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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시해범 후손“할아버지 한 일 사죄”…그래도 아쉬운 건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54)

서지학자 이종학씨가 공개한 8종 사진 중 명성황후 숭모제전 준비위원회에서 1백주기를 맞아 복원한 명성황후도.

서지학자 이종학씨가 공개한 8종 사진 중 명성황후 숭모제전 준비위원회에서 1백주기를 맞아 복원한 명성황후도.

일본의 야만과 조선의 고통

조선에서 벌어진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한 국제여론은 잠시뿐이었다. 일제는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郎)를 주한변리공사(辨理公使)로 부임하고 이노우에를 ‘왕실문안사’라는 명목으로 다시 서울에 파견하는 파렴치를 보였다.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은 동아시아를 둘러싼 복잡한 국내외 정세 속에서 전말은 밝히지 않고 덮여 버렸다. 미국, 영국 등 각국 정부는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해 자국 외교관들의 행동 자제를 지시했다. 다만 상해의 영자지 노스차이나헤럴드가 1895년 11월 21자에 조선과 일본주재 통신원의 보고를 토대로 “이 사건의 주모자는 이노우에이며 미우라가 조선공사로 임명될 때 이미 그가 이노우에의 희생양이라는 것이 알려져 있었다”고 보도했다.

을미사변은 단발령과 함께 19세기말 항일의병이 봉기하는 원인이 되었으며, 신변이 위태롭게 된 고종이 이듬해 2월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을미사변이 일어난 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아관파천으로 경복궁은 주인 없는 궁이 되었다. 러시아 공사관에 몸을 의탁한 고종은 경운궁 중건을 서두르고, 드디어 1897년 10월12일 칭제건원(稱帝建元)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쳤다.

황제위에 오른 고종은 왕후의 시호를 명성황후(明成皇后)로 추존하고, 11월22일 장례를 치렀다. 고종은 명성황후의 시호를 올리는 의식을 하던 중 “궁중의 사변은 너무나 불측스러운 것이어서 만고에 있어 본 적이 없었다. 원수를 갚지 못하고 거상기강이 지났다. 그러나 나의 슬픔은 가눌 길이 없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1915년 일제의 본격적인 경복궁 파괴가 시작되었다. 일제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1909년 건청궁을 철거하고 1939년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미술관을 지었다. 이 미술관은 해방 후 한동안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다가 1998년에 철거됐다. 2007년 10월 18일 건청궁이 복원되고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일제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건청궁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미술관을 지었다. 미술관은 1998년 철거되고 2007년 건청궁이 복원되었다. [사진 Ymblanter on Wikimedia Commons]

일제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건청궁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미술관을 지었다. 미술관은 1998년 철거되고 2007년 건청궁이 복원되었다. [사진 Ymblanter on Wikimedia Commons]

현재까지도 을미사변은 일본이 한국에 행한 가장 악랄하고 비인간적인 만행으로 많은 한국인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나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관한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오랜 동안 머릿속에 미뤄 왔던 하나의 과제를 매듭지은 홀가분한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명성황후 죽음의 실상에 접근하는 일이 내게는 상당히 힘들었음을 여러분께 고백한다. 저서 『궁궐로 떠나는 힐링여행 –경복궁』편을 집필할 당시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한국인으로서는 너무나 치욕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아프고 감당하기 힘든 주제라, 그저 건청궁을 소개하면서 을미사변에 관해 간단한 언급을 한 정도였다.

이유는 같은 여성의 입장에서 정치의 중심에 서있어야 했던 명성황후의 고뇌와 그 인간적인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싶기도 했거니와 그 시해현장의 참혹성은 자료를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점점 고통스러운 감정이 이입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시해 현장에 있던 에조의 보고서는 그 역사적 사실성에도 불구하고 자료를 읽는 것조차 몸이 떨리는 치욕스러웠던 감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는 지금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사는 일본인에게 개인적인 적개감을 갖고 있지는 않은 사람이다. 일본인의 단정함과 그들의 예술도 내게는 크게 거부감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색깔이 있다면 나는 나만이 갖는 한국적인 문화 형태와 색깔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을 향한 열등감이 없다.

그러나 민족성이나 역사성이 대두되는 시점에서는 불가피하게 그들의 속성과 대립할 수밖에 없는 것을 실감하기도 한다. 우리 부모 세대는 일본 제국주의의 정치적 침략의 격랑 속에서 그 피해를 고스란히 온몸에 휘감고 살았다. 그리고 나 또한 내가 역사를 공부하면서 일본이 과거 우리 조상에게 저지른 침략의 만행이 드러나는 장면마다 피해자로서의 고통을 같이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일본인은 일본 정부가 조선침략기 동안 저지른 만행에 대해 모르고 있거나 그들의 우월성에 기반한 편향되고 조작된 역사를 기억한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이웃이 가장 잔인한 역사로 얽혀있는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범 110년만의 사죄

그러나 사건의 진실을 일본사회에 알리려는 그들의 작은 노력이 있었다. 2005년 5월 9일 명성황후 시해범의 후손들이 사건 110년 만에 사죄의 뜻을 전하기 위해 방한했었다. 1895년 경복궁에 침입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인 구니토모 시게아키(國友重章)의 외손자 가와노 다쓰미(河野龍巳: 당시 84세)씨와 이에이리 가키쓰(家入嘉吉)의 손자 며느리 이에이리 게이코(家入惠子: 당시 72세)씨가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 회원들과 함께 한국에 온 것이다.

가와노씨는 “혼자서는 용기가 없어 올 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명성황후에 대해 한 일을 사죄하러 왔다”고 말했다. 이들과 동행한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은 2004년 11월 결성된 시민단체로 구마모토 출신의 전직 교사 20여명이 회원이다. 이들은 10일 명성황후와 고종이 합장된 남양주시 홍릉과 여주시 명성황후 생가를 참배하고 11일 경복궁 건청궁을 찾았다.

그 후로도 나는 그들과 비슷한 일본인 단체가 건청궁에 와서 옥호루를 향해 참배하는 자세로 마당에 서 있는 것을 본적이 있었다. 이때 나와 같이 이들을 본 한국 관광객들은 일본인으로 우리의 치욕적인 현장에 서 있는 그들에게 크게 분노하지도 또는 이제라도 사과해줘 위로가 된다든지 하는 어떤 감정도 느끼기 힘든 애매한 심정이었다. 그때 나는 그냥 좀 복잡한 생각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는 기억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용기는 칭찬할 만한 행동이겠지만 일본 정부의 만행에 대해서는 개인이 아닌 정부 차원에서의 공식적인 사과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을미사변뿐만 아니라 그 이후 36년의 일제강점기 동안 그들이 우리국민에게 저지른 비인간적인 행태에 대한 사과가 필요한 것이다.

‘명성황후추모사업회’ 이영숙 회장도 명성황후 시해는 범인의 자손이 개인 자격으로 사과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라며 일본 정부에 의해 저질러진 일이니 만큼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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