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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키호택과 걷는 산티아고길 80일]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이상한 마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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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키호택과 걷는 산티아고길 80일]9화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아침에 동네 와이너리 사장이 와인 5병과 바스크식 모자를 주고 갔다. 햇살이 어찌나 강렬한지 모자가 없었다면 얼굴이 익을 뻔 했다.

아침에 동네 와이너리 사장이 와인 5병과 바스크식 모자를 주고 갔다. 햇살이 어찌나 강렬한지 모자가 없었다면 얼굴이 익을 뻔 했다.

또 어느 분이 질긴 에코백을 줬다. 용도별로 여러가지를 넣어가지고 다닌다.

또 어느 분이 질긴 에코백을 줬다. 용도별로 여러가지를 넣어가지고 다닌다.

제법 큰 도시인 팜플로나 끝에서 우리는 황량한 벌판과 마주 섰다. 추수가 이미 끝난 뒤여서인지 벌판 어디에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벌판은 상대적으로 낮은 지대에 있어 그 안에 있는 마을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기 보이는 마을까지 금방 가겠지?”
“뭐 손에 잡힐 듯 한데요.”
마을까지는 현실감 없을 정도로 가까워 보였다. 아득한 벌판을 지날 때는 꼭 지도를 보고 살피라는 경험자들의 충고를 잊었다. 잠깐의 오판이 거리를 마음대로 줄여놓았다. 사막의 개미잡이가 파놓은 함정으로 들어가는 개미처럼 우리는 지옥의 늪에 발을 들여놓았다.

지나는 길에 본 마을 묘지. 평안을 빌었다.

지나는 길에 본 마을 묘지. 평안을 빌었다.

여름이 물러간 10월이지만 태양은 대지를 몽땅 태워버릴 기세였다. 벌판에는 쉴만한 그늘 하나 없었다. 두 시간을 걸었는데 만만하게 보이던 마을이 점점 멀어져 갔다. 게다가 발아래에 있던 마을은 어느새 산 위로 올라가 버렸다.
‘다가갈수록 멀어져 가는 마을이라니 이해할 수 없구먼.’

걷는 내내 물을 마시지 못했다. 갈증은 서로의 대화를 막아버렸다. 말없이 걷던 동키호택 숨소리도 거칠어졌다. 이미 우리는 갈증의 끝까지 다다랐다. 마을까지 가려면 내리막 없는 오르막길로 아득하기만 했다. 한발 한발 사력을 다했다. 어느덧 손에 잡힐 듯 마을이 다가왔다. 우리는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꼬박 4시간을 걷고 있었다.

“동훈아 먼저 마을에 가서 잘 곳을 알아봐줘.”
동훈이가 산등성이를 넘어 사라졌다. 이제 조금만 가면 마을이다. 호택이가 콧물을 질질 흘리며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졌다. 나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힘내자 호택아. 저기 가면 쉴 수 있고 물도 있단다. 목표가 5백 미터도 남지 않은 고지에 이르렀다. 그런데 갑자기 호택이가 서버렸다.
‘나는 더 이상 못 가겠어. 가려면 너나 가라고.’
힘이 들 때면 가끔 서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번엔 사정이 달라 보였다. 십여 분을 달래고 협박하고 끌어봤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보통 이런 때는 잠시 쉬다가 재촉하면 다시 가곤 했는데 말이다.
‘이래서 당나귀고집이라는 거군. 누가 이기나 해 볼까?’
 하지만 아무리 잡아당기고, 목줄로 엉덩이를 쳐도 호택이는 고개를 치켜들며 완 강하게 버텼다. 혼자서는 무리였다. 호택이 등 위의 짐을 내려놓았다. 일단 쉬게 한 다음 먹이를 주며 달래볼 작정이었다. 다시 삼십 분이 지나도 호택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가 다가가면 고개를 쳐들고 한번 붙어보자는 표정을 지었다.

더는 못가, 아부지 혼자 가요. 얼마나 힘들었던지 호택이가 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저 뒤에 보이는 곳이 팜플로나. 코앞에 보이는데 12km란다. 맑은 공기가 빚은 착시현상이다.

더는 못가, 아부지 혼자 가요. 얼마나 힘들었던지 호택이가 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저 뒤에 보이는 곳이 팜플로나. 코앞에 보이는데 12km란다. 맑은 공기가 빚은 착시현상이다.

어느 틈에 나는 당나귀 눈치를 보고 있었다.
“당나귀에게 지배당하지 말고 당신이 당나귀를 제압해야 합니다. 당나귀에게 주도권을 빼앗기면 상당히 곤욕스러울 거예요. 항상 앞에서 걷고 당신을 앞서려 하면 줄을 돌리거나 가로막아서 앞길을 막아야 해요. 짐을 지고 걸어갈 때 갑자기 길에서 무엇을 먹으려고 하면 단호하게 제지하세요. 계속 허용하다 보면 당나귀는 자기 마음대로 행동해요. 가고 서는 것을 당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나귀가 합니다. 그러면 당나귀를 업고 가야 할 거예요.”
아리츠와 엘레나가 몇 번을 강조한 말이다. 이런 충고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길을 가다 당나귀가 먹으려고 하면 기다려 주었다. 말을 듣지 않을 때도 단호하기는커녕 어린애 다루듯 쓰다듬어 주곤 했다. 주도권을 빼앗긴 것이다.
나는 영양식인 시리얼을 충분히 먹이고 풀을 뜯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한 시간이 흘렀다. 어쩌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을 구걸했으나 말이 통하지 않아 번번이 실패했다. 그나마 한 명이 알아듣고 물병을 꺼내더니 당나귀만 주고 가버렸다.
‘이런 젠장. 나도 좀 주지’

이때 멀리서 동훈이가 내려왔다. 동훈이는 호택이에게 다가가더니 어린애 다루듯 다정하게 속삭이고 쓰다듬어 주었다. 우리는 당나귀 등에 짐을 다시 실었다. 당나귀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동훈이 속삭임에 감동해서인지 충분한 휴식을 취해서인지 모를 일이지만 다행이었다.

동훈이가 가져온 생명수. 호택아 고생했다. 다 아부지 탓이야.

동훈이가 가져온 생명수. 호택아 고생했다. 다 아부지 탓이야.

한참을 쉬며 풀을 뜯고 힘을 되찾은 호택이.

한참을 쉬며 풀을 뜯고 힘을 되찾은 호택이.

드디어 마을에 도착. 점점 바스크 사람 닮아가는 중.

드디어 마을에 도착. 점점 바스크 사람 닮아가는 중.

동네는 작고 아담했다.
“여기 마을 이름이 재밌네?”
“뭔데요”
“자리깨기(Zariquiegi)잖아?”
마을은 작아도 영화 〈The Way〉를 찍었을 정도로 유명한 ‘산 안드레스 성당’ 옆에 텐트를 쳤다. 아들이 산티아고순례길을 걷다 죽는다. 아버지는 아들이 왜 그랬는지 궁금해 길을 나선다. 순례길을 걸으며 아버지는 점점 아들을 이해해 간다는 영화다. 영화 속에서 중요한 고백을 하는 장소가 바로 이 성당 담장이다. 담장은 사람들이 걸터앉아도 좋을 정도로 낮고 성당은 길보다 낮은 위치다.

우리가 묵을 마을 자리깨기. 자리펴기는 없나?

우리가 묵을 마을 자리깨기. 자리펴기는 없나?

우리가 지나온 벌판 너머 팜플로나에 밤이 찾아왔다. 이때 어둠을 뚫고 페드로라는 청년이 언덕을 올라왔다.
“와! 정말 힘드셨죠? 근데 저기서 여기가 몇 킬로미터나 되나요?”도시의 불빛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곳을 가리키며 묻자 그가 대답했다.
“10km가 넘어요. 물이 없어 아주 힘든 구간이죠. 게다가 내내 오르막길이잖아요.”
“10kmsk 된다고요? 그렇게 멀어요?”
깜짝 놀라는 내게 그가 말을 이었다.
“벌판의 거리는 가까워 보이죠. 사막의 신기루처럼 말이에요.”
도시에 불빛이 하나둘 늘어갈 즈음 하늘의 별도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참 힘든 하루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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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람찬 하루 일을 끝내기 전에 산 안드레스 성당 앞에서 감사 기도.

보람찬 하루 일을 끝내기 전에 산 안드레스 성당 앞에서 감사 기도.

호택이를 보고 아이들이 우르르. 함께 온 강아지가 짖자 시끄럽다며 꾸짖기도 했다. 내일 다시 오겠다고 아빠를 조른다기에 소원을 들어줄 겸 하루를 이 곳에서 더 묵기로 했다. 다음날 다시 찾아온 아이들과 아빠. 어제 저녁은 온통 당나귀 얘기만 했단다. 오늘 학교에 가면서 당나귀 가지말게 해 달라고 졸랐다네요. 아빠는 고맙다고 우리 배터리를 몽땅 가져가서 가득 채워주었다.

호택이를 보고 아이들이 우르르. 함께 온 강아지가 짖자 시끄럽다며 꾸짖기도 했다. 내일 다시 오겠다고 아빠를 조른다기에 소원을 들어줄 겸 하루를 이 곳에서 더 묵기로 했다. 다음날 다시 찾아온 아이들과 아빠. 어제 저녁은 온통 당나귀 얘기만 했단다. 오늘 학교에 가면서 당나귀 가지말게 해 달라고 졸랐다네요. 아빠는 고맙다고 우리 배터리를 몽땅 가져가서 가득 채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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