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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동의 축적의 시간

향후 100년 움직일 전략기술 확보, 기술주권의 출발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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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점점 뜨거워지는 기술패권 전쟁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최근 몇 차례 미·중 패권경쟁을 논하는 자리에 함께할 기회가 있었다. 대체로 미국과 중국이라는 고래들의 싸움에서 어떤 파편이, 어떻게 튈지 예민하게 살피고 한국의 전략적 대응방안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참여한 전문가들의 분야는 각기 달랐지만, 기술에 관한 이야기를 빼놓고 의미 있는 논의를 하기 어렵다는 데는 모두 한목소리였다. 듣다 보면 늘 목에 탁 걸리는 게 있다. 새로운 기술 패러다임의 등장과 글로벌 경제질서의 재편을 기회의 창으로 보고 능동적인 관점에서 한국의 비전과 전략을 논의할 수도 있을 텐데, 왜 항상 수동적인 ‘대응전략’으로 결론이 모이는 것일까.

지난 몇 년간 국제적으로 기술패권이라는 단어만큼 주목받은 키워드는 ‘기술주권(technology sovereignty)’이다. 기술주권은 국가경제와 국민복지를 위해 필요한 기술을 주권적 의지에 따라 스스로 조달할 수 있는 국가의 능력을 말한다. 기술주권은 핵심 전략기술과 이를 뒷받침하는 제조역량이 있을 때 확보된다. 남들이 가지지 못한 고유한 전략기술이 있어야 기술선진국과 함께 대등한 파트너로 대접받으면서 미래산업의 글로벌 개념설계를 만드는 데 참여할 수 있다.

세계가 주목한 한국 반도체·배터리
타국에 없는 전략기술·역량 보유
미국·중국 등선 핵심기술 목록 작성
우리도 국가와 기업간 협력 절실
수동적인 대응 전략서 벗어나야

백신기술 없어 불안했던 한국

화웨이는 미·중 기술 패권의 상징이다. 미국은 5G 이동통신 장비분야 세계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중국기업 화웨이에 대해 트럼프 전 행정부 시절부터 견제를 시작했다. [로이터=연합뉴스]

화웨이는 미·중 기술 패권의 상징이다. 미국은 5G 이동통신 장비분야 세계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중국기업 화웨이에 대해 트럼프 전 행정부 시절부터 견제를 시작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금 한국의 반도체와 배터리 산업에 대해 전 세계가 협력하자고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은 바로 그들이 갖지 못한 전략기술과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제조역량을 우리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백신이라는 전략기술이 없어 불안했던 지난 시간을 떠올려보면 전략기술과 기술주권의 힘을 금방 이해할 수 있다.

기술주권은 최근 여러 국가에서 심각하게 논의하고 있는 ‘경제안보’의 필수조건이기도 하다. 경제안보는 국가경제의 운영과 국민의 삶을 위해 필수적인 기술과 제조역량을 갖추고, 글로벌 공급망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을 때 지켜진다. 복잡한 듯 보이는 이 이야기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다. 전략기술이 있어야 기술주권을 가질 수 있고, 기술주권이 있어야 경제안보가 보장된다.

지금 미·중이 기술패권을 놓고 대결하는 와중에 다른 기술선진국도 기술주권을 확보하기 위해 한판 힘겨루기를 벌이고 있다. 지난 몇 년간 전개되고 있는 각국의 움직임을 듣다 보면 숨이 막힐 지경이다.

미국의 행보가 단연 주목 대상이다. 오바마와 트럼프 행정부에서 예열한 후 바이든 행정부에서 본격적인 가속패달을 밟고 있다. 2021년 6월 공개된 ‘글로벌공급망보고서’는 대(對)중국 기술주권 보고서라고 불릴 정도다. 의회에서는 행정부의 전략을 뒷받침하기 위해 ‘혁신·경쟁법’을 초당적으로 통과시켰다. 바이오, 디지털, 대체에너지 등 핵심분야에서 전략기술 리스트를 계속 업데이트하면서 기술개발과 인력양성에 집중투자하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에서 미국의 제조역량이 취약하다는 단점을 메우기 위해 인텔 등 자국 제조기업을 지원하는 한편, 동맹국 첨단 제조공장의 유치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이 외국 반도체 기업들을 연일 백악관으로 불러 정보공유와 공장 신설을 독촉하는 것도 모두 패권국가로서 기술주권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다.

장관급 경제안보상 신설한 일본

일본도 수년 전부터 기술주권과 경제안보를 국가정책의 최우선 순위로 끌어올리기 위해 준비해왔다. 지난 10월 8일 신임 기시다 총리의 소신표명 연설에서는 새로운 내각의 4대 중점정책 중 하나로 경제안보를 제시했다. 이 문제를 전담할 장관급 경제안보상을 신설하고, 경제안보법안을 제출하는 등 숨 가쁘게 움직이고 있다. 경제안보의 핵심인 전략기술 개발을 위해 전통적으로 강한 바이오·소재·로봇 기술뿐만 아니라 양자컴퓨팅·해양기술 등 미래 전략기술 리스트를 발표하고 육성에 나섰다.

기업의 전략기술개발을 돕기 위해 1천억엔(약 1조300억원)을 지원하고, 대학의 전략기술 기초연구와 인력양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10조엔(103조원) 규모의 펀드도 조성하기 시작했다. 전략기술 제조역량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노력도 성과를 내기 시작했는데, 지난 10월 14일 세계시장 1위 파운드리 업체인 대만 TSMC의 생산시설 유치를 발표하기도 했다. 여기에 필요한 투자액 1조엔 중 약 절반을 일본 정부가 올해 안에 추경으로 지원할 계획이다.

유럽도 이런 새판짜기 난리통에서 유럽의 기술주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지난 10월 15일 유럽연합(EU)의 대통령격인 집행위원장이 유럽의회를 상대로 한 국정연설에서 반도체 현안을 유럽 기술주권의 문제로 명시적으로 선언하고, 반도체 생산 생태계 재구축에 나섰다. 디지털 분야의 기술주권에 대해서는 명운을 걸다시피 하고 있고, 유럽의 강점인 신재생에너지 분야의 전략기술 개발에는 유럽개발은행(EIB)까지 동원하면서 투자에 나섰다.

핵심기술 보호에 나선 중국

화웨이 5G 기술 사용 금지국과 사용국

화웨이 5G 기술 사용 금지국과 사용국

중국은 말할 것도 없다. 일부 첨단분야에서는 미국이 기술주권을 걱정할 수준까지 올라갔다. 아직 초기 단계인 6G 관련 기술의 특허 가운데 중국 특허가 이미 40%를 넘었다는 조사결과도 있을 정도다. 놀라운 것은 그간의 기술국산화 전략을 넘어 이제 자국의 핵심기술을 보호하겠다고 태세를 전환한 것이다. 2020년 12월 수출통제법을 시행하면서, 암호기술·우주기술 등 중국발 핵심기술의 수출을 통제하기 시작했고, 특허권도 강화했다. 일대일로라는 큰 그림과 ‘중국표준 2035’ 전략을 엮어 중국기술로 새로운 글로벌 기술패권 지도를 만들어가겠다는 비전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우호적인 기술공유와 여러 국가에 흩어진 글로벌 공급망 덕에 전 세계적으로 저물가를 누리던 동화 같던 글로벌화 시대는 더는 없다. 각국이 비용을 더 지불하고서라도 기술주권을 확보하고 경제안보를 지키기 위해 경쟁하는 새로운 혼돈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우리나라도 지난 7월 전략기술 리스트를 발표하고, 최근에는 장관급으로 구성된 대외경제안보전략회의를 신설했으며, 국회에서는 ‘핵심전략산업 특별법’을 발의했다. 이제 기술주권의 문제는 선택이 아니라 선진국으로서 자리 잡을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국가적 미션이 되었다.

무엇보다 한국의 기술주권을 담보할 전략기술이 무엇인지 정확히 식별할 수 있어야 한다. 전략기술 리스트를 보면 그 국가가 지향하는 비전이 보인다. 돈이 된다는 유망기술과 전략기술은 다르다. 다른 나라가 갖지 못한 기술이면서, 한국의 핵심이익을 지키는 동시에 세계와 인류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어야 전략기술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적 관점에서 과학기술 각 분야의 첨단동향과 산업별 글로벌 공급망의 변동을 면밀하게 분석할 수 있는 ‘테크 인텔리전스(tech intelligence)’ 능력을 키워야 한다. 자신 있게 미래개념을 제시하는 선진국들의 숨은 힘이 여기서 나온다. 우리도 한국의 비전을 담아 전략기술의 미래를 그려 나갈 수 있는 수준 높은 테크 인텔리전스 기능을 갖춰야 한다.

전략기술은 오늘 마음먹는다고 내일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리호 발사에서도 보았듯이 수십 년이 넘는 시행착오를 끈질기게 축적하면서 스케일업해야 얻어지는 것이다. 전략기술을 국가의 임무로 설정하고 장기적으로 기술개발과 인력양성에 투자하면서 정부구매로 초기 스케일업 과정을 지원해 나가야 한다. 선진국들이 기술주권 확보 전략에서 기본적으로 채택하는 정책수단이다.

여야간 초당적 협력은 필수

모든 부처가 기술주권의 관점에서 협력하는 체제를 갖춰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미국과 일본의 사례처럼 여야가 초당적으로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업과 정부가 함께 머리를 맞대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국가 간 기술주권이 충돌하는 지금 모든 선진국과 중국에서 기업과 정부가 이인삼각 한팀으로 뛰고 있다.

기술주권 논의를 하다 보면 빠지기 쉬운 함정 중 하나가 자급자족 경제에 대한 유혹이다. 바이오·환경·디지털 등 첨단기술일수록 한 국가가 모든 기술을 개발할 수도 없고, 모든 것을 생산할 수도 없다. 더 과감한 개방과 동맹의 기조 하에서 한국의 기술주권을 형성해야 한다.

그 어떤 국제기구의 분류에 의하더라도 한국은 이미 선진국이다. 선진국들의 움직임을 보고 수동적으로 대응책을 짜는 개발도상국의 마인드를 벗어날 때가 되었다. 글로벌 사회의 보편적 가치에 기여하면서 한국의 핵심이익을 지키고, 키워 나갈 수 있는 핵심 전략기술을 중심으로 담대하게 기술주권을 형성해가야 한다.

너도나도 대선 정국에 한마디씩 보태고 있는 판국이라 주저했지만, 안타까운 마음에 어쩔 수 없이 사족을 더한다. 각국의 기술주권 경쟁이 점입가경인데, 그 어떤 대선주자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현 상황이 너무 안타깝고, 걱정이다. 한국의 100년 미래를 좌우할 기술주권과 이를 뒷받침할 전략기술에 대해 한 번이라도 공부하기를 간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