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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 흥행 거장 된 평양 출신 실향민…한국영화 국제화 길닦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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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이태원 태흥영화사 전 대표

이태원 태흥영화사 전 대표

‘서편제’ ‘장군의 아들’ ‘취화선’ 등을 만든 제작자이자 한국영화계 거목 이태원 태흥영화사 전 대표가 24일 별세했다. 83세.

태흥영화사 관계자에 따르면 고인은 지난해 5월 낙상사고를 당해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오다 이날 같은 병원에서 운명했다.

고인은 임권택 감독과 흥행·수상 기록을 여럿 갈아치우며 충무로 영화판의 대부로 불렸다. 독립투사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자 협객 김두한을 그린 ‘장군의 아들’은 1990년 단성사에서 개봉해 한국영화 역대 최다 68만 관객 신기록을 세웠다. 기존 최다였던 ‘겨울여자’(1977)의 관객 57만명을 13년만에 넘어섰다. 오디션으로 주연에 발탁된 신인 박상민은 스타덤에 올랐고 ‘장군의 아들’은 이후 3편까지 나왔다. 3년 뒤인 1993년에는 판소리꾼의 한을 그린 ‘서편제’로 단성사에서 1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한국영화 신기록을 자체 경신했고 이른바 한국적인 것에 대한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감독 임권택, 제작자 이태원, 그리고 이 영화들의 촬영을 도맡은 정일성 촬영감독까지 세 사람은 ‘충무로 삼총사’로 불렸다.

‘취화선’으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받은 임권택(가운데) 감독, 정일성 촬영감독, 이태원 대표. [중앙포토]

‘취화선’으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받은 임권택(가운데) 감독, 정일성 촬영감독, 이태원 대표. [중앙포토]

충무로 삼총사는 칸영화제의 영광도 함께했다. ‘춘향뎐’(2000)은 칸 경쟁부문에 진출한 첫 한국영화가 됐고, ‘취화선’(2002)은 한국영화 사상 최초로 감독상을 받았다. 고인이 당시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은 월드컵 4강 진출과 맞먹는 쾌거”라고 자랑스러워한 일화도 유명하다.

1938년 평양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5년 아버지를 따라 월남했다. 1960년대부터 건설회사 태흥상공을 경영하다 1974년 경기도 의정부 극장이 있는 한 상가를 인수하면서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들어섰다. 앞서 젊은 시절 우연히 참여한 영화 ‘유정천리’(1959) 제작 경험도 계기가 됐다. 강원 춘천 육림극장과 손잡고 영화배급에도 손을 대 경기·강원지역에서 영향력을 키웠다. 1978년 전국극장연합회 회장을 맡아 왕성하게 활동했다.

개봉 당시 한국영화 흥행 신기록을 세운 ‘장군의 아들’. [사진 태흥영화사]

개봉 당시 한국영화 흥행 신기록을 세운 ‘장군의 아들’. [사진 태흥영화사]

제작자로 변신한 건 1983년. 영화제작사 태창흥업을 사들여 ‘태흥영화사’로 개명했다. 이듬해인 1984년 한국영화 제작 자율화가 이뤄졌고, ‘크게 흥하라’는 이름처럼 태흥영화사도 날개를 달았다.

돛을 올린 작품은 충무로 삼총사가 처음 뭉친 ‘비구니’다. ‘만다라’(1981)로 한국 종교영화 걸작을 남긴 임 감독이 먼저 제안했다. 당대 최고 인기 배우 김지미가 주연을 맡고, 도올 김용옥이 시나리오를 집필했다. 하지만 불교계 반발로 촬영부터 불발됐다. 이미 거액의 제작비를 투자했던 태흥영화사로선 타격이 컸지만 임 감독과의 작업은 계속됐다. 강수연에게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긴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를 시작으로, ‘태백산맥’(1994) ‘축제’(1996) ‘창(노는계집 창)’(1997) ‘하류인생’(2004) 등 임 감독의 대표작 11편을 함께 만들었다.

젊은 시절부터 숨돌릴 틈 없이 도전했던 고인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임 감독의 99번째 영화 ‘하류인생’에서 조승우가 연기한 주인공 ‘태웅’ 캐릭터에 영감을 주기도 했다. 태흥영화사 공식 창립작은 이장호 감독의 ‘무릎과 무릎 사이’(1984)다. 안성기·이보희 주연으로, 단성사에서만 26만 관객을 불러모으며 큰 성공을 거뒀다.

‘서편제’는 임 감독과 태흥영화사 대표작이 됐다. [사진 태흥영화사]

‘서편제’는 임 감독과 태흥영화사 대표작이 됐다. [사진 태흥영화사]

고인은 1988년 할리우드 직배가 시작되자 반대 투쟁에 앞장섰다. 항의의 의미로 외화 수입을 그만두고 제작업에 집중했다. ‘돌아이’ ‘뽕’의 이두용 감독, ‘어른들은 몰라요’의 이규형 감독, ‘젊은 날의 초상’의 곽지균 감독, ‘기쁜 우리 젊은 날’의 배창호 감독, ‘오세암’의 박철수 감독 등 당대 흥행 감독의 주요작품을 만들었다. 도전적인 안목으로 ‘개그맨’의 이명세, ‘세기말’의 송능한 등 문제적 신인 감독도 다수 발굴했다. 장선우 감독과는 ‘경마장 가는 길’에 이어 ‘화엄경’을 만들어 1994년 베를린국제영화제 알프레드 바우어상을 받았다.

한국 영화에 기여한 공로로 1993년 옥관문화훈장, 2003년 은관문화훈장을 비롯해 대종상 영화발전공로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특별제작자상, 백상예술대상 특별상 등을 받았다. 한국영상자료원 ‘태흥영화 기증자료 컬렉션’에 영화 필름 및 시나리오, 포스터, 도서 등 2000점 넘는 자료를 남겼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한숙씨와 아들 철승·효승·지승씨, 딸 선희씨가 있다. 차남 효승씨는 태흥영화사 전무이사, 3남 지승씨는 감독이자 프로듀서로 영화계에서 활동해왔다. 빈소는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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