고 ‘한ㆍ중 수교 대국적 타결하라’ 지원…盧 아니었다면 역사 바뀌었을 것” [노태우 별세]

중앙일보

입력

한ㆍ중 수교 당시 실무교섭대표를 맡아 중국과의 협상을 이끌었던 권병현 전 중국 대사. 그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북방외교에 대해 "그분의 큰뜻이 아니었다면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은 2017년 중앙일보와 인터뷰하는 모습. [중앙포토]

한ㆍ중 수교 당시 실무교섭대표를 맡아 중국과의 협상을 이끌었던 권병현 전 중국 대사. 그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북방외교에 대해 "그분의 큰뜻이 아니었다면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은 2017년 중앙일보와 인터뷰하는 모습. [중앙포토]

“한ㆍ중 수교라는 역사적 사건이 불과 4개월간의 비밀협상 끝에 이뤄진 것은 협상단을 믿고 권한을 완전히 위임해준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넓은 포용력을 갖고 큰 역사만 본 분입니다.”

권병현 전 주중 대사 인터뷰

1992년 한ㆍ중 수교 당시 대중 실무교섭대표를 맡아 중국과의 협상을 이끌었던 권병현 전 주중 대사는 26일 “그분의 큰 뜻이 아니었다면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며 이처럼 말했다.

"한·중 수교 원천은 노 전 대통령 강력한 의지" 

26일 서거한 노태우 전 대통령.

26일 서거한 노태우 전 대통령.

소련과의 수교가 노 전 대통령이 추진한 북방외교의 분수령이었다면, 중국과의 수교는 북방외교를 완성하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이었다. 냉전 종식과 함께 한반도에 찾아온 안보 불확실성을 제거한 대담한 접근법이었다.

권 전 대사는 이날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들은 직후 이뤄진 중앙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92년 4월 양국이 협상 대표를 정하기로 한 뒤 5월 첫 회담을 하고 8월 24일에 수교하기에 이르렀는데, 단기간에 이런 비밀 협상과 타결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임기를 끝내기 전 중국과의 수교로 북방외교를 마무리한다는 노 전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가 작용했다”고 돌아봤다. 다음은 일문일답.

"이제 중국만 남았다" 노 전 대통령의 의지 

1991년 노태우 전 대통령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각료회의에 참석하는 각료들을 청와대로 불러 인사를 나누는 모습. [중앙포토]

1991년 노태우 전 대통령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각료회의에 참석하는 각료들을 청와대로 불러 인사를 나누는 모습. [중앙포토]

수교 협상은 어떻게 시작됐는가.
1991년 서울에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각료회의가 열렸는데, 첸치천(錢其琛) 중국 외교부장이 이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다. 이게 그냥 이뤄진 것이 아니다. 그 해에 북방외교의 실행부처인 외무부 주도로 중국, 대만, 홍콩이 모두 APEC 정회원국으로 가입될 수 있도록 했다. 첸지천 부장이 올 수 있는 레드 카펫을 깔아준 셈이다.
중국과의 수교를 염두에 둔 조치였나.
그렇게 볼 수 있다. 당시 방한한 첸지천 부장이 청와대로 노 전 대통령을 예방했다. 미수교국의 정상을 예방하는 것 자체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 자리에서 노 전 대통령이 첸지천 부장에게 전했던 메시지가 사실상 ‘그린 시그널’이었다. “양국 간에 이제 수교를 할 때가 됐다” “우리는 소련, 동구권과 수교를 했고 이제 중국만 남았다”는 취지의 강력하고 직설적인 수교 의지를 보였다.
노 전 대통령이 강한 의지를 보인 배경은 무엇인가.
93년 초면 노 전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는 상황이었다. 이에 임기가 끝나기 전에 북방외교를 완성하려는 열망이 강했다. 중국과도 수교해야 화룡점정이 되는 것이었다. 또 중국에서는 실권자 덩샤오핑(鄧小平) 옹의 결단이 있었다. 덩샤오핑 옹의 개혁ㆍ개방 정책은 89년 6ㆍ4 천안문 사태 유혈 진압으로 서구 자본의 대탈출이 이어지면서 위기에 봉착했다. 이에 덩샤오핑 옹은 한국과의 수교를 결심한 것 같다. ‘무해양득’, 중국 경제에 좋고 중국 통일에 좋고 해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런 덩샤오핑 옹의 암묵적 훈령에 따라 첸지천 부장이 서울에 왔고, 노 전 대통령이 만나 화답한 셈이다.

작전명 '동해', 4개월 간의 비밀 협상 

1992년 9월 유엔총회 참석차 방미중인 노태우 대통령은 첸치천(전기침) 중국외교부장을 접견하고 한중 수교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중앙포토]

1992년 9월 유엔총회 참석차 방미중인 노태우 대통령은 첸치천(전기침) 중국외교부장을 접견하고 한중 수교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중앙포토]

중국 반응은 어땠나.
첸지천 부장이 돌아가 노 전 대통령의 메시지를 장쩌민(江澤民) 주석과 리펑(李鵬) 총리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92년 4월 13일 베이징에서 열린 APEC 각료회의 참석을 위해 방중한 이상옥 당시 외무부 장관이 단독으로 첸지천 부장과 비밀 회담을 했다. 거기서 담판 대표를 한 명씩 임명하자고 합의가 됐다. 양국 지도자의 뜻을 받들어 이뤄진 것이었다. 이상옥 장관이 이를 노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곧 내가 대표로 임명돼 5월 베이징에서 첫 회담을 했다. 작전명 ‘동해’로 명명한 비밀협상이었다.
중국과의 수교 협상인데, 왜 서해가 아니라 동해인가.
혹시 상황이 새어나가도 동해라고 하면 중국과 연결하지는 못하도록 일부러 그렇게 정했다. 그만큼 기밀 유지가 핵심인 협상이었다. 나를 협상 대표로 임명하면서 이상옥 장관이 “고향의 아버지가 병이 났다고 하고 사라지라”고 했고, 실무에 참여한 신정승 동북아2과장은 병이 나서 입원한 것으로 했다. 김석우 아주국장은 자정이 넘어 안가와 이상옥 장관이 있는 곳을 왔다 갔다 하며 서류를 전달했다.  
결국 유출 없이 불과 4개월 만에 협상을 타결했는데.
그게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준 게 노 전 대통령이었다. 사실 비밀이 깨지면 협상이 깨지고, 그러면 양국관계에 미칠 충격이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단시간 내에 빨리 타결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명제가 있었다. 협상 대표로서 비밀이 깨지는 게 먼저냐, 타결이 먼저냐 하는 치킨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노 전 대통령은 협상팀에 모든 것을 맡겨줬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조건을 내리지 않고 “어떻게든 대국적으로 타결하라”고 강한 의지를 갖고 밀어줬다. 협상팀을 믿고 권한을 완전히 준 것이 정말 큰 도움이 됐다.

"남북 간 교차점 된 한·중 수교"  

한중 수교 직후인 1992년 9월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해 당시 양상곤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진 노태우 전 대통령의 모습. [중앙포토]

한중 수교 직후인 1992년 9월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해 당시 양상곤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진 노태우 전 대통령의 모습. [중앙포토]

이 정도 중대한 사안은 통상 협상 중 계속해서 대통령에 보고하도록 할 텐데.
물론 이상옥 장관이 회담이 끝날 때마다 대통령에 보고는 했지만, 협상 중간에 단계 단계 보고하는 식으로는 하지 않았다. 서울 워커힐 호텔 꼭대기 층 VIP룸에서 이뤄진 마지막 3차 회담에서 수교문서 문안이 확정됐는데, 이것까지도 협상단에 위임된 권한이었다. 협상단이 우선 중국과 문안에 합의한 뒤 이상옥 장관과 김종휘 청와대 수석 등이 직접 워커힐로 와서 문안을 검토한 뒤 승인했다.
노 전 대통령은 처음부터 대만과의 단교를 결심한 뒤 중국과의 수교를 택한 것인가.
그렇다. 중국이 수교하는 나라들에는 빼놓지 않고 그렇게 요구했기 때문이다. 물론 첫 회담에서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강하게 버텼고, 이 때문에 결렬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마지막 회담에 가서야 우리는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은 북한과의 혈맹을 정리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됐다. 대만 못지않게 충격받은 게 김일성이었을 것이다. 북한이 원했던 것은 한ㆍ중이 수교하면 북ㆍ미도 수교하는 것이었는데, 한ㆍ중만 단독수교를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중국과의 수교로 상전벽해 같은 기회를 맞이한 것을 고려하면, 남북에 일종의 교차점이 되는 사건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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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전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한ㆍ중 수교는 언제 가능했을까.
훨씬 더 늦어졌을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상황도 많이 달랐을 것이다. 중국이 대가로 북ㆍ미 수교를 요구하지 않았겠는가. 노 전 대통령과 덩샤오핑 옹, 두 정치 지도자의 결단이 맞아떨어져 이뤄낸 결과였다. 고인의 큰 뜻을 잘 조명해달라. 그분의 큰 뜻이 아니었다면, 그 기회를 놓쳤다면,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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