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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한명기의 한중일 삼국지

조선의 아킬레스건 왜관 ‘일본엔 낙토, 조선엔 종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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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조선은 왜 왜관을 허용했나

조선 후기 화가 변박이 1783년 초량왜관을 그린 ‘왜관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조선통신사 기록물’에 포함됐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청]

조선 후기 화가 변박이 1783년 초량왜관을 그린 ‘왜관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조선통신사 기록물’에 포함됐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청]

“동래 왜관(倭館)은 부산진(釜山鎭) 아래에 있어 우리 수군의 허실을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또 물자를 교역할 때 기강이 엄하지 않고 금령(禁令)이 해이하여 왜인과 아국인의 출입이 무상합니다. 왜인 가운데 우리말을 할 줄 아는 자가 매우 많아 우리나라 사정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모조리 탐지하고 있습니다. 국가가 생긴 이래 변방의 방어가 튼튼하지 못하고 방어의 금령이 주밀(綢密)하지 못한 것이 오늘날처럼 심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1635년 10월, 암행어사로 경상도 일대를 순행했던 윤계(尹棨·1603~1636)가 인조에게 상소한 내용이다. 두모포(豆毛浦·부산시 수정동 일대)에 있던 왜관이 조선 수군의 배치 상황을 훤히 엿볼 수 있는 곳에 있다는 것, 왜관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접촉이 빈번하다는 것, 왜관에 조선말을 잘하는 일본인이 많아 조선 관련 정보가 모조리 일본으로 유출된 상황을 지적했다.

부산 등 4곳에 일본 거류지 설치
일본엔 조선인 구역 없어 대조적

조선 초 왜구 없애려고 처음 도입
외교·무역거점 의미 갈수록 퇴색

국가정보 일본 유출 부작용 심각
오늘날 현명한 대일관계는 무엇?

왜관은 일본인의 거류 공간이자 외교와 무역의 거점이었다. 조선 초에는 부산포(富山浦·부산), 염포(鹽浦·울산), 제포(薺浦·웅천) 삼포(三浦)와 동평관(東平館·한양) 등 모두 네 곳에 왜관이 있었다. 우리나라에 일본 공관이 있으면 일본에도 당연히 우리 공관이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왜관은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다. 조선에만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관(朝鮮館)’, 혹은 ‘한관(韓館)’으로 불렸을 조선인의 거점이 일본에는 없었다. 왜 이렇게 일방적이고 비대칭적인 상황이 빚어졌을까.

거주지 벗어나 인신매매도 자행

병자호란 때 순절한 윤계 선생 추모비. 경기도 화성시 남양동에 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청]

병자호란 때 순절한 윤계 선생 추모비. 경기도 화성시 남양동에 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청]

조선이 왜관을 설치해 준 배경에는 왜구(倭寇·일본 해적) 문제가 자리 잡고 있었다. 14세기 후반부터 왜구는 남해와 서해는 물론 내륙까지 침범하여 인적·물적으로 막심한 손해를 끼쳤다. 1419년(세종 1) 대마도를 정벌하기도 했던 조선은 왜구를 막기 위해 회유책을 꺼내 들었다. 경제 자활(自活)이 어려워 왜구가 될 가능성이 있는 대마도·일기도(壹岐島)와 규슈 일대의 일본인에게 경제적 기반을 제공하여 그들을 평화적인 통교자로 전환하겠다는 정책이었다. 때론 벼슬까지 주는 파격적인 우대책이었다.

왜관은 조선으로 몰려드는 일본인을 접대·통제하려는 목적에서 생겨났다. 조선의 회유책은 일단 성공적이었다. 왜구가 입히는 피해가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작용이 만만치 않았다. 15세기 중반, 삼포 지역에 거주한 일본인은 수천 명에 이르렀다. 그들 가운데 불법 행위를 저지르는 자들이 속출했다. 지정된 거주 구역을 벗어나거나 밀무역, 불법 어로 등을 일삼고 인신매매를 자행하는 자들도 있었다.

일찍이 세종이 일본인이 삼포에 거주하는 것을 허용하려 할 때 허조(許稠·1369~1439)는 훗날 커다란 화근이 될 것이라며 강하게 반대한 바 있다. 허조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1503년(연산군 9) 정인인(鄭麟仁)은 “삼포는 일본인에게는 낙토(樂土)지만 조선의 입장에서는 뱃속의 종기”라고 진단했다.

중종대 이후 조선은 삼포 거주 일본인을 통제하기 위해 부심했다. 삼포 주변에 목책을 설치하고 밀무역 등을 차단하고 세금을 부과하겠다고 통고했다. 그러자 1510년(중종 5) 삼포의 일본인은 대마도와 합세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부산첨사(釜山僉使)를 살해하고 동래부사(東萊府使)를 포로로 잡고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 삼포왜란(三浦倭亂)이었다. 조선은 군대를 보내 폭동을 진압했지만, 이미 회유책에 익숙해진 일본인은 조선의 통제에 순응하려 들지 않았다. 1544년 일본인은 다시 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을 일으킨다.

내키지 않는 왜관 재개와 이전

조선 후기 도승지·동래부사 등을 지낸 이이장 초상.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청]

조선 후기 도승지·동래부사 등을 지낸 이이장 초상.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청]

1592년 임진왜란을 계기로 네 곳의 왜관은 모두 없어졌다.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높아진 데다 왜관의 일본인이 침략군의 앞잡이가 된 실상을 목도한 조선은 왜관을 다시 열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조선과의 무역이 생명선이었던 대마도는 전쟁이 끝나자 필사적으로 조선에 매달렸다. 사신을 보내 침략을 사과하고, 붙잡아갔던 조선인 포로를 송환했다. 그럼에도 조선이 냉담한 반응을 보이자 대마도는 “막부(幕府)를 움직여 다시 쳐들어올 수도 있다”며 협박했다.

조선은 7년 전쟁이 남긴 후유증을 치유하고 북방에서 세력이 커지고 있던 누르하치의 위협에도 대처해야 했다. ‘재침’을 운운하는 대마도와 일본의 협박을 무시할 수 없었다. 1601년(선조 34) 절영도(絶影島)에 임시로 왜관을 설치해 주고, 1607년 두모포에 정식으로 왜관을 복설(復設)해 주었다. 하지만 왜관의 일본인이 상경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했다.

임진왜란 직후까지만 해도 일본과 대마도는 조선에 대해 조금이나마 미안해하는 마음이 있었다. 무고하게 침략전쟁을 자행했던 ‘원죄’ 때문이었다. 하지만 1620년대 조선이 명과 후금 사이에 끼여 다시 곤경에 처하자 그들은 ‘본색’을 드러낸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대마도는 ‘무기 원조’ 등을 제의하면서 접근한다.

조선은 후금의 침략 사실을 일본인에게 숨기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강화도로 피신한 인조가 경상도의 수군까지 차출하여 서해를 방어해야 했던 처지에서 대마도나 일본에 저자세일 수밖에 없었다. 대마도는 1629년 왜란 이후 처음으로 조선으로부터 외교승(外交僧) 현방(玄方)의 상경 허락을 받아낸다.

조선이 1636년 병자호란으로 청에 굴복하자 일본의 기세는 더 등등해진다. 왜관에 머무는 사신들의 상경을 허용하고 일본인에 대한 접대 수준을 높여달라고 요구했다. 그뿐만 아니라 두모포 왜관의 관사와 포구가 좁고 부실하다며 개축해 줄 것도 강청했다. 1640년부터는 아예 왜관을 다른 곳으로 이전해 달라고 요구했다. 병자호란 이후 대마도와 일본을 포용하는 것이 절실했던 조선은 오랜 교섭 끝에 1678년(숙종 4) 왜관을 두모포에서 초량(草梁·용두산 공원 일대)으로 이전해 준다.

영조 때에는 1000명 넘게 상주

조선시대 승정원에서 발행한 관보인 ‘조보’.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청]

조선시대 승정원에서 발행한 관보인 ‘조보’.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청]

왜관에는 주로 대마도에서 건너온 사절과 상인, 무사들이 머물렀다. 조선은 동래부사를 창구로 왜관과 외교 현안을 논의했다. 또 한 달에 여덟 차례 조선 상인이 왜관에 들어가 각종 물자를 교역했다. 영조 연간에는 1000명이 훨씬 넘는 일본인이 왜관에 거주했다.

수많은 일본인이 상주하다 보니 왜관 안팎에서는 갖가지 사건과 분쟁이 빈발했다. 밀무역은 다반사였고, 땔감 마련, 온천욕, 사찰 방문 등을 핑계로 일본인이 경계를 넘어 조선인 마을로 들어가거나 장시(場市)에 출몰했다. 왜관의 일본인 남성과 초량 등지에 사는 조선 여성 사이의 통간(通奸) 문제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조선의 정책이나 조처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일본인은 떼를 지어 왜관을 박차고 나와 동래부 등지로 몰려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것을 난출(闌出)이라고 부른다.

특히 심각한 문제는 왜관을 통해 조선의 내부 정보가 일상적으로 유출되고 있는 점이었다. 1년 내내 교역이 벌어져 경기(景氣)가 좋았던 왜관 주변에는 상인·역관 등 다양한 조선인이 몰려들었다. 조보(朝報·정부 관보)를 팔아넘기는 자도 있었다. 왜관이 직접 조선인을 매수하기도 했다. 이미 다뤘듯이 왜관은 1721년부터 조선인을 시켜 ‘동식물 조사 사업’을 벌이고 조선 산삼의 생초를 반출해 가기도 했다.

“우리의 국가 기밀을 왜관의 왜인이 먼저 알고 있다”는 통탄이 나오는 상황에서 조선은 왜관의 일본인을 상대하는 원칙(接倭之道)을 놓고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영조대 동래부사를 지냈던 이이장(李彝章·1708~1764)은 일본인을 상대할 때는 은혜와 위엄을 3대 7 비율로 병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활하고 명민한 데다 조선 사정을 훤히 알고 있는 그들에게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되, 규정 이외의 것을 요구하거나 무례하게 행동할 경우에는 단호하게 거부하고 물리치는 것이 접왜지도의 요체라고 설파했다. 하지만 영·정조대 이후 조선의 국력이 급속히 쇠락하면서 접왜지도를 실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베 신조가 물러나고 총리가 두 번이나 바뀌었지만 최악의 상황에 처한 한·일관계가 개선될 기미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핵을 가진 북한, 날로 힘이 세지는 중국과 마주해야 하는 버거운 상황에서 여전히 만만찮은 강국이자 우리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일본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까. 나라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현명한 ‘접왜지도’를 강구하는 것이 참으로 절실한 시점이다.