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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근들 "구호는 '보통 대통령'…인간적으론 '물태우' 딱 맞다" [노태우 별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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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전 대통령. [중앙포토]

노태우 전 대통령. [중앙포토]

노태우 전 대통령의 선거 구호는 ‘보통 대통령’이었다. 부드러운 인상과 말씨와 어울려 여론을 탔다. 이런 이미지는 그의 실제 모습이었을까.

그와 40여년간 교분을 쌓은 손주환 전 공보처 장관은 “흔히 노 전 대통령의 인간적 면모를 얘기할 때 ‘물태우’라고 하는데 그게 긍정적 의미에서 노태우의 리더십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라고 설명했다. 불보다 강한 물처럼 겉으론 유연하면서 속으론 강인한 성품이었다는 말이다.

1988년 손 전 장관이 민정당 정세분석실장으로 여소야대 정국에서 한창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다. 당시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점심이나 같이하자”고 호출이 왔다고 한다. “당연히 5공 청산 요구에 대해 어떤 해법을 마련 중인지 보고를 받으려는 줄 알았다. 그런데 청와대에 들어가 보니 영부인과 영애(노소영)도 함께하는 자리였다. 노 전 대통령은 5공의 5자도 안 꺼냈다. 표정이 너무 밝아 ‘나는 밖에서 야당 때문에 잠도 못 자는데 대통령만 어찌 그리 천하태평이냐’는 야속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중에야 손 전 장관은 “그게 노 전 대통령의 엄청난 자신감의 표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손 전 장관의 계속되는 회고. “취임 초 사회 각계에서 각종 요구가 폭발적으로 분출되면서 혼란상이 연출되자 여러 참모가 ‘힘 좀 쓰셔야 한다’며 강경 대응을 건의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늘 ‘꽉 눌렸던 용수철이 터져 나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시간을 갖고 사회의 자율성을 키워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며 반대했다.”

노태우 대통령이 1992년 6월 29일 중앙정치교육원에서 6.29 선언 5주년 기념 보통사람과의 대화에 참석, 연설하고 있다. [중앙포토]

노태우 대통령이 1992년 6월 29일 중앙정치교육원에서 6.29 선언 5주년 기념 보통사람과의 대화에 참석, 연설하고 있다. [중앙포토]

인간적으로도 소탈했다는 게 주변 인사들의 전언이다. 노 전 대통령의 민정당 총재 시절 보좌역을 지낸 이병기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회고다.

“81년 케냐 대사관에서 근무하다 당시 노태우 정무2장관을 모시라는 발령을 받아 급히 귀국했다. 장군 출신이라 굉장히 엄격한 스타일일 것으로 짐작하고 바짝 긴장했는데 첫 신고 때 ‘외교관 잘하고 있는 사람 불러서 미안해요’라고 존댓말을 건네 깜짝 놀랐다.”

노태우 전 대통령 주요 연보.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노태우 전 대통령 주요 연보.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81년 가을 노 전 대통령이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유럽·아프리카를 순방할 때였다고 한다. 장기 출장이라 머리카락이 길어져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을 때 이발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러나 마침 일요일이라 문을 연 이발소가 없었다. 이 전 실장은 “그쯤 되는 정권 핵심인사면 얼마든지 대사관을 통해 교포 이발사를 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노 전 대통령은 대사관 직원들 번거롭게 하지 말라면서 수행하던 나더러 깎아 달라고 부탁했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은 노래를 잘 불렀다. 6공 초대 안기부장을 지낸 배명인 변호사는 “노 전 대통령이 퇴임 때 청와대로 각료 출신 100여 명을 불러 고별 만찬을 했는데 그때 자신이 애창곡을 직접 불러 녹음한 CD를 선물한 게 인상적이었다”며 “무인 출신이지만 낭만적인 면모가 있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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