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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훈 칼럼

두터움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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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최훈 기자 중앙일보 주필
최훈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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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과 선거는 닮은 점이 많다. 반 집이든, 오십 집을 이기든 승리와 패배만이 존재한다. 치열한 부분 전투의 ‘실리’와 무주공산의 중원(중도층·대의명분)을 장악하려는 ‘세력’의 조화가 승부를 결정한다. 대구·경북에서 9선을 했던 고 박준규 국회의장은 “압도적인 텃밭 지역구인데 선거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나중에는 적당한 차이로 이기는 관리를 했다”고 말했다. 한치 앞도 힘든 지금의 대통령 선거에선 누구도 이런 확실한 예측과 여유를 가지기란 쉽지 않다.

요즘 AI(인공지능)가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되는 곳은 역설적으로 수천 년 역사를 이어 온 인간의 두뇌 게임 바둑이다. 흑백 간에 한 수(手)를 둘 때마다 각자의 승률 그래프가 달라진다. 서로 몇 집이 유불리한지도 가르쳐 준다. 그뿐인가. 다음 착점의 묘수를 승률이 높은 순으로 일러준다. 과거 입신(入神)의 경지라고 불렸던 프로 9단 해설자들조차 당혹스럽기 일쑤다. 국내에서 바둑의 형세 판단이 가장 정확하다는 박영훈 9단의 해설 중 토로다. “이 수가 왜 패착인지, 승착인지 두어질 때는 잘 몰랐다. 하지만 바둑이 다 끝나고 나서 돌아보니 AI의 수치가 그때 왜 그렇게 오묘하게 바뀌었는지 알겠더라.” 인간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당시엔 왜 자신의 운명에 그렇게 큰 영향을 미쳤는지 모르는 게 인간의 한계다.

작은 전투의 실리만을 탐하려다
대세 그르쳐 지는 게 승부의 맥
공격 앞서 자신의 약점 정리하며
두텁게 중원으로 전진해야 희망

지금의 대선에 여론조사보다 더 정밀하고 완성도 높은 스마트 AI를 적용한다고 상상해 보자. 대장동 의혹 공방이 벌어진 국정감사 직후 정치권 안팎에선 “이재명의 원맨쇼로 끝난 완승”“말은 참 잘한다”는 평가가 주류다. 야당의 ‘이재명-조폭 연루설’이 코미디로 끝난 역풍에다 이 후보의 새로운 특혜 관련 팩트도 드러난 게 없었으니. 그러나 민주당이 즐거워한 이 모든 장면은 과연 지나 보면 승착이었을까. 화천대유와 천화동인 주인 7명이 총 8500억원의 이익(경실련 추정)을 챙겨가고, 국회의원의 20대 아들에게 간 50억원의 퇴직금, 이재명 지사 판결을 맡았던 전 대법관의 억대 화천대유 고문료 등에 직면한 국민의 분노와 상실감, 트라우마란 상상 이상이다. “한전 직원이 뇌물 받으면 대통령이 책임지느냐” “재벌 회장이 계열사 대리 제안을 보고받느냐”는 식의 답변, 별일 아니라는 느낌의 국감장 헛웃음 등은 이런 국민의 정서와는 전혀 합(合)이 맞지 않고 말았다. 잘 넘어간 국감과 이어질 면죄부성 검찰 수사라면 부분적 승리에도 곳곳에 엷은 약점을 계속 안고 가야 하는 고단한 수순이 명약관화다. 정치의 AI가 있다면 제시해 줄 유일한 정수(正手)이자 최고의 강수(强手)는 역시 특검이 아닌가 싶다. 모든 의문을 신속·말끔히 털고 나아갈 수 있는 행마다. 경선을 무난히 잘 치렀다는 평가를 받던 이낙연 전 총리의 딱 하나 의문수는 경선 직후 며칠간의 불복 기류였다. 정치적 미래를 충분히 담보할 수 있던 그였지만 지지층의 연민과 아쉬움 등 소중한 자신의 자산을 스스로 삭감한 자충수로만 기억에 남게 됐다.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의 전두환 전 대통령 관련 발언 역시 이런 맥락에서 곰곰이 복기해 봐야 할 대목.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군사 쿠데타와 5·18만 빼면 그야말로 정치를 잘했다고 말하는 분이 많다”는 그의 발언은 부산에서 나왔다. 경남 합천이 고향이고, 대구공고 출신인 전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권리당원의 주력이 영남 지역이라는 맥락에선 경선 승리용 포석일 수 있었다. 확실한 실리 챙기기다. 하지만 과연 전두환의 정치가 정통적 의미의 정치였는지, ‘공포(恐怖)의 제도화’ 수준이었는지 당시를 살았던 수많은 이의 ‘대의명분’엔 근본적 의문을 던지고 말았다. 그의 브랜드인 ‘공정’과 ‘정의’를 갸우뚱하게 만들며 중원으로의 확장을 가로막을 수도 있는 악수(惡手)임은 분명해 보인다.

선두권에 진입한 홍준표 후보의 돌발적 의문수는 역시 “조국 가족 관련 수사는 과잉수사였다”는 발언이었다. 깨끗이 사과했지만 수사 주체였던 윤석열 전 총장에게 타격을 가하려 하다 중원 민심과의 제대로 된 연결, 공감을 얻지 못한 근시안이었다. 선전 중인 원희룡·유승민 후보가 받을 훈수는 “손 따라 두지 말라” “귀(구석)에서만 놀지 말라”일 터다. 윤석열의 일거수일투족에만 집착하거나, ‘대장동 일타 강사’라는 부분적 전투로만 허비하지 말라는 얘기겠다. 원 후보의 강점인 미래로의 세대교체, 중도적 개혁 성향과 유 후보의 합리적 보수, 경제정책 마인드 등이 못내 아쉬운 시간이다. 차지한 집이 작더라도 미래 비전을 스스로의 목소리로 차별화해 가는 담대함으로 중원을 향해 진격해 가길 바랄 뿐이다.

바둑 고수들이 승리의 공통점으로 거론하는 단어는 ‘두터움’이다. “공피고아(攻彼顧我).” 상대를 공격하려면 먼저 자신의 약점이나 치명적 반격을 부를 소지를 보완해 두텁게 다지고 가라는 가르침이다. 삶과 일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그 최고의 경지는 사석(捨石) 작전이다. 그 돌들을 버리더라도 미래에 큰 곳의 이득을 선택하는 것, 지혜롭고 현명한 길이다. 분명히 진정성 있게 스스로를 털고 큰 곳으로 가라. 134일 앞의 승부. 대통령 후보들의 ‘두터움’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