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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충청 합쳐 호남 압박…현대사 물줄기 뒤바꾼 '3당합당' [노태우 별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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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전 대통령의 5년 재임 중 가장 큰 정치적 이벤트는 1990년 1월의 3당 합당이었다. “정치가 상상할 수 있는 것 그 이상”이라는 말을 낳았던 초유의 일이었다. 노 전 대통령의 민정당, YS(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그리고 JP(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합쳐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이 된 것이다.

〈YONHAP PHOTO-0513〉 3당 합당 발표   (서울=연합뉴스) 1990년 1월 당시 노태우 대통령(가운데)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왼쪽), 김종필 공화당 총재(오른쪽)가 청와대에서 긴급 3자회동을 갖고 민정, 민주, 공화 3당을 주축으로 신당창당에 합의했음을 발표하는 모습. 2015.11.22  〈〈 연합뉴스 DB 〉〉   dohh@yna.co.kr/2015-11-22 02:30:28/ 〈저작권자 ⓒ 1980-2015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YONHAP PHOTO-0513〉 3당 합당 발표 (서울=연합뉴스) 1990년 1월 당시 노태우 대통령(가운데)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왼쪽), 김종필 공화당 총재(오른쪽)가 청와대에서 긴급 3자회동을 갖고 민정, 민주, 공화 3당을 주축으로 신당창당에 합의했음을 발표하는 모습. 2015.11.22 〈〈 연합뉴스 DB 〉〉 dohh@yna.co.kr/2015-11-22 02:30:28/ 〈저작권자 ⓒ 1980-2015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취임 만 2년이 채 안 된 노 전 대통령을 두 김씨와의 합당으로 내몬 것은 민정당의 1988년 4ㆍ26 총선 참패였다. 직전 해 대선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노 전 대통령은 총선을 앞두고 벌어진 정치관계법 협상에서 DJ(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이 요구한 소선거구제를 덜컥 받았다. 한 선거구에서 2명을 뽑는 과거의 중선거구제가 여당에 유리하다는 분석이 많았지만, 판세를 낙관했던 민정당과 노 전 대통령은 ‘날치기’까지 감행하며 소선거구제 안을 통과시켰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당시 민정당 지도부는 노 전 대통령에게 ‘총선에서 너무 많은 의석을 낼까 걱정’이라는 보고를 할 정도여서 소선거구제 안이 빛을 보게 된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새 선거법으로 치러진 13대 총선에서 민정당은 불과 125석을 건지며 헌정사상 첫 ‘여소야대’의 시련을 맞았다. 반면 1987년 대선에서 3위에 머물렀던 DJ의 평민당이 호남과 수도권 일부를 차지하며 무려 70석을 얻어 제1야당에 오르는 ‘황색 돌풍’을 일으켰다. YS의 민주당은 부산ㆍ경남을 근거지로 해 59석을 얻는 데 그쳐 제2야당으로 쪼그라들었다.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노태우 후보, 김영삼 후보, 김대중 후보의 선거 벽보.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노태우 후보, 김영삼 후보, 김대중 후보의 선거 벽보.

이후 노 전 대통령에겐 시련의 연속이었다. 제1야당 총재인 DJ와 제2야당 총재인 YS는 ‘5공 청산’ 등을 내걸고 집권 세력을 협공했다. JP까지 한몫 거들었다. 노 전 대통령은 ‘3김’을 일대일로 물밑에서 접촉하며 돌파구를 모색했다. 그 결과로 YS와 JP의 손을 잡고 216석의 거대 여당을 만들어 여소야대를 탈출한 것이다.

3당 합당은 한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전통 야권 세력의 절반이 뚝 떨어져 나와 5공 세력과 합쳐진 것이었다. 3당 합당의 결과로 만들어진 민자당은 지금까지도 한국 보수 진영의 중심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또 지역적으로는 영남ㆍ충청이 합쳐 호남을 압박했다. 일종의 호남 고립구도였다. 여소야대로 출발한 국회였지만, 합당 이후엔 DJ의 평민당이 유일한 원내 야당이 됐다.

노 전 대통령은 3당 합당을 계기로 국정을 견인할 수 있는 힘을 되찾으려 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대선 고지에 오르기 위해 박태준ㆍ이종찬 등 민정계 세력을 넘어서야 했던 YS는 합당 후에도 전투태세로 대통령인 노태우를 압박했다. 그러던 중 ‘내각제 각서’가 중앙일보의 단독 보도(1990년 10월)로 공개됐다. 3당 합당의 이면에 ‘내각제 개헌’ 약속이 담겨 있었다는 사실이 공개되자 정국이 출렁였다. 내각제 각서를 노 전 대통령 측에서 흘렸을 것이라고 추측한 YS는 격분해 마산으로 가버렸다.

1989년 1월년 서울 마포가든호텔에서 만난 3김. 왼쪽부터 당시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대중 평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 [연합뉴스]

1989년 1월년 서울 마포가든호텔에서 만난 3김. 왼쪽부터 당시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대중 평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 [연합뉴스]

3당 합당 당시 노 전 대통령은 “내각제를 하면 YS에게만 한 번 수상(총리)을 할 기회를 주면 된다”는 생각을 했다는 게 당시 측근인 박철언 전 정무1장관의 얘기다. 그걸로 ‘3김 시대’를 마무리한다는 구상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YS의 격렬한 반발에 부닥쳐 내각제 개헌은 없던 일이 됐다. 내각제 각서 파동은 거꾸로 YS로선 족쇄에서 벗어나는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행운의 여신은 YS의 편이었다. 1992년 YS는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 이후 JP가 YS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1997년 대선에서 DJ와 JP는 다시 내각제 개헌을 매개로 ‘DJ 대통령-JP 총리’ 시대를 열었다. YS의 측근인 고(故) 이원종 전 청와대 정무수석은 “역사적 가정이지만, 3당 합당이 없었다면 DJP 연합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90년 3당 합당. 왼쪽부터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노태우 대통령,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

1990년 3당 합당. 왼쪽부터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노태우 대통령,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

한편 3당 합당을 앞두고 열린 5공 청문회(1989년 12월)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국회에 증언을 하러 나왔다. 그때 증인석을 향해 명패를 던지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이가 노무현 당시 통일민주당 의원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3당 합당에 끝까지 반발하며 소신 있는 정치인이란 평가를 얻었다. 만약 3당 합당이 없었다면 김영삼→김대중→노무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권력의 변화는 전혀 다른 궤도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3당 합당을 방패삼아 퇴임 후의 안위를 도모하려 했으나, 내각제 각서 파동 이후 흘러간 정치의 격랑은 노 전 대통령의 뜻과 다르게 전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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