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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조 백일장] 10월 수상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장원〉

가위
-김현장

전설에 의하면 조상 중 한 분이
쌍칼에 사북 꽂고 보자기를 베려다가
짱돌의 매복에 걸려 불구가 됐다지요

일용직 아버지가 잘려나간 그 날에도
할머니는 가위로 마른 고추 잘랐어요
맵고도 노란 생 하나, 밤하늘의 별로 떴죠

가끔은 잘못 베어 바늘 할미 꾸중 들어도
엄지와 검지 사이 희망을 끼우고서
엿장수 가위질처럼 아침 햇살 자릅니다

◆김현장

김현장

김현장

전남대 수의학과 졸업. 강진 백제동물병원장. 경기대 한류문화대학원 시조창작전공 석사 재학. 2019년 11월, 2020년 7월 중앙시조 백일장 장원.

〈차상〉

비보잉
-하빈

광장에 흩어진 꽃 윈드밀로 아우르고
빌딩 그늘 굽은 나무 탑락으로 곧추세워
비탈에 진달래 피듯 붉디붉은 저 고집

품은 뜻 하늘이고 노닐 곳 광야인데
지구를 공기 놀리듯 손바닥에 올려놓고
침묵의 거대한 말씀 푸른 봄의 사자후

뜨거운 핏줄들이 은하로 흘러들면
보아라 질풍노도 빅뱅의 뜨거운 기억
동방의 고요한 나라 숨겨뒀던 마그마

*윈드밀=비보잉에서 원심력을 이용한 스핀 류의 춤사위
**탑락=서 있는 상태로 비트에 맞춰 자신만의 스텝을 밟는 것

〈차하〉

미륵사지 석탑 
-홍성철

왕도王都의 꿈 금마에는
무시 못 할 사내 있다
깨어진 몸뚱어리
아무렇게 징거매고
무왕의
담대함 닮아
천 년 버틴 자존감

일제日帝의 덧게비친
누더기 벗어던지니
무너진 모습에도
장부의 혼 살아있어
터엉 빈
미륵사 터를
보란 듯이 채우고

〈이달의 심사평〉 

이달 장원은 김현장의 ‘가위’다. 가위질 잘못했다가 불구가 된 조상의 이야기를 첫 수에 배치하여 잘리고 자르는 한 집안의 서사를 그려냈다. 그러고 보면 가위질을 한다는 것은 쌍 칼질을 한다는 것이다. 그냥 칼질이 아니고 쌍 칼질이다. 그것에 아버지는 베여 실직되었다. 그러나 가족들은 주저앉지 않았고 “마른 고추”와 “아침 햇살”을 자르며 희망적인 삶을 이어나간다. 셋째 수에서는 ‘규중칠우쟁론기’를 연상하게 하는 유쾌함까지 더해 단단한 시적 내공을 짐작할 수 있게 하였다.

차상은 하빈의 ‘비보잉’이다. 우리 비보이들의 실력 또한 세계 정상급이라 “비탈에 진달래 피듯 붉디붉은 저 고집” “숨겨뒀던 마그마” 등의 신선한 묘사가 적확한 듯 반갑다. 그러나 “질풍노도” 같은 고사성어나 “동방의 고요한 나라” 같은 관용어가 된 낡은 언어들도 함께 운용되고 있어 활달한 감각에 아쉬움을 남겼다. 차하는 홍성철의 ‘미륵사지 석탑’이다. 아름다운 석탑을 ‘무시 못 할 사내’로 의인화하여 백제의 우아하고 강인한 위엄을 보여주고 있다. 구성과 이미지는 무난했으나 이 역시 시어 선택에서 좀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할 듯하다. 시적 에스프리는 시어에서 온다. 남궁증의 ‘가을, 아프간’과 황남희의 ‘달 자전거’도 오랫동안 거론했음을 밝힌다.

심사위원 : 최영효, 강현덕(대표집필) 시조시인

〈초대시조〉

낙엽1  
-최순향

가을 숲 빈 의자에 내려앉은 소식 하나
형용사 하나 없이 느낌표와 말없음표
하늘이 그리 곱던 날 내가 받은 옆서 한 장

낙엽2
-최순향

눈부시게 차려 입고 춤추듯 떠나가네
이승을 하직하는 가뿐한 저 발걸음
언젠가 나 떠나는 날도 저랬으면 좋겠네

◆최순향

최순향

최순향

숙명여대 졸업, 1997년  『시조생활』로 등단. 세계전통시인협회 한국본부 부이사장. 시집 『옷이 자랐다』 『Happy Evening』  등.

조락의 계절이다. 역병의 그림자가 누리를 다 덮어도 계절의 순환은 어김이 없다. 여기저기 드러누운 잎과 잎들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고 있다. 어떤 잎에서는 아직 푸른 냄새가 나고, 어떤 잎에서는 더 이상의 미련이 없다는 듯 관조의 숨결이 느껴진다. 바람도 지나가다가 잠깐 머물 때가 있고, 그냥 빠른 속도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릴 때가 있다. 시간의 흐름에 얹어지는 생의 순간들도 따지고 보면 단순하기 이를 데 없다. 푸른 잎에서 낙엽으로 변하는 시간은 재고 말고 할 것 없이 순식간이다.

‘가을 숲 빈 의자에 내려앉은 소식’ 같은, ‘하늘이 그리 곱던 날 내가 받은 엽서’ 같은, 삶은 오로지 내가 사는 게 아니라 어디선가 날아오는 소식이라 해두자. 시인은 낙엽 위에 지나간 삶의 시간을 얹어놓고 있다. 다른 사람의 눈길도 이와 같아서 어떤 사람은 낙엽을 밟으며 지나간 시간을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그 낙엽 위에 얹어지는 자신의 앞날을 생각한다. 화자의 삶이 애가여도 좋고, 행복을 노래하는 찬가여도 괜찮다. 어찌 비 오고 바람 부는 날만 있었으랴! 아니, 어찌 맑고 밝은 날만 있었으랴! 여기서 시인이 낙엽을 보는 눈은 그저 정갈하고 또한 정갈하다. ‘이승’이라는 시어 하나가 눈에 밟힌다.

이 시인의 시조는, 시는, 군더더기 ‘하나 없이’ 오로지 입 다물고 그저 가슴으로 느끼면 충분하다. 더더구나 이 가을에 어디선가 날아오는 ‘엽서 한 장’ 보거든 손에 쥐어도 보고, 눈에 담아도 보고, 마음에도 살짝 보관해 두자. 산다는 일이 산을 넘고 계곡을 지나고 구불구불한 길을 돌아 돌아 나와도 기껏해야 ‘느낌표와 말없음표’ 끌어안는 일에 지나지 않는 것을.

김삼환 시조시인

◆응모안내

매달 20일까지 e메일(choi.jeongeun@joongang.co.kr) 또는 우편(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48-6 중앙일보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으로 접수할 수 있습니다. 응모편수 제한 없습니다. 02-751-5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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