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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란신, 여성·보석·발레 ‘뫼비우스 띠’처럼 묶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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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9호 18면

[유주현의 비욘드 스테이지] 국립발레단 신작 ‘주얼스’

발레 종가 파리오페라발레단에서 최고 스타에게 부여하는 ‘에투알’ 칭호를 올해 거머쥔 박세은은 2018년 발레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를 수상하며 일찍이 세계 최고의 무용수로 인정받았다. 그에게 이 상을 안긴 건 러시아 출신의 미국 안무가 조지 발란신(George Balanchine·1904~1983·아래 사진)의 ‘주얼스(Jewels)’ 중 3막 ‘다이아몬드’ 파드되였다. 2016년 같은 상을 받았던 마린스키 발레단의 보석, 발레리노 김기민도 러시아에서 이 작품 2막 ‘루비’의 주역을 도맡고 있다.

조지 발란신

조지 발란신

국내팬들도 드디어 이 걸작을 만났다(20~23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국립발레단이 ‘신고전주의 발레 창시자’의 1967년작을 이제야 선보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까다로운 라이선스 관리로 유명한 발란신 트러스트가 엄격한 잣대로 발레단의 테크닉 수준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장인주 무용평론가는 “지금 ‘주얼스’를 올리게 된 것은 우리 사회의 문화 수준과 국립발레단의 위상이 얼마나 높아졌는지를 말해준다”며 “발란신이 없었다면 미국 발레가 없었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는 발레사의 핵심 인물이다. ‘여자는 보석을 좋아하고, 발란신은 여자를 좋아하고’라는 유명한 말이 있는데, 발란신과 여성, 보석, 발레가 뫼비우스의 띠로 묶인 작품이 ‘주얼스’”라고 설명했다.

무용수 개성 존중, 20세기 발레 혁명가

‘주얼스’는 발란신이 명품 주얼리 브랜드 반클리프 아펠의 보석에서 영감을 받아 창작한 작품으로, 에메랄드·루비·다이아몬드 3가지 보석을 3막에 걸쳐 각기 다른 음악과 의상과 안무 스타일로 표현한 최초의 전막 신고전주의 작품이다. 러시아 황실발레학교와 마린스키 발레단 출신으로, 프랑스를 본거지로 삼았던 디아길레프의 발레뤼스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시티발레단을 만든 발란신의 인생 역정이 고전과 낭만, 모던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발레 스타일에 담겨있다.

발란신의 ‘신고전주의’란 뭘까. 고전발레 같은 스토리 라인과 무대 장치를 배제하고, 음악을 표현하는 무용수의 몸과 춤 자체를 부각하는 방식이다. ‘안무의 모차르트’라 불렸던 발란신은 음악 연구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음악을 보는 듯한’ 안무를 구사했다. 가브리엘 포레·이고르 스트라빈스키·표트르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3가지 스타일로 풀어낸 ‘주얼스’를 통해 프랑스와 미국과 러시아를 각각 상징하는 음악과 춤의 관계성을 모두 느낄 수 있는 셈이다.

발레에서 여전히 드라마와 극적 요소를 중시하는 많은 한국 관객들은 스토리라인이 없는 무대를 어떻게 지켜보는 게 좋을까. 정옥희 무용평론가는 “발란신의 특별함은 아무렇지도 않게 관습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데서 나온다. 오프 발란스의 독특한 구성과 움직임을 구사하면서도 러시아 황실발레단 출신다운 고전발레의 미학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요컨대 고전의 틀을 유지한 채 자유롭게 넘나든다는 얘긴데, 이런 그의 스타일을 전막 발레로 펼쳐낸 게 ‘주얼스’다.

‘주얼스’ 1막은 에메랄드와 가브리엘 포레의 음악을 형상화했다. [사진 국립발레단]

‘주얼스’ 1막은 에메랄드와 가브리엘 포레의 음악을 형상화했다. [사진 국립발레단]

명품 브랜드 반클리프 아펠은 각 무대를 오마주해 시계로 제작했다. [사진 반클리프 아펠]

명품 브랜드 반클리프 아펠은 각 무대를 오마주해 시계로 제작했다. [사진 반클리프 아펠]

1막 ‘에메랄드’는 마치 프랑스 낭만발레 대표작 ‘지젤’처럼 우아하고 서정적인 미장센의 연속이다. 발레리나들은 지젤과 윌리들이 입는 로맨틱 튀튀(에메랄드 색깔인 짙은 초록빛이다)를 입고 구름 위를 걷는 천상계의 존재들인양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뽐낸다. 우아함의 생명은 폴 드 브라(팔동작)와 상체 연기에 달렸는데, 발란신의 시그니처인 ‘갈란드’(화환처럼 손에 손을 맞잡은 채 팔을 꼬면서 이어가는 동작)가 듬뿍 사용됐기 때문이다. 압권은 클라이맥스에 마치 ‘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군무를 보듯 유려한 흐름의 대형 변화다. 예컨대 7명이 나와 따로 춤추다 2-3-2 대형으로, 다시 3-4로 춤추다 다 함께 한 덩어리를 이루며 마무리되는 식의 물 흐르듯 유기적이고 현대적인 구성미가 클래식의 아우라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루비와 스트라빈스키를 표현한 2막. [사진 국립발레단]

루비와 스트라빈스키를 표현한 2막. [사진 국립발레단]

명품 브랜드 반클리프 아펠은 각 무대를 오마주해 시계로 제작했다. [사진 반클리프 아펠]

명품 브랜드 반클리프 아펠은 각 무대를 오마주해 시계로 제작했다. [사진 반클리프 아펠]

1막이 프랑스 낭만발레의 정수를 뽑아 만들었다면, 2막 ‘루비’는 미국식 모던발레로 급반전된다. 현란한 피아노 솔로가 중심이 되는 스트라빈스키의 빠르고 역동적인 음악에 맞춰 무용수들은 ‘깡충깡충’ 뛰어다닌다. 루비를 의미하는 강렬한 붉은색 발레 코스튬을 입은 채 뮤지컬 군무나 스윙댄스 스텝을 밟는 듯한 익살스러운 장면들이 가득하다. 순혈주의를 고수하지 않고 당대의 대중적인 춤을 발레화한 느낌이 과연 ‘20세기 발레 혁명가’답다.

다이아몬드에 차이콥스키를 연결한 3막. [사진 국립발레단]

다이아몬드에 차이콥스키를 연결한 3막. [사진 국립발레단]

명품 브랜드 반클리프 아펠은 각 무대를 오마주해 시계로 제작했다. [사진 반클리프 아펠]

명품 브랜드 반클리프 아펠은 각 무대를 오마주해 시계로 제작했다. [사진 반클리프 아펠]

웅장하고 화려한 차이콥스키 음악을 쓴 3막 ‘다이아몬드’는 고전 그 자체로 급 회귀한다. 러시아 황실발레의 위엄을 표현하는 화려함과 절제미로 점철된 웅장한 군무 타임은 마치 고전발레에 경의를 표하는 듯한데, 2막의 파격 탓에 더욱 압도적이다. 전막 가운데 유일한 무대장치로 등장한 액자 프레임도 의미심장하다. 발레는 고전의 틀이란 게 분명히 있지만, 그 틀을 넘나들 때 틀 자체도 돋보일 수 있다는 뜻 아닐까.

보존에 방점 찍힌 발란신 스타일 딜레마  

사실 발란신의 작품을 공연하는 데는 딜레마가 따른다. 자기 작품을 할 때도 동작의 원형을 유지하지 않고 각 무용수의 개성을 살리는 ‘열린 예술가’였던 그가 사후 ‘미국 발레의 아버지’가 되고 그의 작품들이 ‘유산’이 되면서 그 어떤 안무가보다 ‘보존’에 방점이 찍히게 된 아이러니 탓이다. 이번 공연에도 발란신 트러스트에서 발란신과 함께 했던 ‘레퍼티터(repetiteur·연습코치)’가 파견돼 ‘폴 드 브라에서 세 손가락만 보여선 안 된다’는 식으로 발란신 스타일을 전수했다. 정옥희 평론가는 “발란신의 작품은 동작뿐 아니라 스타일까지 정답이 있고, 초연 무용수들이 경험담을 풀어낸 비디오까지 제작되면서 그들의 해석까지 남았다. 오늘날 공연하는 무용수들은 발란신의 테크닉과 스타일, 초연 무용수의 해석까지 어깨에 짊어져야 하는 상황”이라면서 “하지만 무용수 개성을 존중하고 발레와 대중무용을 넘나든 것이 진짜 발란신 스타일인 만큼, 우리 무용수들도 단순히 배우는 자세를 벗어나 내가 주인이 되어 해석할 수 있다는 주체성을 가져야 한다”고 바람을 전했다.

반클리프 아펠, 발레 ‘주얼스’ 오마주한 제품 출시하며 윈윈 관계

발레 ‘주얼스’가 흥미로운 또 다른 이유는 명품 보석 브랜드인 반클리프 아펠(Van Cleef & Arpels)과의 행복한 관계에 있다. 파리오페라극장에서 발레를 보고 자란 클로드 아펠은 1940년대 초 발레리나 클립을 만들어 브랜드의 시그니처 스타일로 삼았다. 그가 발란신과 인연을 맺으면서 탄생한 무대가 ‘주얼스’다.

이후 반클리프 아펠은 ‘주얼스’를 오마주한 제품을 꾸준히 제작하고 있다. 올해 나온 시계 컬렉션 ‘레이디 아펠 발레리나 뮤지컬’시리즈의 경우 각각 초록빛 에메랄드, 붉은색 루비, 영롱한 다이아몬드를 테마로 삼고, 반짝이는 샹들리에를 수많은 다이아몬드 장식으로 구현해냈다. 여닫히는 커튼 뒤로 각각 다른 포즈로 춤추는 발레리나들이 연속해서 나타나는데, 특히 오르골과 카리용(작은 종)이라는 두 가지 악기를 탑재해 포레·스트라빈스키·차이콥스키 세 작곡가가 만든 클래식 선율이 20여 초간 흘러나올 수 있게 한 점도 눈길을 끈다.

반클리프 아펠은 ‘주얼스’를 공연하는 전 세계 발레단에도 후원을 아끼지 않는데, 국립발레단에도 2017년부터 4년째 후원을 이어오고 있다.

공연평론가인 한정호 에투알클래식 대표는 “명품 브랜드의 발레·오페라 신작 후원은 단순히 고객 관리 차원을 넘어 아티스트와 공연 조직이 금전에 얽매이지 않고 예술의 극치를 구체화할 기회를 제공한다”고 강조했다. 반클리프 아펠과 ‘주얼스’의 윈윈 관계가 럭셔리의 정체성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면서 예술가와 예술작품을 함께 풍요롭게 하는 민간 예술후원의 바람직한 모델이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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