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 대통령의 선거 구호는 ‘보통 대통령’이었다. 부드러운 인상과 말씨와 어울려 여론을 탔다. 이런 이미지는 그의 실제 모습이었을까.
그와 40여년간 교분을 쌓은 손주환 전 공보처 장관은 “흔히 노 전 대통령의 인간적 면모를 얘기할 때 ‘물태우’라고 하는데 그게 긍정적 의미에서 노태우의 리더십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라고 설명했다. 불보다 강한 물처럼 겉으론 유연하면서 속으론 강인한 성품이었다는 말이다.
1988년 손 전 장관이 민정당 정세분석실장으로 여소야대 정국에서 한창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다. 당시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점심이나 같이하자”고 호출이 왔다고 한다. “당연히 5공 청산 요구에 대해 어떤 해법을 마련 중인지 보고를 받으려는 줄 알았다. 그런데 청와대에 들어가 보니 영부인과 영애(노소영)도 함께하는 자리였다. 노 전 대통령은 5공의 5자도 안 꺼냈다. 표정이 너무 밝아 ‘나는 밖에서 야당 때문에 잠도 못 자는데 대통령만 어찌 그리 천하태평이냐’는 야속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중에야 손 전 장관은 “그게 노 전 대통령의 엄청난 자신감의 표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손 전 장관의 계속되는 회고. “취임 초 사회 각계에서 각종 요구가 폭발적으로 분출되면서 혼란상이 연출되자 여러 참모가 ‘힘 좀 쓰셔야 한다’며 강경 대응을 건의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늘 ‘꽉 눌렸던 용수철이 터져 나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시간을 갖고 사회의 자율성을 키워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며 반대했다.”
인간적으로도 소탈했다는 게 주변 인사들의 전언이다. 노 전 대통령의 민정당 총재 시절 보좌역을 지낸 이병기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회고다.
“81년 케냐 대사관에서 근무하다 당시 노태우 정무2장관을 모시라는 발령을 받아 급히 귀국했다. 장군 출신이라 굉장히 엄격한 스타일일 것으로 짐작하고 바짝 긴장했는데 첫 신고 때 ‘외교관 잘하고 있는 사람 불러서 미안해요’라고 존댓말을 건네 깜짝 놀랐다.”
81년 가을 노 전 대통령이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유럽·아프리카를 순방할 때였다고 한다. 장기 출장이라 머리카락이 길어져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을 때 이발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러나 마침 일요일이라 문을 연 이발소가 없었다. 이 전 실장은 “그쯤 되는 정권 핵심인사면 얼마든지 대사관을 통해 교포 이발사를 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노 전 대통령은 대사관 직원들 번거롭게 하지 말라면서 수행하던 나더러 깎아 달라고 부탁했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은 노래를 잘 불렀다. 6공 초대 안기부장을 지낸 배명인 변호사는 “노 전 대통령이 퇴임 때 청와대로 각료 출신 100여 명을 불러 고별 만찬을 했는데 그때 자신이 애창곡을 직접 불러 녹음한 CD를 선물한 게 인상적이었다”며 “무인 출신이지만 낭만적인 면모가 있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