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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선 그림 속 인물, 관습·고정관념 뒤집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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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9호 19면

독일 신표현주의 거장 바젤리츠

타데우스 로팍 서울점에 설치된 바젤리츠 신작 회화들. [사진 타데우스 로팍]

타데우스 로팍 서울점에 설치된 바젤리츠 신작 회화들. [사진 타데우스 로팍]

‘남과 달라야 한다’는 명제는 모든 예술가의 강박일 터다. 한 눈에 보아도 누구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독일 출신의 게오르그 바젤리츠(Georg Baselitz·83)는 “그럼 다르게 보이도록 하면 어때”라고 묻는다. 그의 그림 속 인물은 머리가 땅을, 발이 하늘을 향하고 있다. 거꾸로 된 모습으로 벽에 걸려있는 것이다. 1969년 ‘머리 위의 나무’로 뒤집은 그림을 선보인 이래 그는 독일 신표현주의 대표작가라는 칭송을 들으며 거장으로 자리매김했다.

83년 설립돼 런던·파리·잘츠부르크에 갤러리를 낸 유럽의 명문 화랑 타데우스 로팍(Thaddaeus Ropac)은 바젤리츠와 오랜 인연을 이어왔다. 지난 6일 서울 한남동에 서울점을 열면서 개관전의 주인공으로 점찍은 인물도 바로 그였다. 2007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잊을 수 없는 기억: 게오르그 바젤리츠의 러시안 페인팅) 이후 14년 만의 국내 개인전으로, 이번 전시를 위해 새로 제작한 회화 12점과 드로잉 12점을 내놨다. 20일 파리 퐁피두 센터에서는 대규모 회고전도 시작됐다.

사람 키 훌쩍 넘는 대작 위주로 만들어

38년 동독의 작은 도시 도이치바젤리츠에서 태어난 한스 게오르그 케른은 당시 ‘퇴폐 작가’로 치부되던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대학에서 제명당하고, 서독으로 사실상 망명한 뒤 고향을 그리워하며 자신의 성(姓)을 바꿨다.

동독에서는 구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서독에서는 미국식 추상미술주의가 득세하던 시절, 그는 노골적인 내용이 담긴 구상화를 선보여 스캔들을 일으킨 뒤 자신만의 독자적인 길을 가기로 마음먹는다. 형식 중심을 벗어나 내용을 강조하고, 화면을 표현주의적으로 구성하는 스타일에 치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를 기획했던 김남인 학예사는 “황량하고 뒤틀린 인간의 모습을 제시함으로써 삶의 실존과 투쟁성, 불안과 왜곡의 신체적·감정적 상태를 드러냈다”고 분석했다.

스튜디오의 바젤리츠. [사진 타데우스 로팍]

스튜디오의 바젤리츠. [사진 타데우스 로팍]

그는 자주 바닥에 캔버스를 눕혀놓고 작업을 한다. 벽에 걸 때 비로소 위아래가 생긴다. 그는 왜 거꾸로 거는 것일까. 중앙sunday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그는 “제 그림이 모든 자연과 현실과의 관계로부터 멀어지길 원했다”고 말했다. “이미 존재하는 관습으로부터 제 그림들이 더 자유로워지길 바랬다”는 것이다. 기존과 다른, 거꾸로 된 인물을 접하게 된 관객은 무의식중에 긴장을 하게 된다. 잘 못 건 것이 아닌지, 왜 거꾸로 걸었는지, 그림 속에 그려진 것은 과연 무엇인지, 발끝부터 머리까지 내려가며 주의를 강화하게 되는 것이다. 그림을 뒤집음으로써 고정관념을 뒤집은 것이다.

이는 ‘낯선 느낌 주기’라는 맥락에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소격효과(Verfremdung)’와도 연관성이 있는데, 그는 “제 의도가 브레히트의 ‘낯설게 하기’에서 보다 더 급진적이라고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과거의 작품들에 내포된 종교적인 내용과 종교에 대한 것들은 당시의 자연과 환경에 크게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겁니다. 그때가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관객은 무의식 중에 긴장하며 감상”

바젤리츠의 드로잉 ‘무제’(2021). [사진 타데우스 로팍]

바젤리츠의 드로잉 ‘무제’(2021). [사진 타데우스 로팍]

‘독일 신표현주의 거장’이라는 수식어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독일에서 표현주의는 정치에 강하게 연결되어 있는 부분이 많은 예술 사조입니다. 저는 이렇게 예술이 정치와 결부되는 것이 계속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나치 시절에는 과거에 있었던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단절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1960년까지도 그 영향을 받아 모든 것을 온전하게 알기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러한 새로운 개념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의 작품이 흥미로운 또 다른 점은 우연의 개입을 고려했다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 내놓은 작품은 지난해부터 시도한 ‘찍어내기’ 기법을 사용했다. 캔버스에 그림을 아이들의 작업처럼 아주 단순하게 그린 뒤, 다른 쪽 캔버스에 찍어낸다. 어떤 형상이 나올지 작가도 예측이 어려운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 두세번 거듭 찍기도 하고 물감을 더 뿌리기도 한다. 김 학예사가 “바젤리츠의 인물이 구상적이면서도 동시에 구체성을 벗어난, 그 중간의 어딘가쯤에 놓여있는 듯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크다. 사람 키를 훌쩍 넘는 작품이 많다(2m가 넘는 회화 작품의 경우 가격이 대략 120만 유로(약 16억원), 드로잉의 경우 7만 5000유로(약 1억원) 내외다). 이처럼 대작 위주로 만드는 것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했다. “1950년대까지 저는 부르주아 계층에서 주로 취급되는 작은 크기의 회화를 그렸었습니다. 당시 저와 동료들은 더 높은 곳으로 가고 싶어했어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제 그림들은 이미 훨씬 작은 크기였기 때문에 그렇게 했었습니다.”

이번 한국 전시의 제목은 ‘가르니 호텔(hotel garni)’이다. 작가가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영감을 받아 붙인 이름이다. “저는 ‘아비뇽의 처녀들’ 속에 유희적인 농담이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작품에는 숙박이 아닌 즐기려고 찾는 모텔에 대한 암시가 내재되어 있어요. 그 유희적인 의미를 담기 위해 독일에서 저렴한 모텔을 암시하는, ‘가르니 호텔’을 제목으로 하게 됐습니다.”

바젤리츠의 작품 속 모델로 아내인 엘케 여사가 자주 등장한다. 그는 57년 작가를 처음 만나 62년 결혼해 60년 세월을 작가의 뮤즈로 살아오고 있다. “모델이 그림에서 하나의 템플릿처럼 적용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난 몇십 년간 이 생각은 제 작품에서 매우 긴밀하게 실천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작품에서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오직 저 자신을 포함한 과거에 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타데우스 로팍 서울의 황규진 디렉터는 “주제를 추상화하고 낯설게 만들지만 강렬한 표현주의적 필치로 대상의 핵심을 담아내는 바젤리츠의 작품을 통해 회화의 새로운 매력을 느껴보시라”고 주문했다. 전시는 11월 2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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