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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Z세대 “웬만한 재테크론 내집 마련 못 해” 초고위험 선물·옵션에 ‘올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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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9호 08면

[SPECIAL REPORT]
MZ세대 투기장 된 파생상품

“투자로 진 빚만 거의 2억(원)이에요. 월급을 단 한 푼도 안 쓰고 5년 넘게 모아야 만회할 수 있는 액수인데 막막합니다.” 회사원 박모(38)씨는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박씨는 올 4월 처음 대표적 해외 파생상품인 나스닥100지수 추종 선물(先物·어떤 금융자산을 미리 정한 가격으로 미래의 일정 시점에 인도 또는 인수할 것을 약정하는 거래)에 손을 댔다가 반년 만에 이렇게 됐다고 했다. 파생상품은 주식이나 채권, 철광석과 같은 원자재, 통화 등을 기초자산으로 삼고 기초자산의 가치 변동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는 상품이다. 선물이 대표적인데 손실 위험이 크지만 반대로 큰돈을 벌 수도 있는 게 특징이다.

암호화폐에 몰렸던 개미들 방향 바꿔

박씨는 파생상품 투자 초기엔 기대 이상의 재미를 봤다. 1000만원가량의 원금이 한 달여 만에 8000만원이 돼 있었다. 박씨는 “지금 생각하면 초심자의 행운이라서 그때 (투자를) 멈추고 돈을 빼냈어야 했다”며 “순식간에 돈이 8배로 불어난 걸 보고는 눈이 돌아갔다”고 말했다. 1억원을 넣었으면 8억원이 됐을 텐데 아쉽다는 생각이 그를 사로잡은 것이다. 박씨는 결국 예금 통장과 비상금을 탈탈 털고, 각종 대출까지 받아 해외 파생상품 투자에 ‘올인’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그는 “특히 금융당국의 규제 대상인 국내 파생상품과 달리, 규제에서 자유로운 해외 파생상품 중엔 수십 배의 레버리지가 가능한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레버리지는 쉽게 말해 대출을 끼고 투자해 수익률을 몇 배로 높이는 식이다. 선물·옵션과 같은 전통적 파생상품 거래엔 일반 주식 등 현물 거래와 달리 ‘증거금’이라는 개념이 있다. 예컨대 원금 1000만원을 증거금으로 걸면 1억원짜리 상품을 거래할 수 있는데, 이 상품이 20%만 올라도 투자 원금 대비 수익률은 2배인 2000만원이 된다. 거꾸로 상품 수익률이 -20%라면 빚이 1000만원 생긴다. 이때 레버리지가 고배율일수록 수익률의 변동성도, 투자자가 얻거나 잃는 금액도 한층 커지게 마련이다. 국내엔 2배 이상 고배율 상품을 출시할 수 없지만 미국 등 해외엔 3배 이상 되는 고배율 상품이 수두룩하다.

‘대박과 쪽박 사이’, 고위험·고수익 투자 분야 중에서도 최고봉으로 꼽히는 이런 해외 파생상품으로 국내 개인 투자자(개미)들의 발걸음이 쏠리고 있다. 금융투자협회와 더불어민주당 김병욱 의원실에 따르면 올해 1~8월 개인 투자자의 해외 파생상품 거래액은 5115조원에 달했다. 지난해 1~8월(4454조원)보다 15%, 2019년 1~8월(2901조원)보다는 76% 각각 증가한 수치다. 또 지난해 전체(1~12월) 거래액은 6580조원으로 3년 전인 2017년 대비 3배 이상 증가했다. 같은 기간 국내 파생상품 거래액 증가세(1.6배)에 비해서도 두드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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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여기에 원자재·환율 등 각종 기초자산을 바탕으로 설계한 금융 파생상품을 더하면 해외 파생상품 투자 규모는 더 커진다. 김 의원실 집계치는 파생상품과 거래액의 범위를 증권사 등을 통해 발생한 선물·옵션으로 한정했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해외 증시에 상장된 4~5배의 레버리지나 인버스(기초자산 가격 움직임과는 반대로 설정한 상품) 상장지수증권(ETN) 등의 상품을 주요 근거로 추산한 수치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건 이른바 ‘MZ세대(1980년대 초반부터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와 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 출생한 Z세대)’인 20·30대가 대거 유입되고 있다는 것이다. 2019년 21~30세는 380조원, 31~40세는 990조원어치의 해외 파생상품을 거래했다.

하지만 지난해 들어 21~30세는 807조원, 31~40세는 1679조원어치를 각각 거래했다. 전년 대비 각각 112%, 70% 거래액이 급증한 것이다. 같은 기간 41~50세(40%)나 51~60세(30%)의 거래액 증가율을 크게 상회했다. MZ세대는 왜 해외 고배율 파생상품에 몰리고 있는 걸까. 이들은 크게 두 가지를 이유로 꼽는다. 하나는 최근 천정부지로 치솟은 집값이다. 결혼을 준비 중인 대학원생 심모(28)씨는 “이제 내 집 마련이 웬만한 재테크 수익률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 됐다”며 “해외 파생상품이 위험하더라도 기대 수익률은 상당히 높으니까 여기에 투자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심씨는 “막말로 해외 파생상품에 투자했다가 빚이 수천만원 쌓여도 삶이 여기서 더 크게 나빠지지는 않지만, 집 살 돈을 저위험·저수익 투자로 모으려 했다가 1년 만에 수억원씩 오르는 집값을 따라잡지 못하면 외려 훨씬 타격이 크다”며 “나처럼 생각하는 친구들이 주위에 적잖다”고 덧붙였다.

증권사, 수수료 노려 과도한 마케팅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다른 하나는 유행처럼 퍼지고 있는 ‘파이어족(30대 후반, 늦어도 40대 초반까지 경제적 자립을 달성해 조기 은퇴하려는 사람들)’의 사례다. 정년까지 일하는 것보다 빠른 은퇴 후 여생을 다른 관심사에 쏟으며 보내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보는 파이어족이 주변에 늘고 있고, 일부의 실제 성공담도 접하면서 자극을 받았다는 게 MZ세대의 얘기다. 회사원 장모(36)씨는 “경제의 고속 성장기에 직장인이었던 기성세대는 (직장에) 목숨 바쳐 일한 게 자신과 가족한테 고스란히 이득으로 돌아왔지만, 저성장과 저금리에 익숙한 우리 세대한테는 딴 세상 얘기”라며 “회사가 언제 망할지, 내가 언제 잘릴지 모르는 마당에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투자 수익을 극대화해 불확실한 미래 걱정을 떨치는 게 급선무가 됐다”고 말했다.

이들은 비슷한 이유로 다른 고위험·고수익 투자 분야인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로도 몰린 바 있지만, 근래 들어서는 해외 파생상품으로 더 몰리고 있는 분위기다. 국민의힘 윤두현 의원실에 따르면 국내 4대 암호화폐 거래소인 업비트·빗썸·코인원·코빗의 신규 가입자 수는 올해 2분기 들어 1분기 대비 90% 이상 급감했다. 이는 암호화폐 시세가 최근 반등하기 전까진 수차례 폭락하는 등 고수익보다 고위험 측면이 더 부각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여기에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올 초까지 호조세였던 국내 증시가 다시 지지부진해진 것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각에선 증권사들이 파생상품 수탁수수료 수익을 염두에 둔 과도한 마케팅이나 투자 권유로 이런 현상을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익명을 원한 업계 관계자는 “증거금 문턱을 낮춰주거나 수수료를 깎아주는 식으로 파생상품 영업에 집중하면서 개인 투자자 유입이 계속 늘고 있다”고 전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올 상반기 국내 증권사 14곳의 해외 파생상품 수수료 수익은 2200억원대에 달했다. 이 밖에 서학개미 열풍을 낳았던 해외 증시가 미국발 긴축 우려 등에 최근 3개월 ‘갈 지(之)’자 행보를 보인 것도 파생상품의 인기에 날개를 달아줄 것이란 전망이다.

문제는 파생상품 자체가 단순히 고위험이라고 하기에도 미묘한 초(超)고위험의 분야인 데다, 투자 난도 역시 매우 높다는 점이다. 이상건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전무는 “파생상품은 이미 레버리지 효과를 내포했으므로 무리하게 대출까지 받아 투자해선 안 된다”며 “감당할 수 있는 선의 소액만 투자하고, 수익이 나더라도 바로 추가 투자에 나서는 대신 한걸음 물러서서 냉철하게 다음 전략을 세우는 식으로 승부해야 승산이 커진다”고 조언했다.

국내는 자격 있어야 거래, 해외는 문턱 없어 증거금만 내면 가능

금융투자교육원은 국내 파생상품 사전교육을 하고 있다. [사진 금융투자협회]

금융투자교육원은 국내 파생상품 사전교육을 하고 있다. [사진 금융투자협회]

파생상품은 기본적으로 고위험·고수익 상품이기 때문에 주식 거래를 하듯 누구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위험성을 충분히 알고 투자하라는 의미에서 정부는 개인 투자자들에게 국가 공인 교육을 받게 하고 있다. 이 교육을 이수하지 않으면 증권사 홈트레이딩시스템(HTS)이나 모바일트레이딩시스템(MTS) 메뉴에서 파생상품 투자 자체를 선택할 수 없다. 교육을 받아야만 적격투자자가 되는데, 그렇다고 바로 투자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교육을 받고 난 다음에는 모의투자(모의거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역시 파생상품의 위험성을 투자자들이 미리 체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필수 과정이다. HTS·MTS 메뉴에서 모의투자 이수 여부를 등록할 수 있다. 이용 중인 증권사나, 투자하고자 하는 파생상품을 운용하는 증권사를 통해 직접 모의투자를 할 수 있다.

이 같은 사전교육과 모의투자는 1~3그룹으로 나눠 이수하게 하는데, 각 그룹마다 해당자와 필요 시간에 차이가 있다. 1그룹은 공격투자형 및 파생상품형 금융상품 거래 경험자다. 이들은 1시간의 교육, 3시간의 모의투자를 이수해야 한다. 2그룹은 공격투자형 및 파생상품형 금융상품 거래 미경험자다. 3시간의 교육, 5시간의 모의투자를 이수해야 한다. 3그룹은 공격투자형 미만 또는 1·2그룹임에도 만 65세 이상 고령자인 경우다. 이들은 10시간의 교육과 7시간의 모의투자를 이수해야 한다.

이 같은 과정을 마치고 계좌 개설 후 10거래일 이상 또는 미결제약정 보유 후 선물·옵션 기본예탁금 2000만원을 걸었다면 모든 파생상품 거래가 가능하다. 다만 이 같은 과정은 국내의 파생상품을 거래할 때만 적용된다. 해외 파생상품 거래는 국내처럼 법적으로 사전교육이나 모의투자 의무가 없어 상대적으로 진입이 용이하다. 국내 증권사를 통해 수수료와 상품별로 해외 거래소가 정한 증거금만 내면 된다.

이 때문에 해외 파생상품 투자 때도 개미들이 사전교육과 모의투자 등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둬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 나오고 있다. 한 전문가는 “개인 투자자들의 해외 파생상품 투자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면서 손실이 커지고 있는 만큼 사전교육 등 위험에 대한 관리가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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