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 옌칭대 등 미국인이 세운 13개 교회학교 국가 귀속

중앙선데이

입력 2021.10.23 00:21

지면보기

759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99〉 

주중대사 시절 옌칭대학 축제에 참석한 스튜어트. 오른쪽이 교장 루즈웨이. 스튜어트는 부양가족이 없었다. 대사 봉급을 교직원 복지와 대학축제, 학생 송년 만찬에 사용했다. [사진 김명호]

주중대사 시절 옌칭대학 축제에 참석한 스튜어트. 오른쪽이 교장 루즈웨이. 스튜어트는 부양가족이 없었다. 대사 봉급을 교직원 복지와 대학축제, 학생 송년 만찬에 사용했다. [사진 김명호]

1949년 8월 10일, 워싱턴에 도착한 주중대사 스튜어트에게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 버터워스(Walton Butterworth)가 권했다. “가급적이면 두문불출해라.” 스튜어트는 무슨 말인지 알 만했다. 국무장관 애치슨을 예방하고 대통령 트루먼과 국방장관 마셜을 만난 후 미·중 관계의 앞날을 우려했다. 버터워스의 권고를 흘려버렸다. 주미대사 구웨이쥔(顧維鈞·고유균)까지 참석한 옌칭(燕京)대학 교우회 초청 만찬석상에서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중공은 거리에서 시위하며 유인물이나 뿌리던 정당이 아니다. 자신들의 주의(主義)를 철저히 실행하는 정당이다. 국민당도 삼민주의(三民主義)라는 위대한 사상이 있었지만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다. 신중국은 국가주의를 추구할 것이다. 모스크바에 종속될 가능성은 제로다. 지도자들 간에 의견충돌은 발생할 수 있어도 분열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중공 당원들은 조직에 재능이 있다. 경제는 잘 모른다. 균등을 주장하며 퍼주기만 하다 곤란을 자초할 수 있다. 중공이 전 중국을 장악하면 미국도 언젠가는 승인해야 한다.”

귀국한 스튜어트 "신중국 중시해야” 강연  

1946년 겨울, 스튜어트의 부탁으로 베이징 주둔 미군이 찾아낸 서태후가 타던 승용차. [사진 김명호]

1946년 겨울, 스튜어트의 부탁으로 베이징 주둔 미군이 찾아낸 서태후가 타던 승용차. [사진 김명호]

신중국 선포 5일 후 국무부에서 열린 원탁회의에서 이런 발언도 했다. “중국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적 전통이 중공에 거대한 영향을 끼쳤다. 중국의 공산주의는 완전히 중국적인 특색을 갖췄다. 지금 중공 지도자들은 소련에서 배운 공산주의 통치방법을 취하기로 작정했다. 결국은 중국식 공산주의가 출현하고야 만다.” 국민당 실패 원인도 한마디로 정의했다. “부패와 무능 때문이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쑨원(孫文·손문)이 제창한 삼민주의를 말로만 외쳤다. 인재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찾으려 하지 않았다. 주변에 맴도는 사람들만 기용하며 개혁을 외치다 보니 사회개혁에 실패했다.”

11월 말, 뉴욕에서 열린 외교 관련 회의에 참석, 중국 공산주의 운동에 관한 독특한 견해를 피력했다. “중국의 공산주의 운동은 노동자 운동이 아니다. 농민운동도 아니다. 지식분자 운동이다. 역사적으로 중국인들은 지식인을 숭상했다. 지식인들이 공산주의를 수용하자 온 국민이 따랐다. 중공의 성공에는 국민당 못지않게 지식인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중공도 이 점을 잘 안다. 언젠가 지식인들을 탄압할 날이 온다.” 훗날 벌어진 반우파운동이나 문혁을 보면 스튜어트만이 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스튜어트는 100일간 30여 차례 회의에 참석했다. 피로가 누적됐다. 옌칭대학 교수였던 신시내티 대학 총장의 초청으로 특강 마치고 오던 중 열차 화장실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4개월간 병원 신세를 졌다.

전성기의 옌칭대학 교무위원. [사진 김명호]

전성기의 옌칭대학 교무위원. [사진 김명호]

미국은 신중국을 승인하지 않았다. 타이완(臺灣)에 새살림 차린 중화민국을 합법적인 중국 정부로 인정했다. 총통에 복귀한 장제스는 본국에 가 있던 주중대사 스튜어트의 타이베이(臺北) 부임을 거절했다. 6·25전쟁 발발 이틀 전인 1950년 6월 23일, 스튜어트의 74세 생일을 하루 앞두고 주미대사 구웨이쥔이 장에게 전문을 보냈다. “스튜어트는 중국의 교육사업에 누구도 못할 공을 세웠다. 항일전쟁 기간 일본 감옥에서 전쟁이 끝나는 날까지 고초를 겪었다. 총통 명의로 축하 화환을 보내겠다. 허락을 청한다.” 장은 구의 청을 거절했다. 감찰원장 위유런(于右任·우우임)이 장징궈(蔣經國·장경국)를 불렀다. “총통의 노여움이 아직 풀리지 않았다. 지금은 저래도 시간이 지나면 후회한다. 스튜어트는 병중이다. 네가 부친 대신 보내라.” 장징궈는 평소대로 위유런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스튜어트가 베이징에 설립한 옌칭대학은 자타가 인정하는 명문대학이었다. 중공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동북 야전군의 베이핑(北平) 진군을 앞두고 마오쩌둥이 지시했다. “옌칭대학을 보호해라.” 사령관 린뱌오(林彪·임표)에게도 전문도 보냈다. “옌칭대학 교직원, 학생들과 연합해 작전 중 손실을 감소할 방법을 의논해라.” 총 한 발 안 쏘고 베이핑에 입성한 동북 야전군은 옌칭대학에 좁쌀 100만 근(斤)을 기부하고 남쪽 전선으로 향했다. 신중국 성립 초기, 옌칭대학은 우대를 받았다. 베이징에서 열린 정치협상회의에 교직원 11명이 대표로 참석했다. 교장 루즈웨이(陸志韋·육지위)가 미국에 있는 스튜어트를 모셔오자고 해도 군말이 없을 정도였다.

교장 시절 학위 수여식을 마친 스튜어트. [사진 김명호]

교장 시절 학위 수여식을 마친 스튜어트. [사진 김명호]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하자 상황이 급변했다. 미국 유엔대사 오스틴이 총회 연설에서 중국의 교육사업에 끼친 미국의 업적을 열거하며 옌칭대학을 예로 들었다. 중공이 발끈했다. 중국에 있는 미국 재산을 압류하고 예금도 동결시켰다. 옌칭대학에 벽보가 난무했다. “미 제국주의의 문화침략을 규탄한다.” “친미(親美), 숭미(崇美), 공미(恐美) 사상을 청산하자.” 스튜어트도 미국의 간첩, 인민의 적으로 둔갑했다. 교장 루즈웨이는 생명에 위협을 느꼈다. 설립자 스튜어트를 남들보다 더 강하게 비판했다. “옌칭대학의 역사는 반동세력을 대표하는 미국 특무 스튜어트의 기록이다. 이런 대학은 없어져야 한다.” 종교학과 교수의 시(詩)가 주목을 끌었다. “스튜어트라는 물건은 달콤한 설탕으로 감싼 독약이었다. 포근한 면화(棉花) 속에 숨어, 우리의 정신을 도살한 비수였다.”

사라진 옌칭대 자리에 베이징대 들어서

1951년 2월, 중공은 미국인이 세운 옌칭대학 등 13개 교회학교를 국가에 귀속시켰다. 지식분자 사상개조 운동이 벌어졌다. 교수들이 된서리를 맞았다. 외국인들은 추방당하고, 내국인들은 비판대에 섰다. 중요 비판 대상인 루즈웨이는 “미 제국주의 간첩 스튜어트의 후계자. 제국주의자에게 충성한 문화침략의 도구”라며 직위를 박탈당했다. 1년 후, 신중국은 옌칭대학을 날려버렸다. 모든 학과를 8개 대학에 분산시켰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옌칭대학에 베이징대학이 이주했다.

미국에 있던 스튜어트의 충격은 가늠하기 힘들 정도였다. 대륙에서 자취를 감춘 교회학교 들이 타이완에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해외에 있던 옌칭대학 교우회가 스튜어트에게 권했다. “타이완에서 다시 시작하자.” 스튜어트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유가 분명했다. “베이징에 있어야 옌칭대학이다.” 다시 20년이 흘렀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