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 대통령의 5년 재임 중 가장 큰 정치적 이벤트는 1990년 1월의 3당 합당이었다. “정치가 상상할 수 있는 것 그 이상”이라는 말을 낳았던 초유의 일이었다. 노 전 대통령의 민정당, YS(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그리고 JP(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합쳐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이 된 것이다.
취임 만 2년이 채 안 된 노 전 대통령을 두 김씨와의 합당으로 내몬 것은 민정당의 1988년 4ㆍ26 총선 참패였다. 직전 해 대선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노 전 대통령은 총선을 앞두고 벌어진 정치관계법 협상에서 DJ(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이 요구한 소선거구제를 덜컥 받았다. 한 선거구에서 2명을 뽑는 과거의 중선거구제가 여당에 유리하다는 분석이 많았지만, 판세를 낙관했던 민정당과 노 전 대통령은 ‘날치기’까지 감행하며 소선거구제 안을 통과시켰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당시 민정당 지도부는 노 전 대통령에게 ‘총선에서 너무 많은 의석을 낼까 걱정’이라는 보고를 할 정도여서 소선거구제 안이 빛을 보게 된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새 선거법으로 치러진 13대 총선에서 민정당은 불과 125석을 건지며 헌정사상 첫 ‘여소야대’의 시련을 맞았다. 반면 1987년 대선에서 3위에 머물렀던 DJ의 평민당이 호남과 수도권 일부를 차지하며 무려 70석을 얻어 제1야당에 오르는 ‘황색 돌풍’을 일으켰다. YS의 민주당은 부산ㆍ경남을 근거지로 해 59석을 얻는 데 그쳐 제2야당으로 쪼그라들었다.
이후 노 전 대통령에겐 시련의 연속이었다. 제1야당 총재인 DJ와 제2야당 총재인 YS는 ‘5공 청산’ 등을 내걸고 집권 세력을 협공했다. JP까지 한몫 거들었다. 노 전 대통령은 ‘3김’을 일대일로 물밑에서 접촉하며 돌파구를 모색했다. 그 결과로 YS와 JP의 손을 잡고 216석의 거대 여당을 만들어 여소야대를 탈출한 것이다.
3당 합당은 한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전통 야권 세력의 절반이 뚝 떨어져 나와 5공 세력과 합쳐진 것이었다. 3당 합당의 결과로 만들어진 민자당은 지금까지도 한국 보수 진영의 중심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또 지역적으로는 영남ㆍ충청이 합쳐 호남을 압박했다. 일종의 호남 고립구도였다. 여소야대로 출발한 국회였지만, 합당 이후엔 DJ의 평민당이 유일한 원내 야당이 됐다.
노 전 대통령은 3당 합당을 계기로 국정을 견인할 수 있는 힘을 되찾으려 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대선 고지에 오르기 위해 박태준ㆍ이종찬 등 민정계 세력을 넘어서야 했던 YS는 합당 후에도 전투태세로 대통령인 노태우를 압박했다. 그러던 중 ‘내각제 각서’가 중앙일보의 단독 보도(1990년 10월)로 공개됐다. 3당 합당의 이면에 ‘내각제 개헌’ 약속이 담겨 있었다는 사실이 공개되자 정국이 출렁였다. 내각제 각서를 노 전 대통령 측에서 흘렸을 것이라고 추측한 YS는 격분해 마산으로 가버렸다.
3당 합당 당시 노 전 대통령은 “내각제를 하면 YS에게만 한 번 수상(총리)을 할 기회를 주면 된다”는 생각을 했다는 게 당시 측근인 박철언 전 정무1장관의 얘기다. 그걸로 ‘3김 시대’를 마무리한다는 구상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YS의 격렬한 반발에 부닥쳐 내각제 개헌은 없던 일이 됐다. 내각제 각서 파동은 거꾸로 YS로선 족쇄에서 벗어나는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행운의 여신은 YS의 편이었다. 1992년 YS는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 이후 JP가 YS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1997년 대선에서 DJ와 JP는 다시 내각제 개헌을 매개로 ‘DJ 대통령-JP 총리’ 시대를 열었다. YS의 측근인 고(故) 이원종 전 청와대 정무수석은 “역사적 가정이지만, 3당 합당이 없었다면 DJP 연합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3당 합당을 앞두고 열린 5공 청문회(1989년 12월)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국회에 증언을 하러 나왔다. 그때 증인석을 향해 명패를 던지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이가 노무현 당시 통일민주당 의원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3당 합당에 끝까지 반발하며 소신 있는 정치인이란 평가를 얻었다. 만약 3당 합당이 없었다면 김영삼→김대중→노무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권력의 변화는 전혀 다른 궤도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3당 합당을 방패삼아 퇴임 후의 안위를 도모하려 했으나, 내각제 각서 파동 이후 흘러간 정치의 격랑은 노 전 대통령의 뜻과 다르게 전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